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중계석
장명부(하)---낙엽은 가을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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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부와 동시대 혹은 후에 한국으로 건너온 대개의 교포선수들이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끝내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그는 은퇴이후에도 계속 한국에서 호구지책을 모색합니다...
은퇴와 함께 여러팀에서 그의 투수조련능력을 높이사 투수코치로 영입할 것을 검토했지만 역시 그의 사생활이 문제가 되어 계약을 망설이자, 그는 고교선수들을 지도한다면서 전국을 일주하는 또한번의 기행을 보여줍니다...
개인사업으로 야구계를 오랜기간 떠나있던 이유로 쉽게 야구계의 주류로 흡수되지 못하고 외곽을 겉돌고있던 왕년의 명투수 김소식, 그리고 빙그레에서 인연을 맺은 성낙수 등과 팀을 이뤄 아마야구 선수들을 지도하는 모습이 매스컴에 비춰졌고 이후에는 서울고에 정착하면서 투수들을 지도하는데, 여기서 그의 지도를 받았던 선수중에 한명이 87년 당시 서울고 2학년에 재학중이던 이상훈입니다...
물론 이러한 활동은 프로출신이 아마의 지도자로 있을 수 없다는 야구협회의 항의로 곧 그만두게 됩니다...
88년이 되서야 비로소 삼성의 투수코치, 그것도 정식명칭은 인스트럭터로 스카웃되어 겨우 그가 원하던 일자리를 얻게되지만 역시 금전적인 문제로 89년초에 계약이 해지되었고, 90년에 다시 롯데의 정식 투수코치로 임명됩니다...
당시 롯데의 신임감독이 삼미시절에 인연을 맺었던 김진영씨로 90년 시즌이 끝난뒤 부진한 성적으로 김진영감독이 해고되자 장명부코치 역시 동반 해임되고 맙니다...
일본에 있던 가족들이 귀국을 종용했음에도 계속 한국생활을 고집해 왔던 장명부는 91년 5월 성낙수, 박찬 등과 함께 마약복용 사실이 적발되어 야구계에서 영구제명되어 더이상은 한국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됩니다...
그후 일본에서 택시운전 혹은 막일을 한다는 소식이 들릴뿐, 주동식을 주축으로 하는 초창기 재일교포들의 모임에도 연락을 끊으면서 세간에서 잊혀져 가다가...
2005년초 정말 느닷없이 그가 운영했었다고 알려진 마작업소에서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와 함께 새삼 주목을 받은 바 있습니다....
짧으나마 한국야구에서 그가 성공한 비결은 물론 145대의 속구와 변화무쌍한 변화구를 적절히 섞어던지는 구위 자체도 위력적이었지만, 당시 국내투수들이 쉽게 던지지 못하던 몸쪽볼을 그는 조금도 거침없이 던져댔고 또 승부를 위해서라면 빈볼도 마다않는 냉철함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 상대하는 타자의 타격능력 혹은 주자의 상황, 점수차에 따라 공에 위력을 달리해서 던지는 조절능력도 당시에는 생소한 광경이었고, 주자견제나 투수수비, 타구가 날라간 이후의 백업위치 등 초창기 한국야구에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절대적으로 보고 배워야할 교과서라고 해도 무방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의 지도를 받고 실력향상을 보인 투수들이 여럿 있었고, 또 지켜보던 당시의 많은 지도자들의 말을 빌리면 투수코치로서의 그의 능력도 당대의 국내코치들보다 한수 위였다는게 중론입니다....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정확한 의미조차 알 수 없는 쓸쓸한 문구의 이글은 장명부의 업소사무실에 붙여져 있던 구절이라고 합니다...
위의 문구처럼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쓸쓸한 이방인이었던 그의 인생을 돌아보면 비록 트러블메이커로 낙인찍힌채 양국의 야구계에서 버림받았던 그였지만, 한국야구에 이룩한 지대한 업적을 감안해 이제라도 복권과 함께 그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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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현님의 댓글
<font color=red>BLESS OF BLOOD FOR HOME BY BASEBALL NEWS!!!!!!!!!!!!!!!
김성수님의 댓글
그는 한때(91년)천안북일고 무보수 투수인스트럭터도 했었죠
최병수님의 댓글
秋의 사나이 - 장명부 : 한국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대역사의 주인공. 그러나, 결국 무수히 너무 힘들었던 인생을 등지고 쓸쓸히 가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