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呱呱 朗聲의 仁高 111周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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呱呱 朗聲의 仁高 111周年
悠久한 歷史와 傳統에 빛나는 자랑스러운 仁川高等學校는 19세기의 마지막 舊韓末 風雲속 激動期에 內憂外患의 試鍊을 겪고 있을 때 高宗皇帝는 眞心으로 교육만이 救國의 한 수단이요 國家中興의 지름길임을 강조하면서 백성들에게 교육에 힘쓸 것을 切切한 呼訴로 된 교육에 관한 勅書를 발표하였고 이어서 1895년 4월 16일에 최초의 학교 官制 漢城師範學校 官制가 발표되었다.
또한 같은 해인 1895년 5월 10일 외국어 학교 官制가 발표되어 同年 6월 27일 官立 漢城外國語學校 仁川支校가 設立되었으니 仁高의 첫 始作이요. 救國敎育運動의 始動이었다고 하겠다.
이 詔書는 우리 교육사상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참고로 여기 기재한다.
「朕이 생각하건대, 祖宗께서 業을 시작하고 統을 이으사 이제 504년이 지났도다. 이는 실로 우리 列朝의 教化와 德澤이 人心에 젖고, 우리 臣民이 능히 그 忠愛를 다 한데 있도다. 그러므로 朕이 한량없이 큰 이 歷史를 이어 나가고자 밤낮으로 걱정하는 바는 오직 祖宗의 遺訓을 받들려는 것이니, 너희들 臣民은 朕의 마음을 본받을지어다. 너희들 臣民의 祖先은 곧 우리 祖宗의 保有한 어진 臣民이었고, 너희들 祖先의 충애를 잘 이었으니 곧 朕이 保育하는 어진 臣民이로다. 朕과 너희들 臣民이 힘을 합하여 祖宗의 큰 터를 지켜 億萬年 平安함을 마저 이어가야 할지로다.
아아! 朕이 교육에 힘쓰지 아니하면 나라가 공고하기를 바라기 심히 어렵도다.」
이어지는 詔書는 근대학교의 성립은 관리양성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은 과거제를 중심으로 한 구교육을 지양하고 德育 體育 智育의 새로운 綱領은 교육의 새지표라 할 수 있다.
제반정세가 한국 근대학교 설립의 素地가 되었다. 기독교 및 서양 학문의 전재, 쇄국주의로부터 一轉하여 세계열강과 교역을 맺게되는 開國에 따르는 정치, 경제, 사회 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조만간 새로운 교육체제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의 긴박한 국제 정세는 외국어교육이 무엇보다도 요긴했으며 국민교육을 위해서는 우수한 교사의 확보를 위해서 그 양성이 필요했다고 생각이 된다.
학교설립을 살펴보면 인천이 개항된 지 12년 1895년 6월 27일 현재의 내동 85번지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이 있던 그 자리에 당시 있었던 인천감리청은 이 고장에 신학문을 알리는 본교 개교의 터전이었다.
마침내 1898년 5월 25일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의 첫 졸업생 9명을 배출할 수 있었다.
그 자랑스러운 제 1회 졸업생 명단은 다음과 같다.
金允鉉 金春培 朴昌鎬 李根浩 李東煥 李丙昌 李容仁 李昌雲 鄭元朝
한편 지금 같으면 국가요원 양성을 위해서 우리학교인 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를 세웠다면 지원자가 밀려들었을 것이나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여러 학교가 문을 열었으나 지원자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고관들의 자제나 그 관계자들과 지방 유지들의 자제를 종용해서 입학시키고 학비를 받기는 고사하고 월급을 주고 졸업과 동시에 관직에 취임하게 했다.
그런 특혜 조치에도 불구하고 큰 효과가 없었다. 그 까닭은 첫째로 일반사회의 봉건적인 인습으로 신학문에 대한 인식 부족이었다.
