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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아닌 이천 양원혁(109회),' 어디서든 잘하면 기회는 올 것'(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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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네이버스포츠(19. 2. 5)
[홍윤우의 아웃사이더]
호주 아닌 이천 양원혁,' 어디서든 잘하면 기회는 올 것'
이 중 유일하게 호주에 캠프를 꾸리는 LG 트윈스는 류중일 감독 및 코칭스태프 16명, 주장 김현수를 비롯한 선수 51명이다. 이는 구단 역대 최대 규모였다.
일정은 호주 블랙타운 캠프에서 1차 전훈을 실시 한 뒤 25일부터는 일본 오키나와로 이동, 삼성. KIA 등과 연습경기를 통해 실전 감각을 끌어 올릴 계획이다.
호주행 비행기에 오른 선수 중엔 투수가 25명으로 절반이며 포수 5명, 내야수 13명, 외야수 8명이다.
신인은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한 대졸 우완 이정용, 서울고 출신 사이드암 정우영 2명이며 군 입대로 잠시 떠나 있던 홍창기, 김호은도 호주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
또한 타 팀에서 방출되었다가 부름을 받은 심수창, 이성우, 김정후, 양종민, 전민수도 포함되어 눈길을 모은다.
무려 50명이 넘는 선수가 떠났지만 부상이나 재활 등으로 남는 경우 이외에도 국내에 남아 있는 이들도 제법 있다.
양원혁(LG.내야수)은 1월 중순 구단 매니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캠프 명단 변동 사항에 대한 내용이었다.
“원래 출국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발표 전 개별적으로 미리 통보를 해주거든요. 저도 가는 걸로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제외됐다면서요. 너무 아쉽고 속상합니다.”
애당초 처음부터 제외가 되어 있었다면 그런가 보다 했을 텐데 한껏 기대가 커진 상황이라 실망감은 몇 배 더 크고 깊을 만 했다.
양원혁은 오랜만에 만난 기자에게 속상한 마음을 숨기진 않았지만 이내 밝은 표정으로 근황을 전했다.
“뭐 이런 저런 경험이 워낙 많다 보니 그러려니 해야죠. 세상에 쉽게 얻어지는 건 없다는 걸 매번 느꼈거든요. 어떤 식으로든 기회가 오겠죠. 아! 저 며칠 전 이사했어요. 이천 숙소에서 나와야 해서 잠실 쪽을 알아봤는데 집값이 너무 비싸서 구리 쪽으로 정했어요(웃음). 혼자 사는 건 처음이라 설레기도 하고 뭔가 책임감도 느껴지고 그래요(웃음).”
▶대졸 연습생으로 2014년 입단
어느새 프로 6년차
인천고-인하대 출신으로 우투좌타 내야수 양원혁은 2014년 육성선수로 LG 입단, 2015년 5월 22일 1군의 부름을 받아 사직 롯데전 대타로 데뷔전을 치렀다. 그 해 1군 성적은 3경기 출전 2타수 1안타 1타점.
이후 경찰야구단 소속으로 뛰던 2016년엔 서산 한화전에서 퓨처스리그 통산 24번째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다시 팀에 복귀한 지난해엔 허벅지 부상으로 빠진 정주현을 대신해 8월 9일 1군 부름을 받아 삼성 전에서 9번 타자 겸 2루수로 생애 첫 선발 출전을 했다. 기록은 2타수 무안타 1볼넷.
이후 간간히 모습을 보이며 총 7경기 출전 5타수 2안타 3득점이 그의 2018시즌 1군 성적의 전부다.
입단 5년 동안의 1군 통산 타율이 7타수 3안타 타율 4할 2푼 9리로 2군 기록에 비해 더 낫다.
“경찰 전역하고 돌아왔을 땐 내 삶이 엄청 바뀔 거라 생각했어요. 2년간 나름 열심히 했으니까 인정을 받을 일만 남았다 기대에 한껏 부풀었죠. 그런데 그건 착각 이었어요.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하면서 1군 진입 시기가 불투명했죠. 그나마 (정)주현이 형이 아파서 가능 했던 거니까 솔직히 말하면 내 실력으로 올라간 건 아니죠.”
