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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14/신흥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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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1. 1)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14
일본 사찰과 유곽 있던 신흥동
국내 최초 사이다 공장 유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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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사이다 생산은 인천에서 시작됐다. 1910년대 경인선에 붙은'별표사이다'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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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신흥동(新興洞)은 개항 이전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였다.
대부분 갈대 우거진 해변, 불모의 벌판이었다.
1903년 8월 개항장 일대에 부내면을 신설하고 선창리를 분할할 때 화개동(花開洞)으로 불렀다.
지명을 갖게 된 것은 일본인들이 와서 살게 된 때문이었다.
1907년 이곳을 화개동, 와정동(瓦亭洞), 선화동(仙花洞)으로 나눴다.
한일합병 후인 1912년 일제는 다시 화개동과 와정동을 합하고, 터진개(탁포. 지금의 신포동) 일부를 끌어다 붙여 화정(花町)이라는 일본식 정명으로 바꾸었다.
1914년 일제가 전국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화정 1,2,3정목으로 나눴다.
이는 8·15 광복 때까지 이어졌다. 지금 신흥동 1,2,3가는 이를 따르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자료를 보면 인천 옛 다운타운 저지대가 대개 그렇듯이, 오늘날 신흥동도 상당부분 매립된 땅임을 알 수 있다.
신흥동의 중심은 1914년 1차로 매립됐다.
1920년대에는 화정 3정목 해안 매립을 위해 고심하는 자료가 많고, 1937년 마침내 9번지와 13번지 9000평을 매립했다는 자료가 있다.
오늘날 신흥동 3가 9번지와 13번지는 신광사거리, 신광초등학교, 신광교회 일대이다.
8·15 광복 후인 1946년 1월1일 화정은 신흥동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됐다.
안골(내동)과 논골(답동) 식으로 오래된 자연취락 지명이 있었다면 그걸 지명으로 썼을 것이다.
그러나 화정이 유곽을 나타내는 지명이니 점잖은 지명위원들께서 고심했을 것이고, 마침내 새롭게 부흥하는 마을이라는 근사한 지명을 지었다.
그런 신흥동은 지금 법정동이자 신흥동과 신선동을 합한 행정동이다.
일제 강점기 지명인 화정의 일본식 발음은 하나마치다.
일본어에서 일반적으로 화가(花街·카가이)와 함께 유곽을 나타내는 거리 이름이다.
1883년에 개항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일본인들은 먹고 살 판이 났다고 물밀 듯이 밀려와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의 중앙동·북성동·항동·관동 일대에 자기네 거류지역을 만들고는 점차 확대해 갔다.
정신적인 구심점인 신사(神社)를 지었고 그것도 모자라 유곽까지 만들었다.
지금의 인천여상 자리에 신사를 세우고, 신흥동 신흥초등학교 옆 로얄맨션 자리에는 동본원사(東本願寺) 인천별원(別院)을 세웠다.
당시의 인천 동본원사와 서본원사에 대한 오해가 있다.
본원사 법당으로 만국공원에 섰던 것은 그쪽이 서쪽이므로 서본원사라 했고, 하나마치에 선 것은 만국공원의 동쪽이므로 동본원사라고 불렀다고 믿는 이들이 있는데 그게 아니다.
동봉원사와 서봉원사는 일본 불교 본원사(本願寺, 혼간지)와 같은 뿌리에 있다가 17세기에 이미 분파됐다.
동본원사는 초기에는 일본인 거류민 자제 교육, 빈민구제, 행려병자 구호를 내세웠으나 그 후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해 나섰다.
한국 불교도 개혁의 바람을 맞아 휘청거렸다.
일본인들이 유정에 많은 주택을 지었는데, 지금도 여러 채가 본모습을 유지한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주택가 주변에, 그것도 엄숙한 신앙의 기도원인 신사와 사원 주변에 여자들이 몸을 파는 공창을 세우다니.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인간에게는 정신적인 귀의처도 필요하고 성적 욕망을 풀어낼 곳도 필요하다.'
당시 일본인들의 세계관이 그러했다.
그때 인천의 일본인 중에는 아무래도 여자보다 남자가 많았고, 남자들이 성적 욕망을 풀어낼 곳이 필요했다.
일본인들은 멀쩡한 도시에 공창(公娼)을 만들어 놓은 나라이니 신성한 신앙의 사찰 주변, 주택가 주변에 그런 걸 두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신흥동에는 그밖에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었고, 리키다케(力武) 정미소가 있었다.
임신한 선미(選米) 여공이 낙태를 할 정도로 감독에게 매를 맞아 1931년 동맹파업을 한 곳이다.
인천재판소도 2정목 3번지에 있다가 내동으로 이사를 갔다.
'인천 앞 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한 코미디언의 노래로 알려진 최초의 탄산수제조공장이 1905년 해광사 아래 세워졌었다.
신흥동은 사통팔달한 답동사거리가 인접해 있어 인천의 중심가 노릇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롭게 부흥하는 동네가 아니다.
정겨운 이름 '긴담모퉁이'도 그대로 남아 있고 크게 형질이 바뀌지 않았다.
영욕에 찬 인천근대사의 전설들이 거리와 몇 채 일본 집 속에 남아 있다.
2013년 11월 0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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