학문이라고 하면 四書 五經을 중심한 諸子百家만이 학문이요, 그것만을 가르치는 것이 학문이라고 생각했으며 외국 사람을 오랑캐라고 배척했으며 학부형들로서는 동방예의의 나라 사람이 자제에게 오랑캐가 되라고 외국어를 가르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계급의식에서 外國語文은 中人階級인 譯官들이나 배우는 것이며 農工商은 常人이나 하는 직업이라고 한데서 외국어 학교 같은 곳에 입학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반대 이유는 斷髮 때문이라 하겠다.
학교에서는 머리 깎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니 머리 깎는 것은 목을 자르는 것보다 못할 일이라고 하는 頭可斷, 髮不可斷이란 식의 사고방식이 크게 진학의 길을 막았던 것이다.
이러한 신교육을 받아들이려는 정신적 터전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면서도 본교는 가까스로 30여명을 모아서 개교식을 갖고 또 그 졸업생을 내기까지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高宗 32년(1895년)에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소학교 등 4~5개의 새로운 학교를 세웠을 뿐, 별다른 교육발전이 없었으며 특히 실업이나 기술 교육은 전혀 고려되지 못한 상황을 보고, 고종 황제는 1899년 다시 교육을 독려하는 詔書를 내리게 되었으며 교육 진흥을 강조하는 동시에 상업, 공업계의 학교 개설이 급선무임을 밝혔다. 이러한 교육 정책의 방향은 우리 학교가 후에 외국어 학교에서 실업학교로 전환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다음 글은 인고 동창회보 제1호에 실렸던 李根浩(제1회) 同門의 회고기(回顧記)이다. 참고가 되겠기에 여기에 전재한다.
「年追九旬인 本人 七十餘年前에 入學했던 母校의 過去를 追憶하니 참으로 感慨無量합니다. 그 當時 事態를 略記한다면 우리나라도 當當한 獨立 國家로서 京城에는 官立外國語學校가 있었고 仁川에는 各國과 通商하는 關門이라서 官立外國語學校 仁川支校가 있었는데 學生들의 年齡의 度가 三十四歲 年長者로부터 十七歲인 年少者 本人이 있었으니 이런 일로 미루어 볼지라도 그 당시 우리 社會의 形便은 넉넉히 짐작이 갈 것입니다. 그런데 本人은 不幸히도 入學 三個月만에 天涯孤兒가 된 崎嶇한 身世였지요.
그러한 悲壯한 決心으로 卒業을 目標하고 東家食西家宿으로 滿二年間을 지내고보니 營養失調로 瀕於死境이였지요.
多幸히 恩師 岩崎先生과 恩人 仁川駐在 日本領事 弊原 喜重 兩氏의 人間的인 同情으로 每月 金四圓씩을 받고 一從事書生이라는 名目으로 一年을 무사히 맞추어 卒業의 所願을 達成하였으나 外國人 同情下에 卒業한 것이 어쩐지 마음깊이 부끄러워 不得己한 事가 아니고는 많은 사람들의 集會場에 얼굴 내놓기가 겸연쩍던 기억이 至今도 歷歷합니다.
恩師요 恩人이신 두분은 끊임없는 好意로 日人商社에 就職을 勸告하였습니다. 그러나 官費卒業인 나로서 外國人 商社에서 일하는 것이 不當하다는 것이 마음깊이 牢定되여 當面利害를 不顧하고 우리 사람들이 經營하는 大韓通運會社에 入社하였지요.
그 當時 會社 社長이 大政治家로 名聲이 錚錚하던 李完用이요 株主가 擧皆 政治要人이였으나 運營失策으로 赤字一貫에 閉門之境이였던 것을 本人의 專心專力으로 社務에 充實한 結果 오래지 않은 時日에 社運이 大開하여 큰 돈을 벌었더니 社長은 勿論이요 其他 株主들도 칭찬이 자자하였고 社長의 推薦으로 敎官初任까지 叙任되고 月俸六十圓으로 比較的 餘有있는 生活을 營爲하였지요.
