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6.25 참전 인천학생 허상 인터뷰(퍼온글)
본문
퍼온곳 : 서울신문(19. 9.26)
“발목에 총탄 박히는 고통… 함께 귀향하기로 했던 친구 잊지 못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27회
6.25 참전 인천학생 허상 인터뷰
일시 1999년 2월 24일
장소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규원 치과 3층)
대담 허상(인천상업중학교 2학년때 참전)
이경종(인천학생6·25 참전관 설립자)
이규원 치과원장 (이경종 큰아들)
▲ 1999년 5월 29일 인천고등학교에서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2학년생으로 6·25 한국전쟁에 자원입대해 참전한 지 49년 만에 명예졸업장을 받은 5명의 동창생들. 오른쪽부터 허상(육군 제5사단 보병), 오흥인(육군 통신병), 이재덕(육군 군악병), 이관섭(육군 군악병).
6·25 사변의 발발
나는 1949년도에 인천주안국민학교를 졸업(11회)하고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50년 2학년으로 막 올라가자마자 6·25사변이 일어났다. 사변이 난 후 인민군이 인천에 들어왔을 때 우리 집에서는 나만 친척집에 피란 갔었다.
주안지대 권용훈 지대장을 따라 남하
인천이 수복되면서 피란지에서 돌아온 나는 그때 인천학도의용대 주안지대가 생겨 가입했다.
당시 주안지대 권용훈 지대장은 인천상업중학교 6학년생이었다. 부지대장은 인천중학교 4학년 이용구씨였다. 나는 그 당시 주안지대 대원중에서 나이가 제일 어렸으며 키도 제일 작았다.
1950년 12월 18일 단체로 인천축현국민학교에 모여서 인천학도의용대 전 대원은 남쪽 수원을 향해서 걸어갔다.
수원에서 3일간 대기하고 있다가 철도 화물차를 타고 대구를 거쳐서 삼랑진(三浪津)까지 갔다. 삼랑진에서부터 마산(馬山)까지 걸어서 갔다.
그 후 마산에 도착한 우리들은 다시 통영으로 가서 통영에 있는 통영충열국민학교에 있는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에 제2 국민병들과 같이 수용되어 있었다.
1951년 1월 10일 부산 육군 제2 훈련소
며칠 후에 이계송 대장의 인솔로 우리 인천학도의용대원들은 통영에서 배를 타고 마산으로 왔다가 부산 서면의 부산진국민학교에 있었던 육군 제2 훈련소에 들어갔다.
훈련을 마친 후 군번을 받고 육군 이등병이 되었다. 이때 나는 인천학도의용대 대원중에서는 제일 나이 어린 만 14세로 정식 군인이 되었다.
1951년 2월 초에 동래에 있는 임시 보충대(補充隊)에서 며칠 있다가 다시 대구 보충대로 갔다. 대구에서 전방으로 배치된 곳이 강원도 보병 제5사단 35연대 2대대 2중대 화기소대였다.
친구 송성환의 전사
내 친구 송성환은 6·25 때 우리 옆집에서 살던 친구였고 인천공업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인천학도의용대 주안지대에서 같이 활동하였다.
1950년 12월 18일 송성환과 나는 부산까지 같이 걸어가서 입대하였다. 송성환과 나는 국군 5사단 35연대 2대대 2중대까지는 같이 배치됐다.
송성환은 인천공업중학교 2학년생으로 자원입대하여 1951년 6월 17일 강원도 인제군 서화리 839고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1955년 11월 1일 부산 제3 육군병원에서 허상(인천상업중 2학년생으로 참전, 왼쪽)과 조병갑(인천공업중 3학년생으로 참전, 오른쪽).
강원도 동부전선에서 중상(重傷)
나는 보병 제5사단 35연대 2대대 2중대 화기소대에서 계속 복무했는데, 횡성 태기산 전투에서 3일간 포위되어 크나큰 희생을 치른 뒤 우리 화기소대는 후방에서 재정비를 마치고 4월에 다시 전투지역으로 들어갔다.
이때 우리 소대는 조그마한 두 야산 사이에 있는 계곡을 타고 전진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바른편 야산에서 갑자기 인민군 매복 부대가 기습하는 바람에 내 오른쪽 발목관절(복숭아뼈)에 적 총탄이 박히는 중상을 당했다.
대구 제18 육군병원 기간요원이 되다
나는 대구 제18 육군병원에 후송되어 그곳에서 오랜 수술 끝에 다행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많이 회복되었을 즈음 그대로 18육군병원 기간요원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최전선에서 중상으로 인하여 후송되어 오는 수송 차량을 호송하는 임무를 주로 하였었다.
▲ 1997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송성환의 묘를 참배하는 이규원(이경종 큰아들)과 이근표(이경종 큰손자).
부산 제3 육군병원에서 상이 명예 제대
휴전이 바로 지난 후에 나는 병원 생활을 계속하면서 부상 경력이 두 번이나 있어서 상이 명예제대 신청을 하였는데 어쩐 일인지 제대 신청을 받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나를 부산 제3 육군병원으로 전속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부서를 옮겨가며 근무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자연히 군대 생활이 연장되면서 직업군인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군 생활을 계속하다가 부산 제3 육군병원 보급실 선임하사로 복무하다가 상이 명예제대하였다.
1960년 12월 31일 내 나이 24세 때 제대를 했다. 6·25가 터져 14세 때 자원입대한 지 만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 6·25 참전학생 허상이 인천학생 6·25참전관을 방문해 방명록에 남긴 글.
남기고 싶은 이야기
나는 지금도 “6·25 때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하여 참전한 것은 훌륭한 일이었다.”라고 생각한다.
1950년 12월 18일 남하하여 입대할 때 내 또래의 1936년생인 14세의 어린 소년병들도 많았다.
송성환은 옆집에 살던 좋은 친구였다. 참전했을 때 제대하면 고향 집으로 같이 돌아가기로 했었는데 송성환은 전사하고 나만 집 떠난 지 10년 만에 제대하여 많이 다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나의 6·25 참전 기록을 이렇게 남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6·25 참전 기록을 남기게 하기 위하여 애쓰시는 이경종, 이규원 두 부자(父子)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글 사진 제공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관
▲ 1999년 2월 24일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찍은 사진.
허상
▲인천학도의용대 주안지대 소속
1936년 11월 16일 인천 주안 출생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때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2학년생
1950년 12월 18일 조국과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인천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감.
1950년 1월 10일 육군 입대(14세)
1960년 12월 31일 상이 제대(24세)
하늘땅처럼 오래갈 겨레는 나라에 충성하고
자손만대를 이어갈 집안은 부모께 효도하고
오가는 바람아 이 뜻을 전하거라! -충렬사-
2019-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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