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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2월 SK와이번스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김홍집 영입 관련 게시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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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식 |
| 11시즌 동안 통산 29승을 기록한 평범한 투수를, 그것도 이미 은퇴를 결심한 30대 중반의 투수를 영입해달라는 팬들의 '간청'이 백 수십 개나 구단 게시판에 줄을 잇는 것은 분명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구단이 그런 팬들의 간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입단 테스트나마 치러야 했다면 더욱 그렇다. 그 투수는 유별난 야구팬이 아니라면 기억하지 못할 김홍집이라는 투수였고, 그 구단은 SK 와이번스였다. 2004년 2월의 일이다.
그 때 최고령 등판 기록을 바꿔가며 만만치 않은 활약을 해주던 왼손 계투요원 '가을 까치' 김정수의 은퇴가 결정되자 인천 팬들은 일제히 김홍집으로 그 자리를 메워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리고 그 성화에 못이긴 구단은 물론 이미 은퇴를 결심했던 김홍집 마저 은퇴를 미루고 '입단테스트'를 치러야 했다. 뜻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닌지라 실제 입단은 무산됐지만 야구팬들 사이에 입소문으로 전해지던 작은 신화였다.
신인이되, 신인일 수 없었던 시절
인천고 출신으로 국가대표를 지내며 구대성, 이상훈과 더불어 '좌완 빅3'로 불리던 김홍집이 프로에 뛰어든 것은 93년이었다. '투수왕국'을 설계하고 있던 '만년 꼴찌' 태평양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억대의 계약금을 김홍집에게 쥐어주었고 그는 곧장 우완 정민태와 짝을 이룰 좌완 에이스로 낙점을 받았다.
그 둘에 4년 연속 10승대를 달린 잠수함 박정현과 꾸준히 2점대 평균자책점을 유지해온 특급좌완 최창호가 부상을 털고 일어선다면 특급 마무리 정명원까지 이어지는 최강의 마운드로 손색이 없을 구성이었다.
그러나 돌림병이라도 되는 듯 라인업을 휩쓸어버린 줄부상 탓에 그 해 태평양 마운드는 내내 '왕국'이 아닌 '병동'으로 불리었고 몇 시즌 반짝 하던 '미풍'마저 잠들어버린 채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들어야 했다. 그 해 태평양은 10승 투수를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가운데 3할을 간신히 넘긴 승률로 꼴찌에 머물러야 했다.
그 시즌 인천 팬들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는 김홍집이었다.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선발등판을 해준 투수가 그였고, 태평양 선수들 중 유일하게 개인기록 랭킹(탈삼진부문)에 꾸준히 이름을 올려주던 이가 그였기 때문이다. 특히 무려 16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13이닝을 완투해 연패 끝의 1승을 올려냈던 6월 20일 인천 홈경기는 그의 존재를 인천 팬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사건이었다.
지켜줄 그늘 없이 자란 아이들이 조숙하듯 선배들이 없는 사이 마운드를 홀로 지켜야 했던 신인 김홍집도 미숙한 모습을 보일 틈이 없었다. 인천 팬들의 기억 속에 그는 차근차근 성장하며 팀의 미래를 보여주는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홀연히 나타나 망가질 대로 망가진 팀을 혼자 힘으로 밀고 끌며 몸부림치는 영웅이었다.
1994년, 돌아온 선수들 마운드를 접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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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집 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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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유니콘스 홈페이지 | 김홍집은 아마추어 시절 이상훈보다 한 수 위로 대접받던 선수였다. 무엇보다 왼손 투수로는 보기 드문 140km대 중반의 빠른 공을 가지고 있었기에 프로 무대에서도 그의 공을 쉽게 때려낼 수 있는 타자는 많지 않았다.
그는 첫 해 부상으로 시즌을 접었던 7월 말까지 116이닝을 던지면서 3.64의 무난한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허약한 타선 탓에 그 시즌 김홍집이 거둔 성적은 7승에 불과했다(그나마 그가 팀 내 최다승이었다).
태평양 돌핀스가 투수왕국으로 재건된 것은 부상선수들이 일제히 돌아온 94년이었다. 그 해 김홍집을 비롯해 최창호, 최상덕, 안병원 네 명의 선발투수가 두 자리 수 승리를 올렸고 마무리 정명원은 최초로 40세이브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전성기 구위를 되찾은 정민태까지 합친다면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최상의 진용이 구축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난해 꼴찌 팀을 그리고 여전히 팀 타율 꼴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팀을 1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키는 기적을 연출해냈다.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은 김홍집의 몫이었다. 그 해 김홍집은 12승을 올리며 승률왕에 올랐다.