그 後 母校 補闕敎官試驗에 應試 抜擢되어 實職敎官으로 赴任하고 보니 叙判任官 六等에 겨우 初俸十五圓임으로 當時 學部에 懇請하여 日本人 學校에 講師 職으로 生活을 유지하다가 判任官二等까지 階進되었고 二十九歲時 宗廟大享에 掌牲令으로 三日間 公故를 치루고 六品職까지 階次되었다가 日帝의 侵略으로 亡國後裔 된 本人은 殉國을 決心하고 恩師 岩崎先生께 告別次갔다가 先生의 懇曲한 挽留에 感動되어 그분의 말대로 學校에서 自國思想만을 鼓吹하며 지내기를 八,九年이었고 李完用과는 그 卽時 絶交되었지요.
그러나 그분과는 私的으로 나를 잘 알아주는 분이어서 이제도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 頭腦가 明晳하기로 有名하던 분이 어쩌다 一步錯誤에 천장 만장 다시 솟아나지 못할 무시무시한 수렁에 떨어져 死葬되었을가 果然 人生行路는 걷기 어려운 길입니다.
本人은 그 當時 所謂 政治人들의 醜行에 恨을 품고 一生을 清掃로 業을 삼아 至今도 每日 1~2時間은 어김없이 實行합니다.
苦海人生이라고 하지요만은 本人과 같은 崎嶇 運命은 드물 것입니다.
頭緖없는 追憶의 一端 이나마 적어 볼 機會가 온 것을 無限한 榮光으로 생각합니다. 여러 同窓 諸賢의 福祉를 祈願합니다.」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영어야학교의 이력을 여기서 자세히 밝히고저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인천영어야학교 생도들이 마치 일본의 개성교 학생들이 일본 야구 도입기에 했던 것과 같은 역사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仁高 100年史>는 1899년 당시 인천영어야학교 1학년생이었던 일본인 학생 후지야마후지사와의 일기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899년 2월 3일
3시 근무가 끝난 다음 4시경부터 中上군을 불러내어 一蓮宗(옛 신흥초등학교 옆의 절) 앞 광장에서 赤松(영사관 서기, 영어과 담임)선생, 藤村, 佐騰씨, 平井(영사관 서기, 영어과 담임)선생, 中上군 그리고 우리들과 함께 ‘베이스 볼’ 이라는 서양식 공치기를 시작하고 5시경에 돌아와 목욕탕에 갔다.
이것은 비록 14~15세 된 일본인 학생의 일기이나 이 땅에서의 ‘野球’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것이다. 일설에는 부산지역이나 국내 거주 외국인 사이에서 야구 경기를 했을 개연성이 있다고 하나, 아직 그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 바 없는 하나의 說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는 기록을 남긴 자의 것’ 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일기장의 기록은 야구가 이미 인천 지역에서는 일반화된 운동 경기의 하나임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단서인 것이다. 특히 인천영어야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관리, 교원, 은행원, 사원, 상점원으로 12~13세 되는 어린이로부터 나이 많은 24~34세까지 日用영어회화를 배웠다 하니, 요사이 영어학원 수준이 아닌가 한다. 다른 학원도 아닌 영어학원이기 때문에 야구 보급 또한 빨랐으리라 짐작된다.”고 <仁高 77年史>가 밝히고 있듯이 당시 야구를 스포츠로 즐긴 것이 일기의 주인공인 소년 계층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일본에 야구가 도입된 지 26년이 지난 때이고, 일본인들이 인천 지역 조계지로 이주해 온지는 16년후이며, 1901년 서울 YMCA 총무를 맡은 질레트가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원들에게 야구를 보급하기 6년전의 일이다. 질레트가 황성기독교청년회원들에게 야구 이외에 농구, 복싱, 스케이팅 등 스포츠를 보급했다는 것은 우리 체육사에서 잊지 못할 대목이다.
그러나 미국인 질레트가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베이스 볼’은 일본에 도입돼 각급학교로 퍼져나갔고, 그것이 ‘개화 문물’의 하나로 자연스럽게 인천에 도입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근현대 문물의 대부분이 일본이라는 굴절된 프리즘을 통해 들어 왔듯이, 야구 또한 그렇게 인천 땅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韓日議定書가 선포된 때부터 이 나라 교육 행정의 主導權도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본교의 시대적인 급변속에 險亂한 역사적 波高를 헤쳐 오면서도 어느 정도 기초가 잡힌 狀況이 되었으며, 시대적 요청과 설립 목표대로 관립일어학교라 改稱되었으니 이때가 1904년 4월 20일이었다.
