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조우성(65회)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10/"인천에 가면 일자리가 있어"(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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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0. 4)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10
"인천에 가면 일자리가 있어"
개항 직후'인천 러시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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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이 되자 외국인들이 증기선을 타고 몰려들었다.
조선의 여느 배와는 달리 시꺼먼 연기를 내뿜으며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커다란 배들을 이른바 이양선(異樣船)이라고 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그 배들은 외항에 정박했다.
아직 부두 시설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외항에서 거룻배로 타고 뭍으로 와야 했다.
1885년 4월 5일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도 부인 엘라 여사와 함께 부슬비가 내리는 부활절 아침 질척이는 제물포 해변 가를 걸어야 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일본인이 일본식 목조 2층 건물에 차린 '대불호텔'. 호텔 이름과 '신선한 고기와 빵이 있다'는 영어 간판 말고는 호텔이라고 보기 어려웠지만, 종업원이 영어를 곧잘 했고, 양식도 맛있었다고 훗날 아펜젤러 목사는 회고했다.
경인선 기차가 놓이기 전까지 외국인들은 몇몇 호텔에 머물면서 전보를 치거나 그 뒤에 설치된 전화로 업무를 보았다.
증기선의 바닷길 안내를 맡았던 등대, 외국인들이 묵었던 호텔, 우편, 전보, 전화, 기차 등은 모두 깜짝 놀랄 신문물이었다.
백성의 직업이 거의 다 농업이었을 그 무렵, 개항장 인천에는 그에 종사할 사람이 필요했다.
시쳇말로 하면 신문물에 의한 '일자리 창출'이 눈부셨던 것이다.
조선 팔도에서 소문에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인천에 가면 일자리가 있다!"
그 같은 '인천 러시 현상'은 마치 미국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를 연상시키는 수준이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인구의 이주 현상과 다변화 현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인천의 지역적 특성이자 일찍이 인천이 '망국적 지역색'을 졸업하는 계기가 됐다.
개항 초기부터 사람을 쓰는 데 '어느 곳 출신인가'를 따지기보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일에 열정이 있는가?'를 고려했던 것이다.
호텔 종업원은 외국어 실력을, 등대지기는 기계공학적 지식 여부를, 우편배달부는 한자 해독 능력 소유자여야 했다.
이처럼 사람을 출신지로 평가하지 않고, 능력과 열정으로 평가한 진일보한 인간관은 지역사회 형성의 기반으로 됐고, 서서히 인천을 해불양수적(海不讓水的)인 다양성·포용성·역동성을 지닌 도시로 성장시켜 왔던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 정한 바 없는 '출신지'에 얽매여 편을 가르고, 시기와 질시의 눈으로 이웃을 무시했다면, 전국 각지에서 인천으로 살러 오는 이들의 이주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그렇듯 개항과 그에 따른 신문물의 도입은 오늘의 인천을 있게 한 또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1 개항기의 우체부
1895년 우편 사무를 재개할 당시, 우체부의 모습이다.
오전 9시 인천과 서울에서 출발한 우체부는 오류동에서 만난 우편낭을 교환했다.
비록 연출에 의한 것이지만 갈모, 두루마기, 긴 담뱃대가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우체부는 한자 해독 능력이 있어야 채용됐다.
2 국내 최초의 대불호텔
1884년 이미 영업을 하고 있던 대불호텔이다.
'호텔 다이부츠(大佛), 후랫쉬 브레드 엔 미트'라고 쓰인 영문 간판이 이색적이다.
최초의 호텔로 잘못 알려진 3층 벽돌조 건물은 1888년에 신축한 것이다.
종업원들은 일어와 영어를 구사했다.
3 독일계 무역상사 세창양행
인천 소재 세창양행은 개항기 최대의 무역상사로 서구의 물감, 바늘, 석유, 의약품 등을 팔았다.
'세창바늘'과 '금계랍'은 부녀자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다.
무역상사의 조선인 종업원은 후에 외국어 교사로도 활약했다.
4 제물포 시장거리의 지게꾼
부두가 본격적으로 건설된 후, 전국 각지의 노동자들이 제물포로 몰려들었다.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은 없어도 몸이 건장한 이들은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길거리 밥집 주변에 대여섯 명의 지게꾼들이 보인다.
5 팔미도 등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바닷길을 밝혔던 팔미도 등대이다.
개항 무렵의 팔미도 등대 사진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이 사진은 수년 전 작고한 가천문화재단 이형석 부장이 촬영한 것이다.
등대지기는 최소한 발전기의 운용원리를 알아야 했다.
6 경인선 철도원
경인선은 1899년 9월 18일 개통했다.
인천과 노량진 사이 32.2㎞를 달렸던 증기 기관차는 미국 브룩스사에서 만든 기관차였다.
당시 철도원은 최고의 신식 직업이었는데, 기차의 착발과 신호기의 운용 등 전문성을 지닌 직업인이었다.
사진 가운데 앞쪽에 철도원의 모습이 보인다.
/조우성(주필)·사진제공=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 하퍼즈 위클리, 이형석, 필자
2013년 10월 04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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