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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4/북성동 포구와 차이나타운(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3. 8.16)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4
북성동 포구와 차이나타운
빛바랜 추억서 번창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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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 북성동은 개항 이전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였다.
개항 직후 부두 지역은 서구 여러 나라의 권리를 조장하는 각국지계에 속했고, 자유공원(응봉산) 서쪽 현재 차이나타운 지역은 청국지계에 속했다.
한일강제합병 후 일본은 이곳을 초대 일본공사였던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 1842~1917)의 이름을 따서 화방정(花房町. 하나마치)이라 고쳤다.
그때 일본 군함이나 위인들의 인물에서 지명을 딴 경우가 있지만 화방정은 가장 고약하다.
하나부사는 일본의 정한론(征韓論)을 실현하는 첨병으로서 온갖 해악을 저질렀고 임오군란 때 한성(서울)을 탈출해 인천에서 북성포구와 월미도를 통해 제 나라로 돌아갔다.
임오군란 때 제 손으로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도 뒷날 배상을 요구하며 치욕적인 제물포조약을 이끌어냈다.
일제는 하나부사가 제물포조약을 성사시켰다고 해서 항구 거리 이름을 그의 이름으로 고쳤던 것이다.
광복 후 일본식 지명을 우리말 지명으로 바꿀 때 이곳은 북성(北城)포구에서 따서 북성동이라 명명했다.
인천 개항장 '다운타운'의 다른 마을들과 달리 북성동은 깊은 지명의 유서를 갖고 있다.
우선 주목을 끄는 것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있는 '인천군의 서쪽 15리에 제물량(濟物梁)이 있다.
성창포(城倉浦)에 수군 만호(水軍 萬戶)가 있어 수어(守禦)한다. 병선 4척 무군선 4척, 각관의 좌우령 선군이 총 510명이다'라는 기록이다.
수군의 만호 지휘관과 병력은 효종 때 강화로 옮겨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인천부 서쪽 19리에 제물량영(濟物梁營)이 있다', '제물진은 인천부 서쪽 18리에 있는데 성 주위가 25보이다'라는 것이다.
옛 기록에 15리, 19리, 18라고 한 것은 지금 관교동의 인천 관아를 기준으로 잡았다.
성창포란 성곽과 세곡(稅穀) 창고가 있는 포구라는 뜻이다.
조선왕조 말기 서구 열강이 통상을 요구하며 이양선을 몰고 나타나기 전, 인천은 삼남지방에서 싣고 온 세곡을 하역해 한성으로 보내는 작은 포구였다.
왜구의 노략질이나 해적들의 발호를 막는 수군기지가 한동안 설치됐다가 강화로 옮겨 갔다.
1878년 조선 조정은 이양선을 막기 위해 화도진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여러 포대를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북성포대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성곽의 북쪽에 위치했고, 그 때 이미 그 언저리를 북성포구라 부르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인천항의 중심인 항동과 중앙동 앞 포구는 작은 성곽과 수군기지가 있던 성창포였고, 그보다 북쪽인 지금의 인천역 뒤쪽 월미도 가는 길에 있는 대한제분 인천공장 자리가 북성포였던 것이다.
그 때는 바다로 돌출한 지형이어서 '북성곶(串)' 또는 북성고지라고 불렀고 거기 포대를 설치했다.
오늘날 북성동 지명은 그런 연원을 갖고 있다.
요즘 다시 번화의 길로 들어선 차이나타운은 당시 청관(淸館)이라 불렀는데, 언덕 기슭에 지계 업무를 보는 청국의 이사부(理事府)라는 관청이 있어서 그런 지명을 갖게 됐다.
조선왕실 돈주머니 역할을 했다고 전해지는 거물 화상(華商) 동순태(同順泰)와 인합동(仁合東), 동화창(東和昌) 등의 자본이 이 거리를 번창시켰다.
청관에서 일부 뚝심 있는 화상들은 강제합병 후에도 버텼고, 일제는 북성포구 일대를 화방정으로 바꾸면서 청관 일대 지명을 조금은 얕잡아보는 지나정(支那町. 시나마치)으로 바꿔버렸다.
부산역 맞은편 화상 거리도 지나정으로 됐다.
결국 인천과 부산의 차이나타운은 1930년대 일본의 압제를 이기지 못해 쇠퇴했다.
인천 지나정은 우리 정부에 의해 선린동(善隣洞)이라는 우호적인 지명으로 바뀌었으나 북성동에 합쳐졌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끈질지게 살아남는다는 차이나타운은 일제 강압에도 살아 있었는데 광복 후에 꺾여버렸다.
1960년대 이후 화교의 재산권을 제한하는 정책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국 땅이 바로 건너에 있는데도 인천에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나 일본 요코하마처럼 번창하지 못하고 빛을 잃었다.
지금의 북성동과 항동 경계에 있던 제물포의 지명 유래는 다음 편에서 살피기로 한다.
2013년 08월 1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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