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15/선화동(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3.11. 8)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15
선화동 술·웃음 팔던 유곽 전국 입소문
소설 배경 되기도
선화동에 있던 부도루(敷島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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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선화동(仙花洞)은 지난 주 살펴 본 신흥동과 맥을 같이 한다.
개항 직후 갯벌을 매립해 만든 땅이고, 여러 번 신흥등과 합했다 떼었다 한 적이 있는데다, 일제 강점기 전국 3대 공창(公娼)지역으로 함께 널리 알려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별로 좋지 않은 유래가 있는 동네를 신흥동과 묶어 설명하지 않고 따로 잡아 지명의 뿌리를 살피는 것은 저속한 흥미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이 복잡하고 그 속에 인천 근대사의 아픔이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선화동은 신흥동처럼 개항 이전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였다.
1903년 8월 개항장 일대에 부내면을 신설하고 선창리를 분할할 때 오늘의 신흥동 지역과 묶여 화개동(花開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1907년 이곳을 오늘의 신흥동 지역인 화개동, 와정동(瓦亭洞과 선화동(仙花洞)으로 분동했다.
한일합병 후인 1912년 화개동과 와정동이 합해져 화정(花町)이라는 일본식 정명으로 바뀌었을 때 그냥 선화동 지명이 유지됐다.
그러나 1914년에 일제가 전국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부도정(敷島町)이라는 새로운 지명을 갖게 됐다. 일본어 발음은 니키시마초다.
니키시마는 러일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일본 해군의 전함 이름이다. <일본근대함선사전>을 보면 1896년 영국 런던 템즈 조선소에서 건조했으며 길이 133m, 폭 23m, 배수톤수 1만4850t의 제원에, 승무원 836명이 타고 47밀리 포 12문, 30밀리 포 2문, 15밀리와 7.6밀리 포 34문, 45㎝ 어뢰발사관 5문을 가진 무시무시한 전함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 때 랴오뚱(遼東)반도의 뤼순(旅順)항 공격과 포위에 참전하고 황해해전에도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2월8일의 제물포해전에도 참전했는지는 불명확하다.
일제강점기 초반 일본인들이 끌어다 붙인 정명이 대개 이런 큰 승리를 거둔 군함 이름인 경우가 많은데, 부도정(시키시마초)은 조금 다르다.
거리명보다 건물 이름, 유곽 이름이 앞섰다.
1883년 개항 이후 부산, 원산, 인천에 먹고 살 판이 났다고 일본인이 대거 밀려 왔다.
당연히 대부분 남자였고 관리들 외에는 점잖지 못한 토목건축 노동자와 장사꾼이 대부분이었다.
웃음과 술을 파는 게이샤(妓生)와 몸을 파는 죠로(女郞) 등이 뒤를 따라 들어왔다.
1902년 먼저 부산 아미동(蛾眉洞)에 유곽이 생기고 사업이 잘 되자 그해 말 인천에도 생겼다.
음식과 술을 팔고 성매매도 할 수 있는 집들이 여럿 생겼다. 부도루(敷島樓), 환산루(丸山樓) 등이 지금의 선화동에 들어섰다.
인천시립박물관 배성수 선생의 글에 의하면 1902년 17개 일본인 요릿집 주인들이 800엔씩 공동출자를 해서 지금 신흥시장 입구에 부도루를 열었다고 한다.
일본인 관리들은 1914년 일본식 정명을 지을 때 이 마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부도루에서 착안해 니키시마초(부도정)이라 지었던 것이다.
니키시마함이 유명한 전함이니 이중으로 안성맞춤이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곳의 유곽은 하도 유명해서 일본강점기 내내 인천의 명소로 소문났다.
1920년대와 30년대 신문 잡지의 인천 르포르타주들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부도정 유곽을 다루었고 문학작품의 배경으로도 나왔다.
1924년 4월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지난달 부도정 유곽에 난봉꾼들이 뿌린 돈이 조선인 900여명 3000여 원이고, 일본인 1000여 명 1만6000원이라'고 나와 있다.
당시 중품미 한 말 값이 4원50전이었다.
1946년 일본식 정명을 우리식으로 바꿀 때 부도정은 선화동으로 회복됐다.
1907년 처음 지명을 잡을 때 이미 유곽이 형성돼 있어서 유녀들이 있다는 뜻으로 선화동으로 정했었는데, 지명위원들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여자 화랑도를 선화라 했으며, 신라 향가 <서동요>에 선화공주도 있었으니까 잊혀졌던 아름다운 우리 지명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다.
선화동 유곽은 8·15 광복 후에도 이어졌으나 1961년 군사정부 조치에 의해 폐쇄됐다.
그 맥을 숭의동 옐로하우스가 이어받았고 그곳도 2010년 폐쇄됐다.
선화동은 1983년 신흥동 2가를 합해 법정동 신선동(新仙洞)으로 바뀌었다. 행정동으로는 신흥동에 속한다.
혹시 뒷날 다시 분리한다 하더라도 선화동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2013년 11월 0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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