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 지명考-1/중앙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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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 7.26)
이원규 소설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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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인천에서 향토사학자인 이훈익 선생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인천고와 동국대 국문과를 나왔으며 동국대 교수로 강단에 섰다.
1984년 작가로 등단한 후 장편 '황해' '침묵의 섬' 등 40여 편의 인천 배경 분단문제 소설을 발표해 인천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금년 봄에는 '조봉암평전'을 스물여섯 번째 책으로 한길사에서 출간했다.
'인천지명고' 연재에서는 1993년 선친 이훈익 선생이 인천향토사 연구로 출간한 '인천지명고'의 내용을 보완·확장하면서 인천의 거리와 산야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가다운 필치로 써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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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1
개항장 중심이었던 중앙동
인천 중구 중앙동은 개항 이전 인천부(仁川府) 다소면(多所面) 선창리(船倉里)의 일부였다.
인천부는 조선왕조 시대 인천의 행정단위 명칭이었으며, 행정 중심은 부내면(府內面) 읍내리(지금의 남구 관교동)에 있었다.
산하에 부내면, 다소면, 남촌면, 신현면, 원우이면, 주안면, 조동면, 전반면, 황등천면, 이포면 등을 포괄하고 있었으며 부사(府使)가 통치했다.
다소면은 오늘날 용현동과 숭의동 등 남구 지역과 중구·동구 전 지역을 망라했는데, 필자 선친의 <인천지명고>(1993) 는 '다소(多所)'는 우물이 많다는 뜻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선창리에 속했던 곳은 현재의 관동, 인현동, 답동, 경동, 내동, 용동, 신포동 등이다.
웬만한 인천의 동네에는 작은 자연마을의 우리말 지명이 남아 전하는데, 중앙동에는 전래 우리말 지명이 없다.
한미한 어촌의 일부였고, 짐작하건대 민가 몇 채가 서있는 잡초 우거진 구릉이었을 것이다.
개항과 더불어 인천감리서가 설치되고 인천의 행정 중심이 원인천 읍내에서 항구 쪽으로 이동했다.
부내면 명칭을 그리 가져갔고 중앙동은 거기 속했다.
인천은 수동적 개항을 한 1883년과 이듬해에 인천항 일본조계조약, 인천구화상지계장정, 제물포 각국조계장정 조약을 맺어 개항장 지역에서 외국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조치를 했는데, 중앙동 일대는 각국지계에 속했다.
물론 각국지계는 1910년 한일강제합병으로 해소됐고 중앙동 지역도 일본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일제는 1912년 개항장인 옛 선창리 지역 취락을 나누면서, 행정 중심인 이곳을 혼마치(本町)라는 일본식 지명으로 바꾸었다.
혼마치는 도쿄와 오사카 등 일본 여러 도시의 중심 거리에 붙인 이름이다.
경성(서울)의 혼마치는 일본인 거류지가 있던 진고개 부근, 지금의 충무로였다.
광복 직후인 1946년 1월 초 일본식 지명을 우리말 지명으로 되돌릴 때, 중앙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본동(本洞)'이라고 하지 않음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여러 도시에 본동이라는 지명이 많이 있다.
일부는 혼마치를 곧바로 우리말식으로 고친 것이고, 신설 동명을 만들면서 본동이라고 붙여버린 것들이다.
중앙동은 개항장 역할을 했고 일제 강점기 행정 상업 중심지여서 은행과 근대식 상점들이 밀집돼 있었다.
개항 직후 수도 한성(漢城)을 능가하는 근대식 건물과 문물로 유명했다.
경인철도가 놓이면서 조금은 광휘를 잃어버렸으나 근대문화 수용의 젖줄 노릇을 하는 기능은 유지됐다.
훌륭한 문화유산이 될 곳인데 세창양행 등 고풍스런 건물들이 헐려버리고 골목길도 바뀌었다.
인천개항근대건축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2가 24번지의 일본 18은행, 19번지의 58은행, 1가 9번지의 일본제일은행, 그리고 자유공원 계단 아래 개항시기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이었던 제물포구락부 건물이 살아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자유공원은 중앙동, 해안동, 북성동에 걸쳐 있다.
미·영·불·독 등 서구 열강이 공동으로 만든 조계가 각국지계였고, 이 지계 안에 한국 최초의 서양식공원을 만들고 만국공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와 함께 만들었던 동공원(지금의 인천여상 자리)에 대비해 서공원이라 했고, 6·25 동란 중 상륙작전을 이끈 맥아더의 동상을 1957년에 세우면서 명칭이 자유공원으로 바뀌었다.
중앙동은 1970년대 인천시가 팽창하고 시청 등 관공서와 금융기관들이 남동구와 연수구 등 신도심으로 나가면서 갑자기 빛을 잃었다.
인천시는 3년 전 중앙동을 비롯한 중구 일대를 개항장 문화지구로 지정했다.
중국 상하이(上海)의 신톈디(新天地) 거리처럼 슬기롭게 복원하고, 일본 교토(京都)의 고조자카(五條坂) 일대 골목길, 포르투갈의 포르투 골목, 모로코의 페스 골목처럼 가꿔간다면 저 외화(外華)에 빛나는 송도신도시보다 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떠오를 것이다.
2013년 07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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