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강한 부대란 기세가 올랐을 때 적을 섬멸할 능력을 가진 쪽 보다는 곤란한 지경에서도 무너져 내리지 않고 끝까지 대오를 유지하는 쪽을 말한다.
전쟁이란 하루 이틀로 끝나지 않는 법인지라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고 할 만큼 지기를 밥 먹듯 하고도 끝내 무너지지 않은 전열로 최후의 일전에 나서는 부대야말로 승리의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삼미 슈퍼스타즈는 분명 형편없는 약팀이었다. 많이 져서가 아니라 맥없이 졌기 때문이다. 질 때마다 분해서 이를 갈며 다음을 기다리기보다는 도대체 이놈의 경기는 언제나 끝이 나나 한숨 푹푹 쉬는 표정으로 글러브질을 해댔기 때문이다.
물론 선수층이 워낙 빈약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조건 자체가 그랬다. 프로 야구 원년 각 팀은 연고지 출신 선수들을 무한정 선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대구·경북 출신 선수들은 모두 삼성 라이온즈로, 광주·호남 출신 선수들은 모두 해태 타이거즈로 갔다. (서울 출신 선수들만 MBC청룡과 OB베어스가 순번을 정해 2:1로 나눠 가졌다)
말하자면, 원년의 프로야구는 일종의 지역대항전이었다.
그러다보니 해당 지역에 야구 명문고등학교를 많이 보유한 팀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고, 그렇지 못한 쪽은 신음을 흘렸다. 인천이 그랬다. 서구문물이 들어서는 관문이어서 미국 태생의 야구 역시 인천에서 먼저 시작되고 꽃을 피웠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빛은 서울로, 대구로, 부산으로, 그리고 광주로 옮겨갔다. 그나마 유망주들이 가까운 서울로 흡수되면서 인천의 야구자원은 말라갔다.
프로야구가 출범하던 1980년대 초 왕년의 야구도시라는 자존심은 여전했지만 인천출신 선수들을 닥닥 긁어모아도 그럴듯한 팀 하나가 꾸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1950년대 아시아를 대표했던 홈런타자 박현식은 슈퍼스타즈의 감독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도 ‘도저히 가망 없는 팀’이라는 이유로 내내 고사하다가 인천야구가 감독 없이 출발하는 망신을 당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협박(?)에 밀려 승낙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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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 시절의 양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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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espn | 그러나 그나마 슈퍼스타즈가 첫 해 80경기에서 올린 15번의 승리도 상대팀이 거저 던져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국가대표 출신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프로야구 대구 개막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5-3으로 꺾고 상쾌한 출발을 했던 팀이 슈퍼스타즈이기도 했다.
위안삼아, 놀림삼아 불려지던 ‘도깨비팀’이란 이름이 말해주는 것은 짧더라도 치명적인 비수 하나는 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무너지기 시작할 때 한 발 물러선 어디쯤에선가 깃발을 다시 세우고 패잔병들을 수습해 반격을 준비해줄 존재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삼미는 초반에 몇 점 넣으면 얼굴이 활짝 펴져서 곧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날아오르다가 다시 역습을 당해 쫒기기 시작하면 이미 긴장해 숨이 턱턱 막히는 기운이 관중석까지 전해지곤 했다.
그러다가 다시 동점을 허용하고, 역전이 되면 ‘아무렴, 그렇지’ 하고 주저앉는 흐름이 악몽처럼 되풀이됐다.
슈퍼스타즈는 드물게 올라탔던 기세도 흔들리다 놓치기 일쑤였고, 상대팀은 초반에 난조를 겪다가도 곧 수습해서 반격했다. 인천의 야구팬들은 그 성적에 앞서 맥없는 경기에 분노했다.
슈퍼스타즈에게 부족한 것은 국가대표급의 실력 이전에 국가대표급의 경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형편없는 약팀에 영웅이 하나 있었다면 양승관을 꼽을 수 있다. 역사적인 웃음거리로 남은 대실패를 막을 힘은 그에게도 없었다. 그러나 그나마 그들이 거뒀던 15승의 대부분은 양승관에 의해 가능했기 때문이다.