어쩌면 94년의 돌핀스는 한국 야구사상 가장 투타의 균형이 어긋나 있던 그래서 투수력의 일방적인 힘에 의존하던 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팀 LG 트윈스의 전력은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으로 이어지는 신인트리오의 1, 2, 3번에서 한대화로 이어지는 타선이 돌핀스를 압도한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여기에 이상훈, 김태원, 정삼흠이 나란히 15승 이상을 올린 선발진으로부터 차동철, 차명석, 김기범이 구축한 사상 최강의 계투진에 이어 '늘푸른 소나무' 김용수가 지키는 단단한 마무리까지 조금도 밀릴 것 없는 마운드였다. 트윈스의 1차전 선발은 18승의 다승왕 이상훈이었다.
그 해 LG와 태평양 사이에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물론 정규리그 1, 2위 팀 사이의 당연한 긴장감이기도 했지만 몇몇 선수들 사이의 묘한 경쟁의식도 섞여 있었다. 예컨대 프로무대의 깜짝 스타 서용빈, 이상훈과 아마추어 시절 그들보다 한 수 위였던 이숭용, 김홍집의 경쟁심이 그랬다.
특히 그 해 김홍집은 언론의 주목을 이상훈에게 빼앗기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팀의 전력 차 때문이라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래서 각각 다승왕과 승률왕을 차지한 채 마주한 한국시리즈 1차전은 프로 2년차 이상훈과 김홍집의 프로무대 라이벌전의 한 고비였다.
신들린 듯 던졌으나, 마지막 '끝내기홈런'에 그만...
경기는 팽팽한 투수전이었다. 그러나 더 빛난 것은 김홍집 쪽이었다. 비록 3회에 서용빈에게 불운한 2루타를 맞는 바람에 한 점을 내주긴 했지만 간혹 주자를 내보내며 위태롭게 무실점을 이어간 이상훈보다도 단단해보였다. 그리고 7회에 하득인의 적시타로 한 점을 만회해 동점을 만들자 돌핀스 응원석은 절정으로 달아올랐고 그 기운을 받아 김홍집도 다시 공 서너 개로 한 타자씩을 돌려세우는 경쾌한 삼자범퇴행진을 계속했다.
8회 초 위태롭게 버티던 이상훈이 1사 1, 3루에 주자를 남겨놓은 채 물러났을 때 인천팬들의 흥분은 절정에 올랐다. 타자는 돌핀스의 간판 김동기. 안타 한 개 아니 웬만한 외야 플라이나 깊숙한 내야 땅볼 한 개면 한국시리즈 첫 승이 가능한 순간이었다.
한국야구의 발상지라는 자존심은 이미 오래 전에 무너진 채 오히려 전설적인 패배와 꼴찌의 기록들을 거듭 바꾸고 깨뜨리며 끝없이 곤두박질쳐 온 13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만년 꼴찌 돌핀스가 최강팀 트윈스의 최강선발 이상훈을 밀어붙여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남의 일로만 여기며 부러워하던 한국시리즈 우승컵이 현실의 영역으로 한 발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마운드에 올라선 김용수는 김동기를 병살타로 처리했고 원정 응원석의 분위기는 일순 얼어붙어버렸다. 병살타만 아니면 무엇이 나와도 좋았을 순간에 거짓말처럼 튀어나온 병살타. 그리고 홈 응원석의 득의만만한 환호 속에 당당하게 물러나는 김용수의 뒷모습. 어쩌면 오늘까지도 인천 팬들의 가슴에 사무친 LG 트윈스에 대한 적개심은 그 짧은 순간에 그려진 것일지도 모른다.
위기 뒤에 기회가, 기회 뒤에 위기가 온다는 금언이 가장 높은 확률로 확인되는 곳이 바로 야구장이다. 기회를 잃고 맥이 풀려버린 쪽과 위기를 넘기고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은 쪽이 자리를 바꾸어 곧바로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큰 경기 경험이 없는 돌핀스 선수들은 눈에 띄게 기가 죽어 있었다. 반대로 '신바람'을 깃발 삼아 휘두르던 트윈스의 노련한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박수를 치고 고함을 지르며 승세를 돋우고 있었다.
그 위태로운 순간에 다시 들어선 김홍집은 8회, 9회 그리고 10회 오히려 독이 오른 듯 송곳 같은 직구들을 구석구석 찔러 넣었다. 오히려 구속은 초반보다도 빨라지고 있었고 아웃카운트가 늘어가는 속도도 이전보다 빨라졌다.
'신들린 듯' 던진다는 것이 꼭 그랬다. 동료들의 한숨도, 적진의 환호도 아랑곳없었다. 어찌 되었든 내가 다 잡아버리면 될 것 아니냐는 듯한 독한 결의가 느껴지는 혼신의 투구였다. 그렇게 결정적일 듯 보였던 트윈스의 기세는 이번에는 김홍집의 구위에 눌려 흩어져갔다.