양원혁은 3년 만에 올라간 1군 무대의 아찔한 경험을 언급했다.
“그 날 잠실 삼성전 8회 때 번트 타구에 대한 제 대처가 늦어진 바랑에 안타로 처리가 되고 말았어요. 늘 연습해 온 수비 포메이션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죠. 그것이 도화선이 되면서 8연패 사슬을 끊지 못했어요. 제가 내세울 수 있는 건 수비인데 그걸 증명해 보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습니다.”
생애 첫 선발 출전의 기쁨을 누릴 사이도 없이 팬들의 원망을 들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TV를 통해 플레이 한 것이 보여지다 보니 후폭풍가 엄청 나더군요. 욕도 많이 먹고(웃음). 그런데 그 날 (강)승호로 부터 문자가 왔어요. 너무 기죽지 말라면서 몇 번 그런 거 겪다 보면 덤덤해지고 신경 쓰이지 않게 된다면서요(웃음). 팀 옮기고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자기 꺼 하기도 바쁠 텐데 연락도 주고 너무 고맙더군요.”
강승호는 7월 31일 문광은과 1대 1 트레이드로 SK로 이적한 내야수.
양원혁은 자신보다 3살 어린 고졸 선수지만 항상 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을 아끼지 않는 좋은 후배라며 이적 후 맹활약을 펼친 것이 마치 내 일 인냥 기쁘고 뿌듯하다고 했다.
“같은 내야수다 보니 팀에선 어쩔 수 없는 경쟁자였죠. 하지만 다른 팀에 가고 보니 진심으로 잘 했음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런데 솔직히 후배 걱정 할 때가 아니죠. 제 나이 벌써 우리나이로 스물 아홉인데...”
양원혁은 후배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내비치다 결국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며 허탈한 미소를 머금었다.
연습생 신분으로 프로의 발을 디딘 지 올해로 6년 차. 중간에 군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 다행이긴 하지만 그의 이름 석 자를 아는 팬들은 많지 않다는 점을 상기하면 심기일전이 필요한 시기다.
▶ 가족 반대 무릅쓰고 시작한 야구
내야를 벗어나지 않은 것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양원혁은 작년까지 NC 타격코치로 활동한 양승관(60)씨의 장남으로 야구인 2세다.
아버지 양승관은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 태평양 돌핀스, LG 트윈스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2001년 은퇴 이후 현대 유니콘스를 시작으로 여러 프로 팀의 코치를 역임했으며 2012년부터 지난 시즌까지 NC 코칭스태프로 활동했다.
“아버지요? 요즘은 쉬고 계십니다. 거의 16년 정도를 한 시즌도 쉬지 않고 달려만 오셨거든요. 적절한 타이밍에 잘 된 것 같아요. 어머니가 너무 좋아 하시죠. 제 2의 신혼생활을 하고 계십니다(웃음)”
부모님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표정엔 생기가 넘쳤다.
“남동생도 있는데 나름 바빠서 저희 가족이 다 흩어져 지냈죠. 그러다 보니 가족끼리 식사 한 번 모여서 하기 힘들었는데 작년엔 그래도 자주 만나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랬어요.”
양원혁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어머니가 울면서 반대 하셨죠.아버지 한 명만으로 족하다고(웃음). 그런데 제가 고집을 꺾지 못하셨죠. 대신 조건이 있었어요. 일반 학생만큼 공부는 다 하는 걸로(웃음) 처음엔 약속을 지켰는데 중학교 입학 한 이후부터는 수업을 빠지게 되면서 진도를 따라가기 벅차더군요. 어쩔 수 없이 포기를 할 수 밖에 없었죠. 그런데 영어만은 과외를 했죠. 어머니의 뜻이었어요.”
아버지는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지만 단 하나 만은 반드시 숙지하라 당부했다. 바로 수비 자리였다.
“어릴 때도 키가 작긴 했지만 어깨가 강해 볼이 빠른 편이었거든요. 그래서 투수로도 뛰었죠. 하지만 유격수가 제 원래 위치였죠. 대학 때 (이)성규가 입학하면서 제가 2루로 옮기기 전까진 쭉 유격수였어요. 아버지께서 내야 밖으로는 밀려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대학 다닐 때 까지만 해도 그 이유를 몰랐는데 프로에 들어와 알게 됐죠.”
