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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독립운동과 인천·(27)]삼연 곽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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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경인일보(19. 9.19)
[독립운동과 인천·(27)]삼연 곽상훈
경인선 위에서 시작된 민족해방… '국민을 결집하고 실력을 길렀다'
17세때 동래서 이주…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 초대회장
고유섭·조진만 등도 배출한 '문예부' 중심 문화활동 전개
3·1운동 확산때 고향 만세시위 주도하다 체포돼 수감생활
인천 최초 야구단 '한용단' 지역봉사 '소년군' 단장맡기도
민족연합전선 신간회서 '계몽' 앞장… 해방후 정치인 행보
삼연(三然) 곽상훈(郭尙勳·1896~1980)은 조봉암, 장면, 이승엽과 더불어 인천이 낳은 거물 정치인이다.
제헌국회부터 5번의 국회의원을 지내고, 국회의장,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았던 곽상훈은 우익 진영을 대표했다.
곽상훈은 1919년 3월 경성고등공업학교 재학 중 고향인 부산 동래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일제강점기 때 인천을 기반으로 학생운동, 소년운동, 신간회 등 합법적으로 국민을 결집하고 실력을 기르자는 방향의 항일운동을 택했다.
그는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친일로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검찰관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야당 소속 정치인으로 굵직한 행보를 이어갔지만, 만년에는 5·16 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비판받은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곽상훈의 행적이다.
1899년 경인선 개통 당시 열차로 모여든 군중 모습. 경인선은 서울로 통학하는 인천 학생들의 교통수단이었다. /인천시사 제공
곽상훈이 1972년 월간지 '세대'에 연재한 '삼연회고록'을 보면, 경성고등공업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17세 때 동래에서 인천으로 이주했다.
그는 인천에 사는 큰형 집에서 경인선을 타고 서울 경성고공으로 통학했다.
곽상훈은 회고록에서 "경인통학생으로서 아침저녁 불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무렵부터 인천은 나의 제2 고향이 되어 주었다"고 했다.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학교로 통학하는 학생들은 경인철도를 탔다. 인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다닐 상급학교가 부족해 서울로 진학하는 경우도 상당수였다.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에는 경인선 기차 통학이 1915년 무렵부터 시작됐고, 통학생 수는 한국 학생이 200명, 일본 학생이 100명 정도였다고 나온다.
서울로 통학하는 인천 학생들은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를 결성해 교류했고, 초대 회장은 곽상훈이 맡았다. 곽상훈은 학생들 사이에서 야구, 축구, 농구 등 운동을 잘하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이름을 알렸다고 한다.
조선인을 무시하는 일본 학생을 "야구방망이로 늘씬하게 두들겨 주었다"는 일화도 남기는 등 경인통학생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게 친목회 초대 회장을 맡은 이유로 보인다.
교육기회를 얻은 학생들이 모인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는 특히 문예부를 중심으로 문화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한국 미학(美學)의 선구자라 불리는 우현 고유섭(1905~1944), 대법원장을 지낸 조진만(1903~1979),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이길용(1899~?), 흑인시를 개척한 시인 배인철(1920~1947) 등이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 문예부 출신이다.
1928년 한용단 모습. 1924년부터 한용단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게 되면서 고려야구단이라는 이름을 썼다. /인천야구 한 세기 제공
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는 2005년 펴낸 인천론집 '황해에 부는 바람'에서 "경인선은 일제의 군사적 목적 아래 계획됐지만, 뜻밖에도 인천의 문화 역량을 한층 북돋았으니, 그 첨병 노릇을 맡아 한 것이 바로 경인기차통학생들이었다"며 "일제의 침략 루트로 건설된 경인선을 오히려 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공간으로 탈환했다"고 평가했다.
곽상훈은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자 경인통학생을 대표해 각처의 학생들을 동원했고,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의 동원 책임까지 지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인천상고 학생들과 만세시위를 하고 3월 10일께 고향인 동래로 내려갔다. 독립선언서 내용을 창호지에 베끼고, 노끈을 꼬아 숨겨서 가져갔다고 한다.
동래읍 장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미결수로 8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다가 풀려났다.
이 일로 곽상훈은 경성고공에서 퇴학당했다.
삼연 곽상훈 선생. /경인일보DB
곽상훈은 1920년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 소속 16~17세 학생을 중심으로 인천의 첫 야구단인 '한용단'(漢勇團)을 만들고, 자신은 단장을 맡았다.
한용단의 홈구장은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인 '웃터골경기장'(인천공설운동장)이었다.
'인천 한 세기'를 보면, 한용단은 인천미두취인소가 주축인 '미신'(米信), 일본철도사무소의 '기관고'(機關庫) 등 일본인 팀과도 맞붙었다.
언론인 고일이 1955년 쓴 '인천석금'에서는 "야구대회가 있다고 소문만 나면 시민 팬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엿장수도 오고 지게꾼도 대섰다. 할머니도 '스트라익' 하고 할아버지도 '호무랑'(홈런의 일본어 발음) 소리를 외쳤다"고 당시 한용단의 한일 야구전 분위기를 전했다.
