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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야구의 대부 김진영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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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야구의 대부 김진영 |
지금도 '김진영'이란 이름 석자만으로도 인천팬들을 흥분시키는 김진영감독!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승봉도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승봉도의 서당 훈장님이셨다고 한다. 7살 때 인천으로 유학을 나온 그는 '인천야구의 대부'라 불리운다. 동산중을 나와 1950년대 인천고 시절 고교 최고의 유격수,최고의 타자로 활약하며 인천야구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인천고의 청룡기 2관왕을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 또한 육군-교통부를 거치며 최고의 선수로 현역생활을 마무리하고 해병대-중앙대-인하대 감독을 역임하며 지도자로서도 성공을 거둬 맹장이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해병대 감독시절 그의 명성은 대단했다. '악바리'라 불리며 선수들을 혹독하게 다그쳐 해병대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지금도 나이드신 야구팬들은 김진영감독하면 삼미의 감독보단 해병대감독을 먼저 떠올린다. 이렇게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성공을 거둔 그는 '인천야구의 대부'란 자존심이 대단한 감독이었다.
<=1969년 제8회 아시아 선수권 대회. 해병대 감독시절 대표팀 감독으로 참가한 김진영.(맨앞) 바로 뒤가 코치로 참가한 박현식. 그 뒤엔 선수 김응룡. *나이가 많은 박현식이 코치이고 김진영 이 대표팀 감독이었던 걸 보면 당시 해병대 김진영감독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었 는지 알 수 있다.
<< 1982년 프로야구 출범당시 인하대 감독이었던 김진영은 삼미의 초대감독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지만 인하대에 남아 좀더 지켜본뒤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프로야구 창립 위원인 이용일씨를 만났더니 프로야구에 꼭 참여해서 인천야구를 중흥시켜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무렵까지만 해도 나는 프로야구에 뛰어들 마음이 전혀 없었다. 갓 출범한 프로야구 판이 불안하기도 했고…, 아무튼 인하대에 남아 좀 더 지켜본 뒤 참여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김진영으로서는 프로야구에 뛰어들 이유가 없었다. 인하대 감독을 맡고 있지만 대우나 조건이 프로야구에 뒤지지 않았고 섣불리 뛰어들었다가 성적을 못내 망신을 당할 바에야 현직에 남아있는 편이 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천 및 경기·강원지역 선수들이 썩 좋지 못해 “아직은 무리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인하대 우승. 가운데가 김진영감독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가 프로야구 참여를 거부한 사정은 엉뚱한데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프로야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따돌림을 받았다는 서운한 감정 때문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삼미가 인천 및 경기·강원지역을 연고지로 한 야구단 창단을 결정한 뒤에도 자신에게는 단 한 마디 연락도 없어 서운한 감정을 안고 있었다. 김진영의 입장에선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진영이 이런 감정을 깔고 프로야구 참여를 거부하자 삼미의 초대 감독자리는 박현식에게 돌아간다. >> - 홍순일의 프로야구 비화 중 발췌
<=1979년 한,미 대학야구 대회에 참가했을 때. 맨 왼쪽이 김진영, 맨 오른쪽은 강병철, 그 옆은 김동엽.
하지만 첫시즌을 참담한 성적으로 마감한 삼미는 결국 유일한 대안인 김진영에게 도움을 청한다. 결국 그해 11월 삼미의 지휘봉을 잡고 프로야구판에 뛰어든다. 83년 팀을 재창단한다는 의미에서 백넘버까지 83번으로 달고 악바리란 별명대로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삼미 선수들을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혹독하게 다그친다. 지난해 삼미의 수모를 깨끗이 설욕, 구도 인천의 명예를 되살리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홈경기에서만은 승리한다는 각오로 시즌을 준비한다. 또한 지난시즌 16전 전패의 수모를 안겨준 OB를 꼭 무너트리겠단 각오도 되새겼다. *당시의 훈련모습을 보고싶으면 눌러 주세요 ==>
<=82시즌이 끝난뒤 삼미 감독으로 취임해 골든글러 브 시상식에 참여한 각팀 감독들과 한방. 왼쪽부터 서영무(삼성), 박영길(롯데), 이용일 프로야구 창립위원, 김영덕(OB), 김진영(삼미), 백인천(MBC)