이것은 강대국의 거센 세력의 空轉틈에서 정국이 서서히 漸進的으로 일본의 세력이 主導權을 잡게 된 결과이기도 했으며, 앞으로의 이 나라 교육의 길이 내다보여지는 한 징조이기도 했다.
한편 1905년 교과서 편찬에 착수한 학부는 정책적으로 친일교육 强化에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이로써 당국은 인정된 교과서 사용을 각급 학교에 강요했으며 이것은 오로지 당시의 국민감정 면에 지배적이던 排日思想을 말살하고 친일감정, 사상 등을 깊숙이 뿌리박게 하려는 정지작업이었던 것이다.
1905년도 을사조약이 이루어졌던 그 즈음이었다.
조국에 대한 뜨거운 憂國忠情을 감출 수 없었던 20대 청년의 인천일어학교 학생들에게도 견딜 수 없는 불의에 대한 항거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때의 狀況을 당시 일어학교 2학년이었던 李元玉 同門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乙巳條約으로 하여 국가의 主權을 빼앗겼고 나라 잃은 슬픔은 온 천지를 뒤덮은 동짓달도 다 지나간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의 주장은「나라를 빼앗기는 이 판국에 일본어를 배워 무엇 하겠느냐? 우리가 일본의 노예가 될려고 일본말을 배우겠느냐?」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학교에서 수업을 拒否하고 그날 학교 간판을 때려 부수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이판사판이었습니다. 이미 退學을 覺悟하고 결심을 하고서 岩崎先生 앞으로 나갔던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일을 했는가?” 묻길래 우리는 이미 각오와 결심이 서서 거침없이 이야길 했죠. “나라를 잃은 이때 일본말을 배워 뭘 하겠습니까”라고 했더니만, 그분 말씀이 “아 잘한 일이다. 너희들에게 이제 내가 가르친 것이 정말 그대로 살아있구나. 장한일이다. 정말 나라와 民族意識에서 우러난 참다운 일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희생자도 없이 무사했고, 그 후 그 선생에 더 많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신교육이 이 땅에 들어온 이후, 우리나라의 실업학교에 官立農商工學校와 전문 교육기관인 醫學校가 있었다.
그러나 1909년 실업 교육령이 발표되자 실업 교육은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일제는 중등학교보다 초등학교에 주력했고 다음으론 실업교육에 강력한 행정력의 뒷받침과 아울러 그 진흥에 노력했던 것이다.
이것은 인문 중심교육에서 실생활과 밀착된 실업교육 중심으로 하려는 정부의 기본방침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실업 교육령 공포와 아울러 학부는 그의 기본 방침대로 실제적인 개편으로 들어갔다. 그 영향은 제일 먼저 본교에 미쳤다.
1909년 5월 24일 칙령 59호로 官立仁川日語學校는 官立仁川實業學校로 改名되었다.
본교와 함께 같은 해, 일본인 사립학교로 경영되던 학교를 인수하여 학부는 釜山公立實業學校를 설립했다. 1909년 설립 당시의 실업학교는 인천, 부산 두 곳에만 있었을 뿐더러 학생수도 官立仁川實業學校에 149명 나머지 부산에 19명 모두 168명만이 재적하고 있었다.
그 후 같은 해 10월에 평북지방에 定州實業學校 1910년에 平壤實業學校, 大邱農林學校, 全州農林學校, 群山實業學校, 春川實業學校가 새로이 설립되었다.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韓日合邦條約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27대 519년, 오랜 역사, 李氏朝鮮은 그 終幕을 告하였고 이로부터 35년간 어둡고 괴로웠던 屈辱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韓民族史上 가장 굴욕적인 韓日合邦(1910)에서 祖國光復(1945)까지 35년간 日帝는 韓民族을 지구상에서 영원히 말살하려는 식민통치를 했다. 法的으로는 日本帝國 臣民으로써, 思想的으로는 日鮮同祖論으로써, 敎育的으로는 同化敎育으로써 韓民族의 非民族化를 획책했다. 政治的으로는 義務만 부과되고 經濟的으로는 勞動만이 부과된 非人間化를 자행했다. 한손에 同根同祖論, 敎育勅語의 非論理와 다른 손에 軍과 警察의 폭력기구를 두고 교육침략을 감행하여 反敎育 非敎育을 자행했던 것이다.
