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중계석
장명부(중)-낙엽은 가을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본문
한국무대에 나타난 장명부의 위력은 기록으로 남아있듯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계약금은 2천5백만엔, 당시의 환율대로 환산하면 한국돈 약 7천5백만원, 연봉까지 합치면 1억을 웃도는 금액으로 당시 최고연봉선수였던 박철순의 연봉이 3천만원을 넘지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일본에서 장명부는 사이드암투수로 분류되었으나 당시 한국에서는 그런 구속이나 위력을 보이는 사이드암투수는 상상도 못할 시절이었으므로 대략 스리쿼터 정도로 애써 분류하는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아직 삼미와 계약을 하기전 일본에 전지훈련차 방문한 삼성캠프에 나타나 배팅볼을 던진 것이나 시즌전 시범경기에서 극히 부진한 성적으로 일관하면서 한국의 타자들의 분석을 끝낸 장명부는 시즌시작과 함께 놀라운 페이스로 승수를 거두면서 한국리그를 초토화시킵니다...
한팀의 시즌 총경기수 100경기이던 시절... 그중에 60경기에 등판해서 30승 16패 6세이브...
무려 427이닝을 던졌으며 삼진을 220개나 잡아냈고 그러면서도 방어율이 2.34...
물론 선발로만 거둔 30승은 아니지만 이 30승과 427이닝등판은 현대야구에서는 절대로 깨질 수 없는 기록입니다....
다만 이 30승이라는 기록이 삼미 팀내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장명부의 의도적으로 이뤄낸(이를테면 다른 투수들의 승리를 가로채기도 하는...) 기록이라는 느낌이 다분한데 그이유는 뒤에 알려지지만 삼미 허형사장의 추가보너스 1억이 약속된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허사장은 30승이 절대로 이룰 수 있는 기록이 아니라고 생각돼 농담삼아 말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 구두약속을 장명부는 무리를 하면서까지 기어이 달성해 버렸다는게 비극의 시작입니다...
차라리 농담삼아 한 약속이 아니라 진짜로 추가 인센티브의 의도가 있는 약속이었다면 허사장은 30승을 걸것이 아니라 팀의 우승을 조건으로 내세웠다면 83년 당해는 물론 그 이후에도 한국프로야구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아무튼 상징적인 의미가 아닌 실제 30승이 실현되었고 알려진대로 보너스는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알려지지않은 얼마간의 액수가 허사장의 사비로 지급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의 약속불이행을 한국야구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으로 확대해서 받아들였던 장명부는 이듬해부터 무리에 따른 후유증과 함께 의욕상실로 다시는 첫해 보여준 괴물같은 성적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이듬해 13승... 3년째 11승에 역시 기록적인 25패...
3년째가 되던 85년에 소속팀인 삼미는 청보로 매각이 되고 86년 리그부터 허구연이라는 젊고 참신한 지도자를 영입했던 청보는 팀분위기 쇄신을 위해 장명부와 재계약을 하지 않게 됩니다...
당초 허구연감독은 팀의 빈약한 투수진을 염려해 에이스로서나 투수코치로서(이미 84년부터 장명부는 삼미에서 투수코치를 겸임하고 있었습니다...) 장명부가 필요했으나, 당시 그는 국내에 외국인만 출입이 가능했던 카지노에서 억대연봉을 탕진하면서 무일푼인 신세로 사생활 측면에서 거둬들이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희망이 되었던 팀이 86년부터 리그에 참여하기로 되었던 신생 빙그레이글스...
빙그레 역시 투수부족으로 장명부같은 투수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라 그를 영입했는데, 영입자체는 한번 해볼만한 시도였지만 장명부의 신출귀몰한 협상능력에 말려들면서 2년치 연봉을 선급으로 지급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빙그레에서의 성적은 어처구니없게도 1승 18패... 계약기간인 2년을 채우지도 못한채 1년만에 방출되면서 일본에서의 14년 한국에서 4년간의 그의 선수생활은 종지부를 찍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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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현님의 댓글
<font color=red>BLESS OF BLOOD FOR HOME BY BASEBALL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