어느 포지션이나 선수는 넘쳐난다. 경쟁을 통해 자기 자리 확보가 가능하다. 외야에 비해 내야 자원은 한정적이다. 내야에서 외야로 밀려나는 경우는 흔하지만 외야수가 내야 수비를 맡기는 불가능하다.
“아버지가 외야수 출신이라 더 절실하게 느끼셨던 거 같아요. 다행히 지금까지 외야로 밀려나지 않고 제 자리에서 뛰고 있는 것이 다행이죠. 그런데 내야도 엄청 치열해요. (강)승호가 빠졌는데도 말이죠. (양)종민이 형까지 오고...”
▶ 단신 콤플렉스, 나만의 장점으로 승화
발버둥치기 보단 편한 마음으로
프로필에는 174로 적혀있다. 하지만 원래 양원혁의 키는 172cm. 요즘 어린 선수들의 체격을 떠올리면 중학생 정도다.
“최소한 아버지만큼은 클 줄 알았는데(웃음). 학창시절 아프거나 재활을 하는 친구들이 몇 달 쉬면서 몰라보게 키가 큰 경우를 많이 봤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아픈 적이 없어서 길게 쉰 적이 없어요. 그때 좀 아팠어야 했는데.....”
양원혁은 일반인에 비해 체격도 왜소한 것에 대해 ‘살을 찌우려고 많이 먹다 역류성 식도염을 걸려 혼쭐이 난 적이 있다’ 며 자기에게 어울리는 체격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체력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프로 생활을 하면서 적응이 됐고 수비도 키가 작다고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해요. 보폭이나 팔 길이를 자기 나름대로 조절 가능하니까. 문제는 파워인데 그걸 보완하기 위해 올 겨울 웨이트도 많이 하고 배트 스피드를 끌어올리기 위해 연습 많이 했습니다.”
경찰야구단 소속 시절 매일 폼을 바꿔가며 타격의 메카니즘도 고민하고 과감한 시도를 통해 나만의 타법 연구했다.
물론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실패도 경험하고 큰 성과를 얻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아버지가 타격코치였지만 평소 제게 뭔가를 알려주시거나 바꾸려 하진 않으셨어요. 방망이를 잡고 있는 본인만이 느낄 수 있는 뭔가는 누가 아무리 설명해줘도 한계가 있는 거 같아요. 코치님들이 강조하시는 부분이 다 다르다 보니 아버지는 크게 관여 하지 않으시고 지켜보시는 편입니다.”
양원혁은 ‘수비형 선수’라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타격보다는 수비 혹은 대주자로서의 활용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자기 몫'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1군에서 한 자리를 꿰차는 것이 목표고 꿈이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죠.(정)주현이 형도 있고 (윤)진호 형도 있고 (박)지규도 있고 (양)종민이 형도 있고 (장)시윤이도 잘하고 정말 첩첩산중이죠. 그나마 마무리캠프에 따라가서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거 다 보여드렸다는 것에 위안을 삼고 있어요.”
양원혁은 2014년 자신과 함께 연습생으로 입단한 5명은 모두 운동을 관둔 상태라며 웃었다. 그 속에서 살아남아 지금까지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출발부터 힘들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쉽게 얻어진 건 없었어요. 왜 이것 밖에 될 수 없나 수없이 실망도 많이 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하지만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졌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조바심 내며 하루하루를 살았어요. 하지만 올해는 그러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음 비우고 편하게 내 플레이를 하고 싶어요. 발버둥 친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거죠.”
지난해 10월 29일부터 11월 26일까지 일본 고치에서 진행된 마무리 훈련에서 그는 주장을 맡아 선수단을 이끌었다.
물론 한시적이었지만 책임의식과 존재감을 깨달으며 배운 것이 많다고 털어놨다.
“제 실력에 비해 팬분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셔서 늘 고맙고 큰 힘이 됩니다. 1군 캠프에 대한 아쉬움이 큽니다. 하지만 이천에서 운동하고 있다고 해서 실망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든 출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때를 기다릴 겁니다.”
기사제공 홍기자 칼럼
2019.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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