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중계석
윤재국 기사네요. 고등학교때 참 잘했는데.
작성자 : 인고 93회
작성일 : 2007.04.09 11:20
조회수 : 2,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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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 윤재국, "이제 시련은 없다" | |||||||
[오마이뉴스 2007-04-09 10:42] | |||||||
[오마이뉴스 양형석 기자] 8일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 두산 베어스의 개막 3연전 마지막 경기. 삼성의 7-4 승리로 끝난 대결에서 최고의 '별'은 단연 임창용이었다. 임창용은 시즌 첫 선발 등판 경기에서 5이닝 4피안타(1피안타) 4볼넷 3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며 100승 150세이브(168세이브) 클럽에 등록했다. 김용수에 이은 역대 두 번째이자 최연소(30세 10개월4일) 기록이다. 그러나 임창용이 세운 대기록의 제물이 됐던 두산에도 빛나는 선수가 있었다. 투런 홈런을 포함해 4타수 2안타로 활약한 두산의 좌익수 윤재국이 그 주인공이다. '고향' SK 와이번스에서 기량 만개... 발목 부상 '좌절' 1998년 경남대를 졸업하고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데뷔한 윤재국은 입단 당시 계약금 1억500만원을 받았던 유망주였다. 입단 동기이자 현재의 팀 동료 김동주가 받았던 4억 5천만원에 비할 순 없지만 쌍방울이 '없는 집안'임을 고려하면 윤재국도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던 쌍방울은 1996년과 1997년 포스트시즌 진출의 일등공신이었던 박경완(SK 와이번스)을 현대 유니콘스로 현금 트레이드하며 6위에 머물렀고, 1999년엔 '프렌차이즈 스타' 김기태와 '불펜 20승 투수' 김현욱마저 삼성 라이온즈로 보내 버렸다. 신인이던 1998년에 타율 .227 11타점 6도루를 기록한 윤재국은 1999년에 108경기에 나와 타율 .276 30타점 7도루로 프로 적응에 성공했지만 쌍방울은 원년의 삼미 슈퍼스타즈(.188)에 이어 역대 최저 승률 2위(.224)를 마지막으로 공중 분해됐다. 1999년의 활약 덕분에 윤재국은 다행히 신생팀 SK 와이번스로 유니폼을 갈아 입었고, 인천고 출신의 윤재국은 얼떨결에 고향팀에서 뛰게 되는 행운을 잡았다. 윤재국은 SK의 창단 첫 해였던 2000년에 125경기 타율 .276 95안타 30타점 7도루로 주전선수로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고, 2001년에도 109경기에서 타율 .277, 83안타 38타점에 10홈런 11도루를 기록, '호타준족'으로서의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창단 후 2년 동안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한 SK 구단도 3년째를 맞아 대대적인 전력 보강에 나섰고, 윤재국도 드디어 '비룡 군단'의 중심 선수로 주목을 받는듯 했다. 그러나 윤재국은 2002년 5월 8일 대구 삼성전에서 수비 도중 왼쪽 발목 부상을 당하며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윤재국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이진영, 조원우(한화 이글스), 채종범이 SK의 외야 세 자리를 차지했고, 결국 윤재국은 2002년 시즌 중반 박남섭과 외국인 투수 페르난도 에르난데스와 묶여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됐다. 두산 이적 후 강팀에서 주전 도약... 십자인대 파열과 군입대
3년 연속 '꼴찌'의 수모를 겪은 롯데는 2004년 시즌을 앞두고 드디어 '지갑'을 풀어 '대어급 FA' 이상목과 정수근을 영입했다. 윤재국이 이적한 지 2년 만에 드디어 팀에 활기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좌타 외야수 정수근과 포지션이 겹친 윤재국은 40억의 '귀하신 몸' 정수근에게 밀려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고, 윤재국의 7번째 시즌(2004년)은 2군에서 시작됐다. 1군에서 뛸 수 있는 기량을 갖추고도 포지션 중복으로 2군으로 밀려난 윤재국은 좌타 외야수가 필요했던 두산 김경문 감독의 부름을 받고 2004년 4월 11일 김만윤과 맞트레이드돼 네 번째 유니폼을 입게 됐다. 본의 아니게 자신을 밀어낸 정수근이 지난 9년 동안 활약하던 두산으로 '시집'을 가게 된 것이다. 두산 유니폼을 입은 윤재국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였다. 주전 좌익수와 2번 타자로 중용된 윤재국은 특유의 허슬 플레이와 빠른 발, 재치있는 타격으로 두산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특히 이적 후 두 번째 경기였던 4월 17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정민철로부터 1회 결승 솔로홈런과 5회 승부를 결정짓는 희생플라이를 때려내 두산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두산은 김경문 감독 부임 첫 해로 마크 키퍼와 게리 레스, 박명환으로 이어지는 최강의 선발 트리오와 안경현, 김동주, 홍성흔으로 이어지는 중심 타선을 보유하고 있던 강팀이었고, '굴러온 복덩어리' 윤재국 역시 당당한 두산의 중심 선수였다. 프로 입단 후 6년 동안 네 번이나 꼴찌팀에서 뛰어야 했던 윤재국으로서는 그야말로 '야구 할 맛 나는' 2004 시즌이었지만 윤재국의 지독한 불운은 다시 한 번 윤재국의 발목, 아니 오른쪽 무릎을 잡았다. 6월 2일 LG 트윈스전, 8회 좌전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갔다가 견제구에 걸려 협살되는 과정에서 LG 투수 서승화의 발에 걸려 넘어진 것이 오른쪽 무릎 후방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중상으로 이어졌다. 수술 후 재활 기간만 6개월 이상. 순식간에 시즌을 마감했다. 설상가상으로 그 해 9월에 터진 병역비리에 연루돼 만29세의 늦은 나이에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이제 야구팬들은 기억속에서 윤재국이라는 이름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주로 꼴찌팀에서 뛰었던 그저 그런 선수가, 그것도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안고 늦은 나이에 상무도 아닌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한다면 십중팔구는 야구를 포기하거나 방출되는 게 전례였기 때문이다. '파란만장' 윤재국의 야구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러나 윤재국은 십중팔구가 아니라 '십중일이(十中一二)'였다. 작년 11월 18일 전역한 윤재국은 겨우내 스프링캠프 일정을 착실하게 소화했고, 결국 개막 엔트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4월 8일 대구 삼성전, 2년 10개월 만에 좌익수에 9번 타자로 선발 출장해 '100승 150세이브'의 임창용으로부터 우측 담장을 넘기는 투런 홈런을 때려내는 기염을 토했다. 7회에는 재치 있는 번트 안타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어느덧 프로 10년차, 만 32세의 고참 선수가 됐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는 성실함은 쌍방울 유니폼을 입었던 신인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 윤재국은 아직 무명 선수에 가깝다. 두산팬들조차 그의 이름이 윤'재'국인지, 윤'제'국인지 혼동할 정도다. 그러나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예비군 1년차 윤재국은 지난 날의 모든 시련과 불운을 이겨내고 2007년 힘차게 그라운드를 누빌 것이다. 뉴스게릴라들의 뉴스연대 -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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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찬님의 댓글
인천출신 좋은 선수들 많습니다. 윤재국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