日帝는 韓民族을 忠良한 帝國臣民으로 만들고 植民地統治에 복종하는 愚民을 만들기 위해 日本文化를 移植하면서 日語常用을 强要했다. 民度에 맞는 敎育을 한다는 口實아래 實業敎育만을 强調하면서 差別敎育을 했고 私學을 統制 彈壓했다. 1930年頃부터서는 더욱 악랄해서 日語常用뿐만 아니라 皇國臣民誓詞의 제창, 神社參拜, 創氏改名까지 强要했다. 日帝末期에는 國體明徴, 內鮮一體, 忍苦鍛鍊의 구호 아래 모든 敎育活動을 戰時體制로 改編하여 學生을 戰爭物資 생산에 동원했고 學徒志願兵이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 같은 日帝의 敎育政策에 대한 韓民族의 저항은 다양했고 치열했다. 빼앗긴 國權을 회복하여 獨立된 國民이 되자는 염원을 끓고 있었다.
1911년의 조선교육령 공포 이듬해인 1912년 4월1일 官立仁川實業學校는 仁川公立商業學校로 그 명칭이 바뀌게 된다. 이른바 제3차 校名 변경이다.
새로운 조선교육령에 의해 조선총독부가 주로 관장해오던 학교운영을 대폭적으로 각 道에 이관시킨 결과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특수학교의 성격을 탈피해 실질적인 상업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형식과 내용을 갖추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총독부 고시 제242호와 勅令 제396호 5조에 의해 고등보통학교 동등이상의 학력이 인정됐다.
일제가 실업교육을 유독 강조한 사실은 仁川公立商業學校와 仁川公立商業專修學校가 조선교육령이 공포된 다음해인 1912년 4월에 설치됐지만 인문계학교인 仁川中學校가 설립된 것은 그보다 약 23년뒤인 1935년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1919년 3.1운동의 발발로 仁商 7회 졸업식 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학교는 교장 직권에 의해 일방적인 휴교조치를 당했으며 상당수 학생들이 日警에 체포 구금됐다.
이같은 와중에서도 동창들간의 상호협력은 보다 공고화되어 1920년 4월에는 동창간에 친목을 도모하고 상부상조의 정신을 살린다는 취지아래 同仁契가 구성되기도 했으며 이듬해 11월엔 同仁社를 구성, 동창회 조직을 체계화시켜 나갔다.
仁川公立商業學校 초기엔 수업료가 없었다. 따라서 배우고자 하는 열의를 갖고있는 사람은 누구나 입학시험을 통과할 경우 학업을 할 수 있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학생들은 전국각지에서 모여들었다. 1918년 졸업한 朱定基씨가 입학할 때만 해도 모집정원 50명에 7백여명이 지원했다. 商業學校가 그 당시만 해도 仁川商業과 釜山商業, 그리고 善隣商業 3개 학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함경남북도와 제주도 등지에서까지 입학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따라서 仁川公立商業學校는 상업을 배우고자 하는 전국의 학생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0년도에는 지원자가 1천38명이나 몰려들었고 졸업생들의 취업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922년 숱한 어려움 속에서 이어져 나갔던 內里 85번지에서의 학교생활이 마감되고 마침내 松林洞 언덕기슭에 당시로서는 최신의 학교건물을 신축해 학교를 옮기게 됐다.
개교이후 실업교육이 강조되면서 자연 학생수가 급격히 늘어만 갔고 재학생수도 늘어나 교실난을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존 학교건물이 노후화해 학교이전은 최대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松林洞으로의 이전은 이같은 문제점을 해결키 위한 조치엿다.
