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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조우성(65회)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2/인천, 고려史 중심이 되다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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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 8. 2)
인천, 고려史 중심이 되다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2
2013년 08월 02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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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고구려, 신라, 백제의 변방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역사의 주역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해 오지 못했다.
인천이 비로소 한국사의 한 축으로 떠오른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부평 이씨의 시조인 이희목이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으로 된 이래, 11대 문종부터 7대에 걸쳐 왕후나 비(妃) 등을 배출해 '7대 어향'이라 했다.
몽골의 침입을 받자 '강도(江都·현 강화)'는 고려의 수도로 됐고, 부처의 힘으로 적을 물리치고자 팔만대장경을 만들었으며, 민간에서는 녹청자를 구웠다.
문호 이규보는 계양도호부 부사로 부임해 훌륭한 글을 남겼다.
인천은 역사·문화적으로 기억할 만한 고려의 유산을 많이 지니고 있다.
1 고유의 도자 양식인 '녹청자'
녹청자는 고려가 인천 지역에 남겨준 독특한 유형문화재이다.
일본이 자신들의 고유한 도자 양식이라고 내세웠으나 인천시 경서동에서 도요지가 발굴된 것이다.
1966년 우리나라 박물학계의 거목인 이경성·정양모 선생 등에 의해서였다. 당시의 경서동 원경.
2 경서동 녹청자 도요지의 가마
녹청자 도요지 가마이다.
가마는 20도 정도 기울기를 가진 단실요이다.
가마 아궁이는 동남쪽을 향했고, 굴뚝은 북서쪽에 나 있었다.
그릇을 굽기 위해 요의 기울기에 따라 높고 낮은 직삼각형의 '도지미'라는 받침 흙을 놓아 '도지미' 윗면이 수평을 이루도록 했다.
3 녹청자 접시
인천광역시 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구경 11㎝ 크기의 이 접시는 회색 태토(胎土)로써 제작했는데, 얇고 가벼우며 문양을 따로 베풀지 않았다.
질이 좋지 않은 황녹색 유약이 입혀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완형이 발굴되지 않고 있다.
4 고려의 궁궐(宮闕) 터
고려가 줄기차게 몽고에 항전하던 39년간 사용했던 궁궐의 터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이 결단을 내려 천도했다.
1234년 관아와 궁궐을 완공했다.
1270년 전란이 끝나 개성으로 환도한 후 이곳에는 행궁, 강화 유수부 등이 들어섰다.
1977년 보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 대장경을 만든 선원사의 옛 터
강화군 지산리 도감 마을에 위치한 선원사 옛 터이다.
폐사 7백여 년 만에 이곳이 대장경의 산실이었음이 알려진 것은 1976년이었다.
고려는 선원사에 대장도감을 설치해 판각을 시작했고, 이규보는 그 '기고문(祈告文)'을 남겼다.
팔만대장경은 후에 해인사로 옮겨졌다.
6 명찰 전등사
고려 충렬왕의 정화 왕비가 이 절에 옥으로 만든 등을 하사한 후 절 이름을 '전등사'라 했다고 전한다.
지금의 대웅전(보물 제178호)은 1621년에 지었다.
이 절에 있는 범종은 1097년에 제작된 것으로 중국 하남성 숭명사(崇明寺)에 있던 것이다.
보물 제393호로 지정돼 있다.
7 인주 이씨의 재실 원인재
원인재(源仁齋)는 인주 이씨의 중시조인 이허겸의 사당으로 원래 신기 마을에 있었다.
재실은 팔작지붕 형식의 건축물이고, '원인재'라고 쓴 현판 등이 남아 있다.
인주 이씨를 왕후나 비, 어머니로 둔 국왕이 일곱이나 돼 인주를 '경원군'이라 높여 불렀고, '7대 어향'이라 했다.
8 인천에서 살고, 잠든 이규보
고려 때 문호 이규보(李奎報)는 1219년 계양도호부 부사로 있었다.
이 때 시 43편 등 53편의 주옥같은 글을 썼고, 차시(茶詩)도 유명하다.
'동국이상국집'에서는 부평에 대한 인상을 피력하기도 했다.
죽어서도 인천과 인연을 이어 묘소를 강화군 직길리에 두고 있다.
/조우성(주필)·사진제공=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인천광역시립박물관, 강화군,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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