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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20/창영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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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2.13)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20
우각리 → 창영동 된 '쇠뿔고개 마을'
광복 후 지명 회복 못하고 일본식 굳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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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제 4회 시민의 날 항도제의 배다리 거리행렬. 철교 위로 열차가 지나가고 있다./사진제공=네이버 블로그(kkkk8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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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 창영동(昌永洞)과 금곡동(金谷洞)은 조선 후기 인천부 다소면 송림리의 일부였다.
1871년 출간한 『인천부읍지』(2004년 인천역사자료관이 복간)에 송림리만 실려 있다.
필자 선친은 『인천지명고』(1993)에 '1903년 송림리에서 우각리(牛角里)와 송현리(松峴里)가 분리되고, 1907년 우각리에서 다시 율목동과 금곡리가 분동됐다'고 기술하셨다.
1911년 강제합병 직후 출간한 『조선지지자료』에도 율목동, 금곡동, 우각동이 새로 만들어진 부내면의 동네로 올라 있다.
행정동으로 송림리에 들어 있던 조선 후기에도 우각동은 쇠뿔고개라는 우리말 전래 지명과 함께 뚜렷한 지명으로 존재했다.
『백범일지』를 보면, '황제의 특사가 내려지지 않았다면 나는 우각리 언덕에서 처형을 당했을 것'이라고 한 기록이 있다.
1897년 그때 우각리 언덕 위에는 으스스한 사형집행장이 있었던 것이다.
쇠뿔고개는 헌책방 삼거리에서 인천양조장 자리와 창영초등학교, 영화여자정보고 앞을 지나 오르는 언덕길이 영낙 없이 소의 뿔처럼 휘어져 있어서 생긴 지명이다.
그 고개를 한자 우각현으로, 그 언저리에 있던 작은 취락을 우각동으로 불렀던 것이다.
금곡은 쇠가 생산된 골짜기에 붙였던 지명이다.
기록은 없지만 옛날 언젠가 이곳에서 철광석이 나온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쇠뿔고개라는 지명이 소의 뿔이 아니라 금곡의 어원인 쇠의 생산과 연관된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무리한 의견이다.
개항 직후 일본인들이 몰려와 난리법석을 떤 개항장 지역과 달리 우각동과 금곡동은 조선인들이 살던 거리였다.
그래서 오랫동안 우각동과 금곡동이라는 전래 지명이 손색 없이 유지됐다.
1932년 조선경찰협회가 『행정구역명칭일람』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는데, 거기에도 우각리, 금곡리로 실려 있다.
그러나 1937년 일제가 대대적으로 동네 지명을 일본식으로 바꿀 때 금곡리는 금곡정으로 살아남았지만 우각리는 창영정(昌永町)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일본어 발음은 쇼에이마치다.
일본의 왕이나 장군, 군함 이름은 아니다.
일본의 몇 도시에 그런 지명이 있어서 따라 간 것으로 보인다.
1936년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창영심상소학교로 교명을 바꿨는데, 개명작업을 같이한 것인지 앞서 바꾼 학교 이름이 그래서 다음해 동네 이름이 뒤따라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광복 후인 1946년 1월 1일 일본식 지명을 버리고 우리말 지명을 회복할 때 창영정은 창영동으로, 금곡정은 금곡동으로 바뀌었다.
창영동은 우각리라는 현저하고 정겨운 전래지명이 있었는데, 왜 회복을 못했는지 궁금하다.
송도신도시 지명을 붙일 때, 송도(松島)의 명칭연원이 일본 군함 마스시마에 있으니 제발 다른 걸로 해달라고 향토사가들이 매달리는데도 막무가내로 송도동으로 간 것보다는 약하지만 행정당국이 잘못한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인천 첫 공교육의 시원인 창영초등학교도 그때 함께 우각국민학교로 바꿔야 했다.
창영동과 금곡동은 인접한 숭의3동을 끌어안고 통합과 분리를 거듭하다가 1985년 금창동으로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날 송현동 수문통 쪽으로부터 갯벌이 이어져 배가 드나들었던 배다리부터 시작해 삼거리를 지나 쇠뿔고개를 올라가는 길, 옛날에는 배다리 위쪽 인천고교와, 헌책방들, 창영초등학교, 영화여상, 기독교사회복지관 등이 있어서 문화의 중심거리 역할을 한 곳이다.
일본인들이 살지 않은 곳이어서 인천인들의 삶의 맥락이 오롯이 살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중학교 1~2학년 때 송림동에서부터 이 길을 30분쯤 걸어 학교에 갔다.
줄줄이 늘어선 헌책방들, 그리고 술찌꺼기 냄새 풀풀 나는 인천양조장 앞을 지나서 걸었다.
헌책방에서는 아마 달이 지난 『학원』을 샀던 것 같다.
금곡동을 스쳐가면 꿀꿀이죽 냄새가 났고, 배다리에 도착할 즈음에는 납작한 쇠막대기로 양철판을 두드려 양동이나 연탄난로를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천고와 상인천중 정문 앞에는 대나무 장대들이 높이 선, 그리고 양철을 두드리는 공작소들이 즐비했다.
탕탕 탕탕 박자를 맞춰 두드리는 소리는 교실까지 들려왔다.
신기하게도 지금 창영동과 금곡동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양관과 일본집들이 남아 있는 개항장 거리만 중요한 게 아니라 인천인들의 삶의 흔적이 그대로 살아 있어서 배다리의 보존도 중요하다.
산업도로가 관통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천시가 이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 나가기 바란다.
2013년 12월 1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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