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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조우성(65회)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9/위세 등등했던 개항장 인천의 영사관들(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3. 9.27)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8
위세 등등했던 개항장 인천의 영사관들
자국 이익 확보 위해 치열한 싸움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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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장 인천에 처음으로 영사관을 설치한 나라는 일본이다.
1882년 10월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2층 목조 건물을 신축해 본격적인 영사 업무를 시작했다.
영사관 안에 우편국, 경찰서, 감옥 등 초법적인 부속 시설을 두었던 것만 보아도 그들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은 1884년 청국 조계가 설치되자 같은 해 10월 지금의 인천중산학교 자리에 영사관을 열었다.
이들 역시 영사관 안에 전보국과 순포청(일종의 경찰서) 등 부속 건물을 세웠다.
영사관은 변리청, 이사서, 이사부 등으로 불렸으나 '청관(淸館)'이라 칭하기도 했다.
영국은 1884년 3월 지금의 중구 북성동 파라다이스 호텔 자리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영사관 건물은 1887년 신축돼 광복 후까지 존재했었는데, 6·25전쟁 때 전소되는 불운을 맞았다.
최근 설계도가 영국에서 발견돼 화제를 낳기도 했다.
러시아는 1902년 10월 부영사관을 설치해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성누가병원을 임대해 사용하다가 1903년 지금의 인천역 옆에 벽돌로 된 2층 건물을 신축했다.
그들은 동청철도기선회사, 블라디보스톡목재회사 사무소 등을 영사관 안에 두어 주로 경제 이권 관련 업무에 치중했다.
이렇듯 개항기에 4개국은 인천에 영사관을 설치해 자국의 이익 확보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미국과 독일도 한때 영사관 설치를 계획할 만큼 인천은 서울 다음으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거점으로 부상했고, 그로 인해 국제화가 가속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사관 안에 주재국의 고유 권한인 우편권, 경찰권, 형사권을 넘보는 부속 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우리나라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서양식 건물은 전쟁, 개축, 철거 등으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오늘, 인천 지역에는 영사관이 한 곳도 설치돼 있지 않다.
하지만 인천국제공항 개항을 통한 교류의 활성화와 경제자유구역 내 GCF 유치, 각국 대학의 분교 설치 등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국제적 위상을 되찾아가고 있다.
1 한반도 정세를 풍자한 만화
프랑스 언론인 조르주 비고가 그린 풍자화이다.
조선이 물고기로 표현돼 있고, 일본, 중국, 러시아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러시아가 낚싯대를 준비해 두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인천에 영사관을 설치한 나라는 이들 3개국과 영국이었다.
2 일본 영사관
일본은 1884년 4월 지금의 인천개항박물관(옛 일본제1은행) 자리에 임시 청사를 마련하고 영사 업무를 시작했다.
그해 10월 지금의 중구청 자리로 이전했다.
사진의 목조 2층 건물은 영사관 자리에 '인천부청'이 들어선 모습이다.
3 청국 영사관
중구 선린동 언덕 위에 세워져 있던 청국 영사관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언제, 누가 세웠는지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건물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사진 몇 장이 전할 뿐이다.
영사관 내에는 전보국, 순포청 등 부속 건물이 있었다.
4 영국 영사관
영국영사관은 1884년 3월 개관했으나 협소해 1897년 청사를 본격적으로 신축했다.
신축 벽돌조 건물은 전면에 베란다가 있는 식민지 양식으로 내부에는 영사실, 침실, 객실, 식당, 창고 등이 있었다.
1946년 한때 시립예술관으로 쓰이기도 했다.
6·25전쟁 때 전소됐다.
5 러시아 영사관
중구 선린동 56번지에 세워졌다.
러시아인 기사 사바찐이 설계해 1903년 완공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러ㆍ일전쟁 후 일본군이 사용하다가 1910년대에는 체신국 인천해사출장소 등으로 쓰였다.
제정 러시아 르네상스 풍의 건물이다.
1970년에 상가 신축으로 철거됐다.
6 청국 조계지 풍경
청국은 인천 영사관을 설치하고 청관(지금의 차이나타운) 안에 있던 화상들을 지원했다.
이들의 무역고는 청일전쟁 이전만 해도 조선 무역 총액보다도 앞서 있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청국 조계지의 모습이다.
7 일본 조계의 은행 거리
초기 일본 영사관이 위치해 있던 일본제1은행(사진 오른쪽 앞 건물)의 모습이다.
그 위로 58은행, 18은행 등 세 곳의 일본계 은행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은행통'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실상은 혹독한 경제 침탈의 현장이었다.
8 인천의 러시아인 부상병들
인천에 살던 러시아인들의 활약상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건축 기술자인 사바찐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인 '각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과 제물포구락부, 러시아 영사관 등을 설계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사진의 러시아 병사들은 제물포해전 때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고 있는 광경이다.
/조우성(주필) 사진제공=인천시역시자료관, 화도진도서관, 필자.
2013년 09월 2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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