11회 말. 해설자는 정명원이 올라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다시 덕아웃을 나서 걸어나온 것은 또다시 김홍집이었다. 상대 팀에서는 이상훈과 차동철을 이어 나온 김용수도 이미 2이닝 넘게 던지고 '한계'를 운운하던 시점이었다.
돌핀스 응원석에서는 '김홍집'을 연호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트윈스 응원석에서는 침통한 한숨이 흘렀다. 도저히 저 공을 때려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김홍집은 또다시 군더더기 없이 공격적인 투구를 계속했고 순식간에 아웃카운트를 표시하는 전구 하나가 켜졌다.
1사 후에 타석에 선 것은 6번 대타 김선진이었다. 공교롭게도 돌핀스에서 훈련생으로 뛰다가 방출된 적이 있는 그는 트윈스에서 1군 엔트리에 진입하긴 했지만 안타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선수였다. 트윈스 팬들은 11회와 8, 9, 1번으로 마무리될 12회를 지나 2, 3, 4번으로 이어질 13회가 마지막 기회가 될 것으로 손꼽고 있었다. 그렇게 양쪽 관중석 역시 김홍집이 그려낸 3자 범퇴의 리듬에 젖어들어 있었다. 어쩌면 김선진이 타석에 들어선 그 순간은 그 경기 중 가장 긴장이 풀어져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예사롭지 않은 타격음이 들렸다. 김홍집이 김선진에게 던지는 1구 그리고 그 경기 141구가 김선진의 방망이를 맞고 되돌아 날기 시작했고 잠실은 잠시 진공상태가 된 듯 했다. 왼쪽 담장을 넘어 경기를 그대로 끝낸 '굿바이 홈런'이었다. 한국 프로야구사상 가장 팽팽했던 승부에서 터져 나온 가장 의외의 끝내기홈런이었다.
아직 내 마음을 날고 있는 김홍집의 141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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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년 한국시리즈 1차전 끝내기 홈런의 주인공 김선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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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야구위원회 | 김홍집은 마운드를 내려오면서 코끝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한쪽 팔뚝으로 닦아냈다. 먼 훗날 그는 그것이 눈물이 아니라 땀방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코끝이었든, 가슴 속이었든, 분명 눈물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제 지는 것 따위로는 눈물을 흘릴 리 없을 만큼 굳은살이 박힌 돌핀스 팬들의 가슴에도 뜨끈한 눈물이 흘렀다.
정민태의 5이닝 퍼펙트 호투 속에서 4-0으로 앞서가던 3차전에서 믿었던 마무리 정명원이 무너지며 역전을 당하자 김홍집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1차전보다도 더 독하게 앙다문 얼굴로 공을 뿌려댄 그는 더 이상의 점수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타선은 끝내 역전타를 뽑아내지 못했고 그렇게 돌핀스는 내리 네 판을 내주고 우승컵을 놓쳐야 했다.
그 뒤로 김홍집은 단 한 번도 10승 이상을 기록하지 못했다. 동기생 구대성과 이상훈의 영광을 멀리서 지켜보며 잊힌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 바로 2004년 2월이었다. 이제는 SK 와이번스라는 새로운 구단이 자리 잡은 인천에서 팬들은 왜 뒤늦게 김홍집을 떠올렸던 것일까?
김홍집은 팬들과 함께 웃은 영웅은 아니었다. 그러나 비장한 패배의 중심에서 팬들과 함께 눈물 흘렸던 그 이름을 인천 팬들은 가슴에 품고, 마음에 새기고, 언젠가 꼭 승리 축배로 묵은 눈물자국을 함께 씻어낼 날을 조용히 기다려왔다. 그리고 10년이 지나고 이제 더 이상 기다려도 찾아올 기회는 없을 것임을 깨달은 순간 팬들은 그렇게 마지막 투정이라도 부려보아야 했던 것이다.
94년의 그날 김선진의 타구가 정적 속에서 120m나 날아가는 동안 제발 3루타라도 좋으니 담장에만 걸려달라고 기도했던 돌핀스 팬들의 마음은 그대로 김홍집에게 마지막 기회를 달라는 간청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야구장에서 승부는 매일 갈라선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매일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운다. 그러나 그 무한히 순환하는 듯한 매번의 승부가 항상 다시는 오지 않을 마지막 운명의 갈림길이라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새삼 숙연해진다. 누군가에게는 지금 이 순간도 김홍집의 94년 그날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홍집의 141구는 아직도 내 마음을 날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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