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곳 : 인천일보(07.10.11)
신봉순 선생 9주기를 추모하며
지난 1998년 10월 10일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계절에 홀연히 세상을 하직한 신봉순 선생의 영전에 이 한편의 글월을 올립니다.
1997년 6월 4일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가 신봉순 선생님과 만나서 한 인터뷰는 저희 편찬위원회로서는 정말 크나큰 천운(天運)이었으며, 그 후 선생님의 가르침은 본 편찬위원회로서는 어둠 속의 횃불이었습니다.
선생께서는 6·25 조국수호(북은 조국해방) 전쟁이 터지기 전에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현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에서 물상을 가르치던 중 뜻한 바가 있어 교직을 사직하고 육군사관학교 제8기로 입교하여 임관했습니다.
1950년 12월 18일 이계송(인천상업중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2학년생) 연대장의 지휘로 인천을 출발해 부산으로 남하한 3천명 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은 1951년 1월 중순 부산에 도착했으나 당시 국가 비상사태로 갈 곳을 몰랐고 특히 100여명 여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해 하고 있을 때, 당시 부산의 육군통신학교에 장교(대위)로 근무하던 선생님과의 만남은 긴 가뭄 끝의 단비와도 같았습니다.
인천상업중학교 제자였던 이계송 인천학도의용대 연대장을 포함한 많은 제자들을 만나보고 부산 육군통신학교에 입대하게 하였고, 특히 전란의 와중에 조국과 고향 인천 수호를 위해 부산까지 남학생들과 같이 남하한 여학생들의 숙식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1·4 후퇴 이후 봄이 돼 인천 및 서울이 수복이 되자 여학생들을 고향 인천으로 무사히 보내 주셨습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고마움을 지금도 많은 여학생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현재는 75세의 할머니들입니다.)
선생과 본 편찬위원회 이경종(6·25 당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 수석편찬위원과 첫 만남은 1997년 5월 31일 부평 중앙회관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첫번째 인터뷰를 하기 위해 선생 댁을 본 편찬위원회에서 방문했습니다. 그 날 선생님께서 "6·25 사변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인천학도의용대의 애국정신은 우리 모두 그리고 자손 만대 기억하여야 하는 일"이라고 한 유지를 바탕으로 인천학생 6·25 참전사를 발굴, 기록하고 있고, 드디어 올해 선생님과 만난 지 10년 만에 인천학생 6·25 참전사 제1권을 발간했습니다.
그 후로도 선생님께서는 틈만 나시면 역사편찬의 진전이 어떤가 하시며 걱정해주었으며 육군본부 및 통신학교 등으로부터 자료를 수지해 알려주기를 여러번 하였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1998년 10월 9일 갑자기 선생께서 중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 수석편찬위원이 급히 중앙병원으로 찾아가니 선생님께서는 야윈 모습으로 입원실 침대 위에 누워 계셨습니다.
수석편찬위원은 선생님 곁으로 다가가 선생의 손을 꼭 잡고 쾌유를 빌었습니다. 그 때 선생님께 수석편찬위원이며 60년 전 인천상업중학교 제자인 이경종이 "선생님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라고 묻자, 선생께서는 제자의 얼굴을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손짓으로 글씨를 쓰는 시늉을 했습니다. 준비해 준 종이 위에 '학도의용대'라고 써 준 후 몇 시간 후인 1998년 10월 10일 0시 4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위원장과 수석편찬위원이 처음 만나던 날 1997년 6월 4일 선생께서 " 아~ 역시 인천학도의용대 애국정신 ! 그 혼이 살아 있었구나!" 한 감탄사와 함께 손을 꼭 잡아 주던 손길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저희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의 갈 길과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준 선생의 넋을 기립니다.
이규원인천학생6·25참전관 관장·치과원장
종이신문정보 : 20071011일자 1판 11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7-10-10 오후 7:5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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