학교건물은 松林洞 235번지에 건평 2백평과 대지 및 부속지를 합해 총 5천1백99평 규모로 당시로써는 충분한 시설이었다. 새로운 학교를 마련하면서 학생들의 생활도 일신되었으며 넓은 운동장이 마련된 덕택에 체육활동이 활기를 띠어갔다.
한편 松林洞 校舍는 1965년 1월 17일(당시 송림초등학교) 전기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어 옛 자취를 찾을 길이 없게 되었으나 애석할 따름이다.
甲種商業學校로 昇格
1922년도에 접어들면서 학교에는 두가지의 큰 변화가 생겨났다.
바로 松林洞으로의 이전과 함께 仁川公立商業學校가 甲種商業學校로 昇格한 것이었다. 이같은 일제 교육당국의 조치는 1919년에 발생한 3.1운동에 몹시 놀란 일제당국이 조선의 통치방법을 종래 무단통치에서 소위 文化政治로 전환시킴으로써 나온 제2차 조선교육령의 공포에 뒤따른 것이었다.
甲種商業學校로 昇格하면서 학제도 3년에서 5년으로 늘어났다.
甲種승격은 1922년 4월 1일을 기해 이뤄졌으며 이로 인해 仁川公立商業學校는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던 仁川南公立商業學校와 동등한 학교가 되었다.
한편 교육령의 개정에 따라 仁川公立商業學校에는 簡易學校가 병설되었는데 이 학교의 정식명칭은 仁川公立簡易商業學校였다.
仁川公立簡易商業學校는 1916년 10월 18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271호에 의해 가까스로 32명의 학생을 모집, 입학허가를 받아 개교식을 가졌다. 주로 완전 실무에 치중한 상업일반과목을 1년동안의 단기간에 습득케 해 사회생활에서 즉시 활용토록 교육이 이뤄졌다.
仁川公立簡易商業學校는 仁川公立商業學校가 甲種상업학교로 승격하면서 仁川公立商業補習學校로 개칭되었으며 수업연한도 2년으로 늘어났다.
仁川公立商業補習學校는 1930년 3월 31일 경기도 고시 제32호에 의해 폐지되었다.
1933년에 仁川南公立商業學校는 仁川商業學校와 合倂하면서 廢校되었으나 學校沿 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겠기에 간략하게 그 變遷史를 略述한다.
仁川南公立商業學校는 1887년 인천의 일본인 거류민들이 세운 「仁川英學舍」에서 비롯된다. 1887년 인천의 일인들이 영어교육을 목적으로 세운 「仁川英學舍」는 1892년 「仁川英語夜學校」로 개칭되었다가 露日戰爭後 상업교육이 개시되어 1906년에는 「仁川民團立仁川商業學校」, 1912년 4월 20일에는 「仁川公立商業學校專修學校」로 개칭했다가 1914년 2월 「甲種商業學校」로 승격하고 1922년 4월 「仁川南公立商業學校」로 교명을 바꾸었다가 1933년 仁川商業學校와 합병, 폐교되었다.
인천공립상업학교와 인천남공립상업학교가 倂合된다는 풍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현실적 여건으로 보아 인천공립상업학교와 인천남공립상업학교의 병합이 점점 불가피한 사정으로 기울어가자 그 시시비비의 여론은 비등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정을 살펴보면 인천부에서는 당시 未豆取引所(현재의 증권거래소와 유사한 것으로 곡물을 취급함, 현 한국은행인천지점자리)에서 穀價市場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오는 稅收入으로 인천남공립상업학교와 인천공립여학교(현 인천여고)를 유지하고 있었다. 헌데 인천미두취인소는 1929년 3월 인천부중역회의에서 경성부취인소와 합병, 경성으로 移轉시킨다는 발표가 있었다. 인천미두취인소의 장래성이 적은 것에 비해 경성미두취인소는 證券市場을 가지고 있어 장래성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로 인하여 인천미두취인소와 신설 경성취인소에 대한 병합문제는 인천부세진흥회를 중심으로 한 인천부민의 猛熱한 반대에까지 이르렀으나 取引所令공포가 있을때까지 분규는 일체 중지한다는 경기도지사의 조정으로 소강상태로 있다가 결국 인천취인소는 경성취인소에 합병되고 말았다.
