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13/전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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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13
돈 찍어내고 오포(午砲) 쏘았던 전동
최초 기상대 헐린 것 안타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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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헐린 최초 기상관측소'인천기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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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전동(錢洞)은 개항 이전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였다.
1903년 8월 개항장 일대에 부내면을 신설하고 선창리를 분할할 때 아직 이름이 없었다.
1907년 5월 동명을 고칠 때 오늘날의 전동 일대는 전동(典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옛 인천여고 자리에 있던 전환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환국은 오늘의 조폐공사다.
조선조 말기인 1880년대 근대 화폐를 주조·발행하기 위해 설치한 탁지부 산하 기구다.
처음에는 한성에 있다가 1892년 인천으로 옮겨 왔는데, 옛 인천여고 자리다.
1900년 다시 용산으로 옮겨 갔고 1904년 폐지됐다.
돈을 찍는 조폐창을 왜 왕도인 한성에 두지 않고 인천으로 옮겨 왔고 8년 만에 다시 옮겨 갔을까.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의 농간이었다.
조폐창을 한성에 두는 것보다 자기들 영향력이 큰 인천에 두어 이 나라의 화폐 유통과 경제를 장악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경인철도가 개통되자 불편이 사라져 옮겨갔다.
한일합병 후인 1912년 일제가 이 나라 지명을 자기 식으로 마구 바꿀 때 전동은 산근정(山根町)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일본어 발음은 '야마네마치'. 그 연원을 들여다 보면 참으로 고약하다.
러일전쟁 때 병참사령관이던 야마네 다케스케(山根武亮. 1853~1928) 장군 이름에서 땄던 것이다.
러일전쟁과 일본군의 병참을 생각하면 콩나물이 떠오른다.
일본군이 랴오뚱(遼東) 반도의 뤼순(旅順)항을 포위했을 때 러시아군은 혹독한 추위 속에 싱싱한 야채를 공급 받지 못해 비타민 결핍증으로 수많은 병사가 각기병에 걸려 전력 약화에 시달리고 있었다.
창고에 대두(大豆) 포대가 가득 쌓여 있었으나 그것으로 수프밖에 만들어 먹지 못했다.
그러나 야마네 장군의 병참부는 일본식 된장 미소와 콩나물을 만들어 대처했다.
산근정(야마네마치) 지명은 일제 패망 때까지 이어졌고, 광복 후인 1946년 1월1일 전동(錢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우리말 옛 지명을 회복하려 한 것인데, 전환국의 '전(典)' 대신 돈 '전(錢)'자를 갖다 붙였다.
옛날 돈을 찍어 내던 동네였고 전동이라고 불렀다는 사실 하나만 생각하고 지명위원들이 냅다 돈 '전'자를 붙인 것이다.
지구상 어디에 '돈마을'이라는 지명이 또 있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오늘날 전동은 인현동이라는 행정동에, 동인천동이라는 법정동에 들어 있으니 이는 지명에 서린 유서를 팽개쳐 버린 결과이다.
인현동은 8·15 광복 후에, 동인천동은 더 한참 후에 명명된 이름이니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행정동과 법정동 모두 대표성이 강한 전동으로 했어야 한다.
이 연재에서 여러 번 지적했지만 지명 짓기는 쉬운 것 같아도 어렵다.
전동에는 웃터골이라는 자연취락이 있었다.
지금 제물포고 뒷산이 응봉산(鷹峰山)이다.
오포산(午砲山)이라고도 했는데, 정오에 포를 쏘아 시간을 알리던 것에서 유래한다.
응봉산 기슭이 웃터골이었다.
1924년 웃터골에 공설운동장이 개설됐는데, 초창기 인천 야구가 여기서 성장했다.
1934년 그 자리에 인천중학교 건물이 신축되고 운동장은 도원동으로 옮겨 갔다.
필자 선친은 <인천지명고>에서 웃터골에 화장장이 있었다고 쓰셨는데, 1차 자료를 남기지 않으셨다.
지금의 동인천역에서 제물포고로 올라가는 내동과 전동 경계선상 언덕길 왼쪽이 중국인 묘지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화장장이 있었다면 홍예문 아래 소방파출소 언저리였으리라 짐작된다.
전동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상관측소였던 인천기상대가 있다.
그런데 오래된 본관 건물이 지난해 헐렸다. 엊그제 신축건물이 준공된 모양인데, 신문기사를 보면 '30년 가까이 된 옛 건물을 헐고'라는 내용이 있다.
'6·25 동란 때 일부가 붕괴돼 다시 지었다'는 기사도 있다.
기상대에서 어떤 보도자료를 받아 썼는지 몰라도 그게 아니다.
아무리 손바닥으로 가려도 인천 토박이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6·25 동란 때 폭격도 맞지 않았고, 비록 1960년대와 1980년대에 증·개축했다고는 하나 필자가 소년시절부터 보아온 유서 깊은 돔 형상은 작년까지 모습이 살아 있었다.
몇 개 남지 않은 인천의 소중한 근대유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작년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헐려버렸다.
중구청이나 인천시, 그리고 문화재 심의기구도 있을 텐데 무엇을 했나.
창고 건물을 살려서 역사관으로 쓴다 하지만 유서 깊은 본관 모습이 사라져 속상하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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