양승관은 원년 타율 0.269에 홈런 8개를 때렸다. 평범하다. 아니, 조금 빠진다. 그러나 따져 보자면 그의 성적은 최강팀 삼성 라이온즈의 4번 타자 이만수가 기록했던 0.289, 13홈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극심한 전력차가 있던 당시 이만수는 자기 팀의 우수한 투수들은 모두 피해갈 수 있었던 동시에 주기적으로 ‘만만한’ 삼미 투수들을 두들겨 타율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양승관은 자기 팀을 제외한 상위 5개팀의 우수한 투수들을 모두 상대해야 했던 동시에 빈약한 팀타선 때문에 집중견제마저 받아야 했다. 원년 삼성의 팀 방어율은 2.70, 삼미의 팀 방어율은 무려 6.23이었다.
굳이 따져보자면 삼미를 제외한 5개팀의 평균방어율은 3.43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삼성을 제외하고 삼미를 대신 넣어보면 수치가 무려 4.13으로 올라간다.
말하자면 삼미 타자들은 시즌 내내 방어율 3.43짜리 투수와 상대한 반면, 삼성 타자들은 4.13짜리 투수와 상대한 셈이다.
게다가 누구 하나 열심히 해보겠다는 의지마저 말라버린 팀에서 텅빈 관중석을 보며 방망이를 휘둘렀던 선수의 성적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어쨌거나 양승관의 타순은, 쉽게 1승 챙겨보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상대팀 투수가 긴장해야 했던 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 집중견제를 뚫고 날린 역전홈런 한 방, 아니 대개는 완봉패를 면해주는 홈런이거나 퍼펙트 게임에 재를 뿌리는 안타 하나가 덕아웃에서 땀을 훔치고 있던 동료들의 가슴에 작은 불꽃을 살려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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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양승관과 영화 속의 양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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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배우 김혁 블로그 | 특히 그의 진정한 가치는 공격보다도 수비에서 나타났다. 경기 시작전 연습 때 양승관은 타석에 서서 공을 손으로 던져 펜스를 넘기곤 했다. 무시무시한 어깨였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는 외야 어느 위치에서든 공을 잡기만 하면 직접 홈이나 2루로 연결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안타 하나 건졌다고 실실대며 내쳐 달리던 상대타자는 어느 순간 송구된 공에 태그당하며 어리둥절해하곤 했다.
1루수와 2루수 사이로 타구를 보내놓고 여유를 부리던 원년 도루왕 김일권은 우익수 양승관이 주워 던진 공보다도 늦게 1루에 도착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전설로 남은 ‘우익수 앞 땅볼아웃’ 사건이었다.
그는 막강한 적들에게 마지막 한 걸음을 허용하지 않는 자존심이었고, 나약한 동료들에게 불끈 한 줄기 힘을 주는 횃불이었다. 그리고 그런 존재를 우리는 감히 영웅이라고, 혹은 슈퍼스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대개 한 사람이 역사의 물줄기를 돌릴 수는 없다. 그리고 대개는, 한 명의 선수가 승패와 강약을 결정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타에게 열광하고, 그들의 눈빛과 몸짓을 기억한다.
그것은 대중의 꿈과 좌절과 안타까움이 그의 눈빛 하나 몸짓 하나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역시나 대패한 경기를 관전하고 나서던 팬들은 인천 숭의동 공설운동장 후문에 세워진 선수단 버스에 분풀이를 하고서라도 뱉어내는 ‘양승관은 잘 하더라’는 푸념 한 줄기가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됐다.
그 순간 양승관은 그대로 팬들과 한 몸이었다.
더구나 인천 밖이었다면 드러내놓고 응원하지도 못했던 슈퍼스타즈의 팬들에게 양승관은 ‘우리끼리만 아는’ 은밀한 영웅이었다. 너무 허약한 팀이었기에 미처 기억할 수 없었던, 그러나 꼭 기억해둘 가치가 있는 빛나는 한 명의 야구선수가 바로 양승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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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관 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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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 와이번스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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