인천미두취인소가 서울로 이전되자 인천부에 財政難이 닥쳤다. 따라서 미두세 수입에 의존하던 남상업학교의 운영은 자연 어렵게 되어 인천공립상업학교와 합병의 원인이 되게 되었다. 한편 인천상업학교도 당시 주로 조선인이 다니던 학교로써 일제의 식민지정책과 기업체의 차별정책으로 취업이 쉽지않아 합병의 요인은 있었다 하겠다. 이무렵 인천부에서는 남상업학교의 운영을 경기도로 이관했으며 또한 경기도에서는 인천이라는 조그만 지역에 두 개의 상업학교를 운영해야 할 필요성을 의문시하게 되어 끝내 역사와 전통이 깊은 인천공립상업학교에 인천남공립상업학교를 흡수시키게 되었다.
당시 인천남공립상업학교는 순수한 일본인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그 규모는 속칭 北商業, 즉 인천공립상업학교보다 컸으며 학급수가 1학년에서 5학년에 이르기까지 2학급으로 모두 10학급에 이르는데 비하여 인천공립상업학교는 그 반에 불과한 5학급의 규모였다.
시설규모에 따라 인천공립상업학교의 송림동 校舍를 인천부로 이양하고 율목동1번지의 속칭 南商業, 즉 인천남공립상업학교 校舍(현재의 인천중앙국민학교자리)로 이전하게 되었으니 仁商으로는 두 번째의 학교이전이었다.
당시의 校訓은 4가지의 강령으로 제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첫째, 誠實, 剛健, 둘째, 勤勉, 力行, 셋째, 大同, 和哀, 넷째, 至誠, 奉公으로 되어 있었다.
합병전, 가르치는 선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일본인들이었으나 전국 각도에서 몰려든 수재로 뭉친 인천공립상업학교의 한국인학생들-그 명석한 두뇌와 재치로 가득한 학교생활, 그러나 그뿐이랴. 유모어, 윗트로 웃고 잃어버린 조국의 운명에 울분으로 뜨거워지는 가슴을 치면서 悲慣, 慷慨의 격정을 나누지 못하던 때도 있었건만 이제는 그 오롯한 가족적인 우애의 보금자리는 仁商과 南商의 합병으로 무너졌다.
병합-그것은 변하는 것도 많았다.
학급편성은 재편성하지 않았다. 1년이 지나 혼합 편성했지만 남상업학교의 일본인 학생은 그들대로, 인상의 학생은 학생대로 학급편성을 했다. 아무래도 서먹서먹했었고 융화될 수 없는 그 본질은 운동장에서든 교실에서든 모든 집회, 어느 곳에서나 융화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한국학생 누구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으나 이것을 일러 이심전심이요, 염화시중의 미소, 바로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합병전, 남상업학생들이 육군각반을 두르고 다녔을 때, 인천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은 단화에 일칭 해군각반이라 해서 하얀각반을 두르고 속칭 북상의 긍지와 멋을 가지고 있었는데, 합병이 되자 모든 복장이 통일되었다. 더구나 합병 이전에는 군사교련이 北商의 교과시간에는 없었으나 栗木洞校舍로 오자 철저한 군사교련이 시작되었다. 당시는 만주사변의 戰雲이 감돌기 시작한때로 군국주의 일본은 전투력 강화를 위한 국가정책으로 군사교련을 철저히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학생들은 군사교련의 無用性을 크게 느끼고 있었으며, 대리전쟁을 위한 준비로서의 군사교련이라는 강한 의식을 가졌다. 그러나 일본은 항의의 여유를 주지 않았고, 일본인 교사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의도적인 강압감을 주었으며, 모든 교과에 앞서 교련의 특수성을 注入시켰다. 더구나 가정적으로 극심한 경제적 곤란속에서 배우는 한국학생들에게 「操行」평가의 불량, 퇴학, 낙제등에서 오는 위압과 「교련」이 주는 제도적인 생활지도 評點은 당시 학생으로서는 무시할 수 없었던 난관이었다. 취직의 문제와도 직결되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의 운동도 그 양상을 달리했다. 일본학생은 주로 野球를 했고 한국학생은 주로 경비가 적게드는 蹴球를 했다.