인천시민들의 민족의식을 높였던 한용단은 1924년 해체됐다. 미신 팀과의 결승전에서 일본인 심판의 오심으로 우승을 놓쳤다며 흥분한 곽상훈 단장과 일본인 검도사범 기요다(淸田)가 몸싸움을 벌였는데, 이때 함께 분노한 한국인 관중들이 본부석으로 몰려가 일본인들과 충돌한 사건이 빌미가 됐다.
최원식 교수는 '황해에 부는 바람'에서 한용단을 가리켜 "운동경기의 외피를 쓰고 출현한 민족적 단결체"라고 했다.
1924년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불령단관계잡건' 문서. 곽상훈이 상해청년회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조사 활동을 한 것과 관련한 보고 문건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내 조선인들이 대대적으로 학살당했다.
곽상훈은 이듬해 9월 상해청년동맹회 주도로 열린 '제2회 관동진재 참사자 추도회'에 동경진재동포학살조사위원으로 참여해 한국인 희생자 명단을 입수하고, 학살사건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도쿄 현지 조사에도 나섰다. 곽상훈은 1925년 3월 초까지 상하이에서 청년 독립운동가 모임인 상해청년동맹회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했다.
애초 그가 의열단에 참여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인천으로 돌아온 곽상훈은 인천 소년군(보이스카우트) 단장을 맡으며 지역사회 활동을 재개했다.
1925년 7월 '송현리 갈밧 매축(매립)공사'로 인해 민가 30가구가 침수됐을 때 곽상훈 단장이 소년군을 인솔해 비를 맞으며 물을 빼는 공사를 돕고 철야 경계를 섰다고 동아일보 1925년 7월 15일자 신문에 보도됐다.
같은 해 8월 인천 소년군은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희생자들의 추도식을 월미도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을축년인 1925년 7~9월 4차례에 걸친 집중호우로 한강, 금강, 낙동강, 대동강 등이 범람해 경성과 인천을 포함한 전국 곳곳에서 홍수 피해가 있었다.
홍수로 인한 사망자만 647명에 달했고, 2만3천호가 넘는 가옥이 유실·붕괴했다고 조선총독부는 집계했다.
1930년 11월 일본 경찰이 작성한 감시대상 인물카드로 가장 위에 있는 인물이 곽상훈이다. 나머지 3명은 신간회 회원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노영택 대구가톨릭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1979년 펴낸 '일제하 민중교육 운동사'에서 인천 소년군과 관련, "이들은 비록 소년들이었다 하지만, 단장 곽상훈의 지도 아래에 민족 문화운동의 한 분야로 소년운동을 전개했으니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그 기반이 되고 있다"며 "이 운동은 조직을 통해 합법적 방법으로 전개됐고, 시민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고 했다.
곽상훈이 가장 공들인 활동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손을 잡은 민족연합전선 조직인 신간회였다.
그는 1927년 12월 신간회 인천지회 창립대회에서 총무간사를 맡았다. 하상훈(1891~1964) 등 우익 인사와 유두희(1901~1945), 권평근(1900~1945) 등 좌익 인사가 곽상훈과 함께 신간회 인천지회 주축이었다.
신간회는 강연활동이나 계몽운동 등 합법적인 방식으로 민족운동을 진행한 당시 국내 최대 좌우합작 단체였다. 곽상훈은 1929년 6월 신간회 중앙검사위원에 뽑혔고, 같은 해 10월에는 인천지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이 시기 일본의 감시대상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신간회는 1931년 5월 해산했는데, 곽상훈은 신간회 해산에 지속해서 반대하며 좌익과 우익의 공조를 주장했다.
사회활동가로 신문 보도에 꾸준히 등장했던 곽상훈의 이름은 신간회 해산 이후부터는 찾기 어렵다. 곽상훈의 행적을 언론 등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해방 이후 정치판에 뛰어들면서부터다.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된 곽상훈은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으로 항일투쟁 경력을 인정받아 반민특위 검찰관에 임명됐다.
1949년 백엽문화사가 출간한 '반민자 죄상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기로 악명 높았던 일제강점기 고등계 경찰인 김태석(1882~?)의 재판 장면이 나온다. 검찰관 곽상훈이 김태석을 재판에 넘겼다.
부산 동래고등학교(옛 동래고보) 교정에 있는 곽상훈 흉상. 곽상훈은 동래고보를 졸업한 뒤 서울 경성고공으로 진학했다. /동래고 제공
김태석은 재판에서 독립운동가 강우규(1855~1920)를 체포해 고문한 사실을 계속 부인하고, 체포한 게 아니라 강우규가 자수했다고 잡아뗐다.
당시 격분한 곽상훈은 재판장과 방청객들에게 "이때까지의 피고인 진술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참으로 성현의 말과도 같고, 가장 애국자 같이 보인다"며 "이렇기 때문에 본 재판을 가장 공정하게 진척시키려면 먼저 피고인의 머리를 정신분석하여 정신이상 유무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라고 소리친다.
곽상훈은 김태석에 대해 고등경찰 때 애국지사를 체포한 혐의와 경남 참여관 겸 산업부장을 역임할 때 조선 청년들을 출병시킨 혐의로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김태석에게는 무기징역과 50만원 재산 몰수형이 선고됐고, 1950년 한국전쟁 직전 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발행일 2019-09-19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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