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가 말한 것처럼.. 85년 인천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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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박민규가 말한 것처럼 85년 봄의 인천야구는 처참했다.
그러나 85년 인천야구의 봄이 모두 암울했던 것은 아니다. 출발은 좋았다.
인천야구의 미래를 짊어질 동량들인 인천고는 그 해 4월에 열린 대통령배 고교야구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박형렬, 김동수, 이용호가 버티고 있었던 서울고의 벽을 넘지못하고 결승전에서 패했지만, 인천고는 최계훈, 양후승 등이 활약했던 79년 이후 6년만에 전국 대회 결승 진출을 이뤄냈다. 당시 인천고에는 김경기가 있었다. 90년대 인천야구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했던 김경기가 4번을 치고 있었다.
김경기의 아버지는 50년대 인천야구가 배출해 낸 전설적인 스타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김진영이다. 아들의 인천고 30년 선배였던 김진영은 당시 삼미 슈퍼스타즈의 감독을 맡고 있었다. 85년 패턴트레이스 개막전. 삼미는 공식 개막 경기에서 전년도 우승팀 롯데와 부산에서 맞붙는다. 개막전에서 삼미는 최동원이 등판한 롯데를 5대1로 잡는다. 좌완 정성만이 완투하면서 롯데 타선을 농락했고, 타선은 최동원을 착실히 공략했다. 첫 승. 그러나... 이후 삼미가 한번 더 이기기까지는 한달이 더 걸렸다.
1985년 4월30일 인천구장, 최계훈
개막전 승리 이후 삼미의 연패가 시작된다. 지고, 지고, 또 졌다. 18연패.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한국 프로야구의 최다 연패 기록이다. 연패 기간 중에 김진영 감독이 2선으로 후퇴하고, 신용균 코치가 감독 대행에 오르게 된다. 4월30일. 18연패 중이던 삼미는 인천에서 MBC와 맞붙는다. 삼미의 선발은 최계훈, MBC는 하기룡이 마운드에 올랐다.
선취점은 삼미가 뽑았다. 2회 정구선의 솔로 홈런. 출발은 좋았다. 그렇지만 이후에는 줄곧 최계훈과 하기룡의 투수전이 펼쳐진다. 살얼음판의 승부. 8회말 삼미는 찬스를 잡는다. 1사 만루의 기회.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싸가지 없지만, 근성있는 프로페셔널로 그려졌던 양승관이 나왔다. 딱 ! 주자 일소 2루타. 4대0 리드. 경기는 그렇게 끝났다. 선수들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처럼 얼싸안고, 관중석에서는 연안부두가 불려졌다. 당시 MBC 스포츠 뉴스의 첫 머리도 삼미의 18연패 탈출이 차지했다. 85년 프로야구는 3월30일에 개막됐다. 삼미는 4월 내내 지다가 4월의 마지막 날에야 1승을 챙길 수 있었다.
삼미의 승리가 전해진 다음날 삼미는 청보에 매각됐다. 매각 가액 70억원. 전설의 슈퍼스타들은 얼룩말이 돼 버렸다. 어쨌거나 삼미의 18연패가 마감된 그 자리에는 인천이 배출해 낸 명투수 최계훈이 있었다. 7피안타 완봉승.
구도(球都) 인천
인천을 구도라고 부른다. 야구도시.. 왜 그런지 모르겠다. 질레트에 의해 이 땅에 도입된 야구는 YMCA에서 시작됐다. 인천과 상관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 개항 이후 신식 문물이 들어온 곳이 인천이기 때문에, 야구도 여기에 묻어 들어온 것으로 본 것일까 ? 역사적 기원은 모르겠지만, 인천이 구도로 불릴만한 이유는 있었다고 본다. 한국전쟁이 끝난 50년대, 한국야구의 레전드는 인천야구였기 때문이다. 인천에는 인천고와 동산고가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51~52년에는 고교야구 대회가 열리지 않았다. 당연하다. 총탄이 날아다니는데, 야구가 웬말이냔 말이다. 53년 야구 대회가 재개된다. 권위있는 야구 대회라야 조선일보 주최의 청룡기와 동아일보 주최의 황금사자기 정도가 다였던 시절이었다. 인천야구의 황금 시대는 인천고가 열었다. 1953년 청룡기. 인천고는 선린상고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황금사자기에서도 경남을 꺾고 우승. 전설의 명투수 서동준이 인천에 있었다. 타선에서는 1학년이었던 유격수 김진영이 있었다.
이듬해 1954년. 황금사자기 결승에서는 경남과의 리턴매치에서 패하지만, 청룡기에서는 선린상과 다시 붙어 승리한다. 인천고 청룡기 2연패.
1955년. 인천고는 또다시 청룡기 결승에 올랐다. 맞수는 동향의 동산고. 졸업반 김진영이 인고의 주축 선수. 그러나 동산에는 신인식이 있었다. 1학년이었지만 슬램덩크에 나오는 슈퍼루키 서태웅 정도의 포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동산은 12회 연장 끝에 인천을 2대1로 잡는다. 인천고 3연패 좌절. 그렇지만 인천고가 해내지 못한 3연패를 동향 동산고가 곧바로 해낸다.
