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조우성(65회)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11/개항 후 서양식 건물 등장 … 장관(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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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0.11)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11
개항 후 서양식 건물 등장 … 장관 연출
전쟁·화재·철거로 사라진 근대유산
인천측후소 본관 등 훼손 '문화파괴'
보존 필요하나 섣부른 복원은 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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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직후 가장 두드러지게 달라진 인천 풍경의 하나는 서양식 건물의 등장이다.
조선인의 마을이래야 해변의 초가가 전부였고, 전통 한옥으로는 오늘의 중구 내동에 자리를 잡은 인천감리서(仁川監理署·현 인천시청 격)가 유일했다.
1888년 인천 제물포를 찾은 프랑스의 세계적 여행가 '샤를르 바라'는 제물포 인상을 이렇게 피력했다.
"다음날 아침, 시끄러운 기계 소리에 잠을 깬 나는 부랴부랴 갑판으로 올라갔고, 제물포만의 경탄할 만한 광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평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샤를르 바라가 극찬한 '제물포만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오늘 그의 식견과 명성에 기대 믿고 싶지만, 개항 후 그 같은 원형적인 아름다운 경관은 축항 개발이란 미명 하에 개항 초기에 이미 사라지고 말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조선의 이 커다란 마을은 길 하나와 몇 개의 좁은 골목들로 얼기설기 짜여져 있다"며 "특히 그 곳을 관할하는 널찍한 관아는 끝이 약간 올라간 큰 지붕을 이고 있었는데, 중국과는 눈에 띄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전한다.
사진과 함께 감리서를 소개한 것인데, 당시 제물포의 전통 한옥은 인천감리서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청국·일본 조계지와 각국 조계지에는 각양각색의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최초의 서양식 건물은 독일 함부르크 소재 무역상사인 마이어 상사(한국명 세창양행)의 인천지점 직원 사택(社宅)이었다.
현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 일대에 지어진 이 건물은 카를 발터 소유로 1890년에 신축됐다.
주 건물은 붉은 색 기와지붕, 벽돌조 지상 2층이었으나 인천부가 후에 매수해 2층 타워를 헐었다.
10개의 기둥과 9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회랑이 유명했다.
각국공원에 있던 '존스턴 별장'도 이름을 날렸다.
그 무렵 예를 찾기 어려운 독일식 건물로 우리나라 최초로 '스팀' 난방 장치를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 앞바다 어디에서나 보여 세칭 '인천의 랜드마크'라 불렸다.
6·25전쟁 직후 모씨가 시에서 불하를 받아 철거해 버린 비운의 건물이다.
오례당(吳禮堂)도 잊을 수 없는 건축문화 유산이었다.
개항기에 해관 역관으로 활약했던 중국인 오례당이 1909년에 지은 양관으로 이름에 집 당(堂) 자가 들어 있어 그대로 집 이름이 됐다.
검정색 오석을 다듬은 슬레이트 지붕과 적벽돌로 쌓아올린 벽이 일품이었다.
이밖에도 답동성당, 내리교회, 제일은행, 제물포구락부, 인천우체국, 인천전기주식회사, 인천공회당, 58은행, 18은행, 공화춘, 영국영사관, 러시아영사관,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 인천곡물협회, 알렌 별장, 송림초등학교, 인천고등학교, 영미연초주식회사, 중화루, 중구청 등 여러 양관이 있었으나 자진 철거·실화 등으로 현재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유산은 손으로 헤아릴 정도다.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도입지로서 그 역사적 역할을 해 왔지만, 이 같은 문화 파괴현상은 부끄러운 자화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설계도 한 장 없는 마당에 사진엽서 몇 장을 토대로 근대건축물을 '복원'하자고 하는 것 또한 역사 왜곡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천재일우로 남게 된 답동성당, 제일은행, 58은행, 18은행, 인천우체국, 제물포구락부, 중구청, 공화춘 등이 더 이상 원형 변경이나 훼손, 철거, 실화 등이 없도록 각별한 관리를 요하는 시점이다.
청사가 비좁다는 이유로 최근 시민의 '추억 공간'이었던 '인천측후소'를 헐어버린 것과 같은 '문화파괴' 행위가 되풀이돼서는 안되겠다.
1 세창양행 사택
독일계 무역상사인 세창양행의 직원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2층 타워와 열주(列柱)와 아치가 독특한 자태를 자아내고 있었다.
국내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기록되고 있었으나 6ㆍ25전쟁 때 포화로 소실됐다.
2 존스턴 별장
중국 상해에서 사업을 하던 영국인 존스턴이 세운 독일식 건물이다.
한눈에 빼어난 건축미를 알아볼 수 있는 명소였다.
'인천의 랜드마크'로 불리며 사랑을 받았지만, 6·25전쟁 직후 일부 훼손을 핑계로 철거를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3 오례당
건물주와 집 이름이 '오례당(吳禮堂)'으로 같다.
오례당은 포르투갈 출신 부인의 청으로 지었다고 전한다.
돔 형식과 삼각형의 지붕, 바다를 향한 창문 등이 아름다운 서양식 건물이다.
이곳에 주둔했던 육군방첩대의 실화로 소실됐다.
4 알렌 별장
1905년까지 21년간 한국 외교가에서 크게 활약했던 알렌이 우각리에 세운 별장이다.
알렌과 친분이 두터웠던 고종황제가 부근에 '이궁'을 세우려 했다는 기록도 있다.
1956년 인천전도관 측이 별장을 헐고 그 자리에 교회를 지었다.
5 인천측후소
국내 최초의 기상관측소이자 1950년대 초반까지 중앙관상대 역할을 했던 인천측후소 전경이다.
원형의 흰색 본관과 오른쪽 돔 형식의 지붕을 인 천문대가 보인다.
올해 인천기상대가 마지막 남은 본관 건물을 철거해 버렸다.
6 송림초등학교 본관
동구 송림동에 자리를 잡고 있던 송림초등학교 본관이다.
일자형 건물로 중앙에 주출입구를 두었다.
주출입구 상부의 박공지붕은 이 학교 출신들에게 '수수께끼의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1965년 전기 누전으로 소실됐다.
1930년대 '인상(仁商)' 시절의 단체 기념사진이다.
7 인천공회당
정면 중앙에 설치된 출입구 위에 '인천공회당'이라는 석조 간판을 달았다.
1923년에 준공해 강연회, 음악회, 동화발표회, 영화 등을 상영했다.
6·25전쟁 때 소실돼 1957년 '인천시민관'을 그 자리에 세웠다.
현재 인성여고 교사가 들어서 있다.
/조우성(주필)·사진제공=인천시역사자료관, 김재은 선생, 손장원 교수, 필자.
2013년 10월 1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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