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중계석
인천야구의 태동기
본문
1. 되돌아 보는 인천야구-‘인천야구의 태동’
우리나라에 야구가 처음 도입된 시기는 1905년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당시 대한제국인 시절 우리나라는 일본제국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며 비운을 맞으면서 신기한 외세문물로만 여겨지던 야구의 역사가 이 때 시작됐다고 알려졌다.
대한체육사 기록에 의하면, 개화기라고 불리워졌던 그 당시 서양문물이 들어오던 중 기독교문화가 정착되면서 1901년 YMCA 개척간사로 한국에 파견된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Philip L Gilet)가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를 설립한 이듬해인 1905년 청년들에게 서양운동인 야구를 전수한 것이 한국야구의 시초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인천에서의 야구 시작은 언제일까? 안타깝게도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인천의 야구도입은 이 보다 앞선다는데 있다. 1895년 인천서 개교해 1904년까지 존립했던 인천고 전신인 인천영어야학회 1학년에 재학한 일본인 후지야마 후지후사가 기록한 1899년 2월3일자 일기에서 ‘야구놀이란 서양 공치기를 했다’는 내용의 글이 실려 야구가 이미 존재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가 보급한 1905년 보다 무려 6년이나 앞선 셈이다. 분명한 것은 항구도시 인천은 1876년에 이루어진 개항 관문이었고 이미 1873년 동경대학의 전신인 개성학교에서 윌슨 교수가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하며, 우리나라에 비해 30여년이나 앞섰던 일본 야구가 일부나마 인천에 이미 보급됐었을 개연성이 당시 상황으로 볼때 충분하다는 것이다.
당시 인천지역에 야구가 보급돼 경기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없어 더이상의 입증은 불가능하다.
기록에 나타난 인천지역 최초의 야구팀은 인천상업전수학교에서 찾을 수 있다. 1915년 10월 철도구락부 주최로 용산 철도운동장에서 ‘경용추계야구대회’가 열렸다. 출전팀은 ▲경성구락부 ▲오성친목회 ▲조선은행 ▲철도야구부 ▲철도청소년단야구부 ▲인천상업 등 6개팀이다.
이 대회는 경기 결과없이 비록 일본인들에 의해 행해진 야구였지만 인천야구의 활약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잘못됐다는 주장도 나왔다. 당시 인천상업은 인천관립 실업학교로부터 교명이 개정된 1912년부터 존재했던 순수 한인학교로 야구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구는 인천상업과 함께 존재했던 일본인학교 인천상업전수학교에서만 존재했으므로 1915년 ‘경용추계야구대회’ 출전팀으로 기록되고 있는 인천상업은 인천상업전수학교나 인천상전으로 바뀌어야 하고, 일인교육기관인 인천남상업과 합병돼 1933년에 문을 연 인천공립상업학교, 즉 인천상업과도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인천상업 야구팀
인천상업전수는 1915년에 창설된 ‘일본중등학교야구대회’의 조선·만주지역 예선전(일명 갑자원대회)에 7회 대회인 1921년부터 10회 대회인 1924년까지 4년간 출전해 2차례(7, 8회) 지역예선 결승에 올랐으나 각각 부산상고와 경성중학에 져 본선에 진출은 이루어내지 못했다.
다만 인천상업전수학교도 1922년 3월31일부로 다시 인천남상업학교로 교명이 바뀌는 바람에 1922년(8회)부터 1924년(10회)까지 인천남상업으로 출전했었다.
따라서 야구가 학원스포츠로 빠르게 보급되던 당시에 인천에도 인천남상업야구팀이 존재했지만 이 또한 일본 학생들의 의해 행해진 것이여서 인천야구의 효 시는 정확게 찾아 볼 수 없다.<이인수기자>
*참고자료=‘인천야구의 사적 고찰’ 논문집(저자 박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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