1956년 청룡기 결승 동산 1:0 중앙
1957년 청룡기. 결승은 참 흥미로운 카드였다. 동산의 3연패 도전. 맞수는 2년 전 3연패 문턱에서 동산에 밀려 좌절했던 동향의 인천고. 동산이 이겼다. 3대1 승리. 신인식은 3년 연속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에도 이런 전설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동향의 맞수가 이렇게 연속해서 자웅을 겨룬 적도 없었던 것 같다. 60년대 말 이후 대구야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경북고와 대구상고도 이런 성적을 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 그러나 인천야구는 거기까지였다. 85년 봄의 삼미는 개막전 이후 1승을 올리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인천 야구는 57년 청룡기 이후 전국을 제패하기 까지 31년이 걸렸다. 88년 황금사자기에서 루키 위재영이 동산고를 우승으로 이끌기 전까지 인천야구의 암흑시대는 계속됐다.
중간중간 임호균, 양승관, 김진우, 이선웅, 금광옥 등의 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자원이었고, 이는 프로야구 출범 초기 삼미와 청보의 참담한 실패로 귀결됐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희망이 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최계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최계훈
최계훈은 내가 야구를 보기 시작했던 79년 고교야구의 No.1 투수였다. 최계훈은 어려서부터 이미 유명세를 탔었다. 최계훈은 사실 서울내기였다. 서울 사대부국 시절 극동지역 리틀 리그의 한국 대표 선수로 활약했다. ‘리틀야구의 쿠바’였던 대만의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최계훈을 눈여겨 본 이는 박정석 감독이었다. 인천고를 나온 박정석 감독은 힘을 써서 최계훈을 인천남중에 전학시켰고, 최계훈은 중학시절 인천남중을 정상에 올려 놓으며 인천야구 중흥의 기수가 된다.
자연스럽게 최계훈은 인천고에 진학했다. 1학년 때였던 77년 황금사자기. 루키 최계훈은 선배인 좌완 김상기와 힘을 합쳐 인고를 황금사자기 결승에 진출시켰다. 결승전 상대는 팀을 재창단한지 얼마 안되는 광주상고. 인천고는 연장 11회 접전 끝에 광주상고에 3대2로 패하며 분루를 삼킨다. 결승점을 허용했던 투수가 최계훈이었다. 신입생이었음에도 결승전, 그것도 연장전에 마운드에 오를 정도로 비중이 컸던 것이다. 졌지만 그래도 인천 야구는 가능성을 봤다. 최계훈이 고학년이 되면 전국을 제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78년. 인천고는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 양상문의 부산과 김정수의 신일이 힘을 쓰던 시절이었다.
1979년 인천고
드디어 79년. 최계훈이 3학년이 됐다. 재치있는 양후승도 있었고, 듬직한 포수 채태석도 있었다. 그리고 훌륭한 백업 투수인 정은배도 있었다. 인천고는 우승 후보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당시 인천고의 감독은 최계훈을 인천 야구로 끌어온 박정석이었다.
첫번째 대회인 대통령배. 인천의 출발은 좋았다. 특히 최계훈은 동대문상고와의 2회전에서 퍼펙트 게임을 할 뻔 했다. 9회 1사인가, 2사인가까지 완벽하게 타선을 틀어막다가 연속 안타를 허용했지만, 초고교급 투수다웠다. 그러나 첫 대회에서는 4강에 만족해야 했다. 4강전에서 윤학길의 부산상고에게 4대1로 패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첫 대회 4강. 그리 나쁜 출발은 아니었다. 최계훈은 이 대회에서 타격과 타점 순위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청룡기
김진원의 배재를 잡고, 인천고는 무난히 8강 진출. 상대는 경남. 인천고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됐지만, 최계훈의 초반 난조, 2회까지 5실점을 하고만다. 이후 페이스를 찾았지만, 타선이 침묵한다. 2대5의 패배. 22년만의 정상 도전은 다시 좌절된다.
대붕기
아무래도 지방대회는 중앙대회 보다 비중이 떨어진다. 약간 양념 정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 아무튼 대구에서 열린 대붕기. 인천고는 결승에 진출했다. 상대는 청룡기에서 4대1로 가볍게 눌렀던 배재고. 그렇지만 인천고는 3대2로 패한다. 이때부터 인천고의 지긋지긋한 결승전 징크스가 시작된다.
봉황기
이제 중앙대회는 2개 밖에 남지 않았다. 인천고 마음 먹고 달려든다. 최계훈의 구위도 좋았다. 승승 장구. 4강전의 상대는 대구고. 이때 나는 야구장에 있었다. 대구고는 이 대회 16강전에서 서울고와 기록에 남을 만한 명승부를 펼치고 올라온 팀이다. 장훈, 김영균 듀오가 팀을 이끌고 있던 서울고에 9회초까지 8대13으로 리드당하고 있던 대구고. 9회말 공격에서 대거 6득점하며 14대13으로 역전승한다. 최계훈의 인천과 불꽃 타선 대구고. 그렇지만 승부는 싱겁게 갈린다. 최계훈은 대구고의 강타선을 셧아웃 시켜 버린다. 10대0 쯤 되는 스코어로 인천고의 압승.