합병후 학교 당국에서는 야구에 편중된 느낌을 갖게 했으며 한국학생이 주로 했던 축구는 거의 학생자비부담에 자발적으로 연습하게 하고 야구는 코치의 월급까지 주어가면서 했다. 또 柔道와 劍道는 학교특별활동으로 둘중에 한 가지는 필수였다고 한다.
1937년은 본교가 창립한지 마흔두해가 되는 해요, 인천공립상업학교로 校名을 바꾸어 부른지도 스물다섯 해가 되는 때였다.
이해는 일본이 盧溝橋事件을 계기로 소위 中日戰爭을 일으킨 해로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에 대해 욕심을 노출시킨 일본은 이때부터 우리나라에 대하여 더욱 제국주의의 악랄성을 드러냈다. 우리나라를 중국 침략의 兵站기지로 만드려한 일본은 1937년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9년간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 그리고 정신적 收奪까지 상상도 못할 기발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온갖 착취를 일삼았다.
전쟁수행을 위한 가진 수단과 방법은 교육정책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와 이시기 일제는 철저한 황국신민화와 전쟁완수를 위해 교육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명분상 조선교육의 三大綱領이라는 것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강령의 첫째는 國體明徵으로 이것은 바로 皇國臣民교육의 지도과정이요, 救國의 이상이기도 했었다. 둘째는 內鮮一體 信愛協力으로 內鮮이 경애하고 서로 신뢰함으로서 비로소 내선일체가 이루어진다는 저들 일본인의 말이었다. 셋째는 忍苦鍛鍊이다. 이것은 바로 사물을 가볍게 보지 않는 진지한 태도로서 난행과 고행을 쌓아 새로운 천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노력하자는 것이다. 즉 忍苦鍛鍊이라는 것은 철과 같은 실행력을 가진 이것이 바로 황국신민교육의 眞髓였었다.
이와같은 내용의 조선인교육 3대강령은 결국 벌려놓은 전쟁을 수행하려는 기만적 속셈에서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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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載峻님의 댓글
김헌식 (69회) 동문=>6/27/2006 111주년 개교기념에 즈음한 게재 글 감사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최병수님의 댓글
대~ 한민국의 최초의 공립학교인 모교의 역사가 자랑스럽습니다. 자랑스런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여 웅비하는 새로운 인고의 시대를 만들어 나아갑시다.
李聖鉉님의 댓글
선배님 이런 글솜씨가? 대단하시네요.
金憲植(69회)님의 댓글
자랑스런 仁高의 뿌리이기에 朗聲의 111돌을 맞이하여 年表를 정리했을 뿐인데...,쑥스러구만 聖鉉 아우님!
이동열님의 댓글
홈피 전면에 이런글이 올라가야허는데,,,
안태문(80)님의 댓글
야구 도입지 알리는데 100년 걸렸습니다. 돈도 수월찮게 들어갔지만. 그 결과로 한국야구 100주년기념 최우수고교 초청대회대회 우승의 금자탑을 ...
고희처(74회)님의 댓글
자료실에 와보니 이런 귀한 모교역사도 일게 됩니다. 잘 보았습니다.
윤인문님의 댓글
이런 주옥같은 인고역사의 글을 이곳에 올리기엔 너무 아깝네요. 인천사랑-인천의역사에 관련 사진과 합께 올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헌식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윤휘철님의 댓글
우리 인고의 뿌리를 더 많은 동문들이 알게되었으면... 수고 많았습니다.
오윤제님의 댓글
111년의 세월에 비하면 短文같습니다. 과연 우리의 영원한 회장이십니다. 인고여 영원하라가 마음에 닿습니다. 헌식이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