이제 한번만 남았다. 상대는 광주상고였다. 2년 전 루키시절,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패배를 안겨줬던 광주상고와의 일전. 그렇지만 완패였다. 이군노, 노영석, 최영조, 이순철 등이 포진하고 있던 광주상고의 타선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지금 광주상고의 후신인 모교 동성고 감독으로 있는 언더스로우 윤여국도 공략하기 까다로운 투수였다. 인천고의 완패였다. 0대6. 두 대회 연속 준우승에 그쳤다.
황금사자기
마지막 중앙 대회였다. 인천고는 4강전에서 또다시 대구고와 맞붙는다. 이번에도 최계훈이 나섰고, 군말 없는 7대0의 완봉승. 세번째 결승 진출. 맞수는 경북고. 경북고는 79년에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한 팀이었다. 전체적으로 인천고의 우세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최계훈은 잘 던졌다. 9회까지 완투하며 1실점. 충분히 제 몫을 해냈다. 아.. 그런데 인고 타선은 또다시 사이드스로우 투수를 공략하지 못한다. 경북고의 에이스인 진동한에게 말려 들어가며, 한 점도 뽑아내지 못했다. 0대1의 아쉬운 분패. 인천야구의 22년 숙원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인천고 3개 대회 연속 준우승.
전국체전
사실 전국제천은 그리 중요한 대회는 아니다. 시도간의 경쟁으로 대충할 수는 없지만, 구기 종목의 경우 마이너 중의 마이너 대회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인천고는 경기 대표로 79년 전국체전에 참가한다. 또 결승에 올랐다. 상대는 전주고. 전주고는 그해 봉황대기에서 거함 선린상고를 2대1로 격침시킨 강상진이라는 좋은 투수가 있었지만, 인천고의 전력이 확실히 나았다. 그러나 결과는 2대2 무승부.
공동우승이었을까 ? 그럴리가 있는가 ? 요즘도 전국 체전은 무승부일 경우 연장전을 치르지 않고 추첨으로 승부를 가린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인천고의 추첨패. 4개 대회 연속 준우승. 인천고의 79년은 이렇게 끝나 버린다.
그 이후의 최계훈..
대학 갈 때도 최계훈은 홍역을 치뤘다. 먼저 기선을 제압한 것은 중앙대였다. 당시 중앙대 감독은 인천 야구의 전설, 김진영이었다. 삼미슈퍼스타즈에서 최계훈과 재회하게 되는 바로 그 김진영이었다. 최계훈은 중앙대 진학을 위한 가등록까지 마친 상황이었지만, 막판에 뒤집어져 버렸다. 인하대가 최계훈의 동기 6명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최계훈을 진학시킨 것이다. 거의 납치에 가깝게 최계훈을 승용차에 태우고, 안전가옥으로 모셔갔다던가. 인천의 지역 사회가 매달렸던 것 같다. 인하대의 재단이었던 대한항공에서 최계훈이 졸업할 때 실업야구단을 창단할 것이라는 풍문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의 최계훈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별 기억이 없다. 선명한 것은 85년 4월말 삼미의 18연패를 끊었던 역투 밖에는... 인천야구 비운의 황태자에 걸맞는 기억이 아닌가 ? 이후 인천야구가 힘을 냈던 태평양 돌핀스 돌풍 시절에는 최계훈의 자리가 없었다.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3인방이 있었던가. 이후 현대의 전성기는 다들 아실테고.. 최계훈은 프로야구 심판이 됐던 것 같은데.. 지금도 심판을 하고 있나 ?
최계훈은 내가 야구를 좋아했던 초창기의 슈퍼스타였다. 참으로 운이 없었던 선수였다. 어린 나이에도 인천고를 보며, 최계훈을 보면서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참으로 아련한 기억이다.
그나저나
동대문 야구장 없어져 버리면, 인고의 응원가 다시 들을 수 있을까 ?
‘1번 타자 안타치고, 2번은 번트대고, 3번 타자 홈런치고~
고교야구 얘기하면 인천고등학교, 사위감을 찾는데도 인천고등학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가사가 아니었나 싶다. 야구장에서 자주 듣다보니 남의 학교 응원가를 흥얼거릴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또다른 버전의 응원가.
‘인고인의 정력, 신기하고 놀라워~, 인고인의 정력 신기하고 놀라워~’ 라고 하는 ‘게브랄티’ 버전의 응원가도 있었구나.
소주에 얼굴이 달궈져 응원가를 불렀던 그 사람들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
동대문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이런 응원가를 들으면 예전의 기분이 날까 ?
소주 한잔 권하던 B 탑 밑의 야구 폐인 아저씨들은 어디로 가실까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good luck~
<퍼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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