그의 또다른 별명이 '오야붕'이었던 것처럼 김진영은 83시즌이 시작되자 뛰어난 지도력과 제일동포 투수 너구리 장명부를 앞세워 승승장구 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전년 도깨비구단이라 불리며 패배를 밥먹 듯 하던 삼미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OB와의 대전에서도 첫게임에서 승리를 거둬 치욕적인 기록을 끊어 버렸다. 그렇게 되자 관중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신바람이 난 인천팬들은 야구장으로 몰려 들었다. 하지만 너무 잘나가던 게 탈이었다. 전년과 달라진 모습으로 전기리그에서 선두를 질주하며 전기우승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삼미호앞에 뜻하지 않은 암초가 나타나고 만다. 6월1일 잠실 MBC전에서 그동안 훌륭한 지도력으로 팀을 이끌어오던 김진영감독의 폭력구속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연도별 분류 1983년 편을 참고. 화살표를 누르면 바로 감 ==> 결국 게임도 지고 6월2일 부산서 롯데를 4:1로 누른 직후 서울로 압송돼 구속돼 버린다. 구속 10일째인 6월11일KBO서종철 총재의 노력으로 벌금 100만원을 내고 약식기소로 석방된후 시즌종료까지 자숙한다는 조건에 따라 덕아웃에 들어가지 못하고 구장 뒤쪽에 있는 방에 숨어 전령을 통해 작전을 지시하기도 했지만 그렇게해서는 제대로 된 작전을 펼 수 없었다. 결국 삼미호의 욱일승천하던 기세는 꺽이고 사령탑을 잃은체 중심을 잃고 침몰하고 말았다. <=근신중에 장명부에게 장외에서 작전지시를 하는 김감독
업친데 덥친 격으로 그가 근신중이던 6월 30일 삼미 구단은 전년 MBC의 감독겸 선수였던 백인천을 코치겸 선수로 데려온다. 김감독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운사이 백인천이 삼미의 차기 대권을 노린다는 말도 들렸다. 김감독으로선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김감독은 처음부터 백인천의 영입을 반대했다. 자신이 데려온 이재환 코치와 백인천의 사이가 염려됐기 때문이다. 경동고시절부터 절친했던 이재환(왼쪽)과 백인천(오른쪽)은 지난 시즌 MBC에서 감독과 코치로 있었으나 스카우트 문제로 둘의 사이가 와해돼고 말았는데, 원래 이재환과 실과 바늘 같은 존재였던 김진영은 이에 이재환을 코치로 데려왔던 것이다. 그래서 김진영은 백인천의 삼미행을 반대했지만 구단에서 강행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백인천은 그해 8월 간통사건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입원한 김감독 신문기사=>
<= 84년을 준비하는 일본 전지 훈련지에서...
다음해인 84년 2월 팀에 복귀한 김감독은 의욕적으로 시즌을 맞는다.하지만 삼미의 운명을 오른쪽 어깨에 짊어진 장명부가 구단과의 돈 문제로 태업을 벌이면서 성적은 곤두박질 치기 시작한다. 결국 제대로 힘한번 못써보고 84시즌을 꼴찌로 마감하고 만다.
<=오야붕과 너구리 '제발 속썩이지 말고 작년의 반만이라도 해줘~"
<시즌이 끝난 뒤 부진을 보인 너구리 장명부와 골칫덩이가 된 백인천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지를 풍자한 만화> 85년엔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팀은 주전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으로 또다시 연패에 빠져 허덕이기 시작한다. 이때 벌어진 사건이 그 유명한 '18연패'다. 최악의 18연패를 당하는 과정에서 결국 4월29일 연패의 책임을 지고 조건부 휴가라는 명목하에 지휘봉을 놓고 만다. 당시 그의 아들인 김경기는 인천고에서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며 활약하고 있었는데 모 신문에선 이를 빗대 ‘아들은 승승장구,아버지는 연패’라는 톱기사를 대문짝만하게 싣기도했다.
후기리그부터 새롭게 바뀐 청보핀토스의 유니폼을 입고 다시한번 의욕적으로 팀을 운영해 후기리그 4위를 하는등 나름대로 선전 했지만 새로운 구단의 주인은 더 이상 김진영을 원하지 않았다. 결국 한참 어린 해설자 출신의 허구연에게 지휘봉을 넘겨 주었다. 하지만 허구연이 이끄는 청보호가 기대에 전혀 못미치자 인천팬들은 "허구헌 날 지는 허구연대신 김진영감독을 다시 데려와라!"라고 외쳐댔다.
<= 청보 핀토스 창단 첫 게임 때 모습
심판에게 항의하는 모습=>
야구계를 떠나 개인사업을 하던 그는 1990년 롯데구단의 부름을 받고 다시 감독자리에 오른다. 삼미시절 영광을 같이했던 장명부를 투수 코치로 데리고. 하지만 부산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다. 성적부진으로 그만 중도하차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야구계를 떠나면서 그는 "삼미의 감독을 맡으면서 인천야구를 부흥시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란 말을 남겼다. 하지만 '인천야구의 대부'답게 그의 꿈을 대신 이루어 줄 분신을 야구장에 남겨 놓았다. 아들인 김경기가 그를 대신해 인천구장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인천팬들은 아직까지 예전 삼미가 잘나가던 시절의 흥분을 잊지 못한다. 지금까지 인천야구의 감독중 팬들의 뇌리속에 가장 인상깊게 남아있는 '인천의 감독'이 바로 김진영이다. 비록 그의 뜻대로 인천야구의 부흥을 이루어 내진 못했지만 인천팬들은 그동안 그가 야구장에서 흘린 땀방울을 기억할 것이며 앞으로도 영원한 '인천야구의 대부'라 기억할 것이다.
<=자랑스런 인천의 야구 부자!
*짠물생각- 얼마전 새로운 인천팀인 SK와이번스가 새로운 감독을 영입하려 할 때 참으로 안타까웠다. 감독 후보에 거론되는 사람들 중 인천출신 야구인이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천야구의 대부인 김진영감독이 인천에 남아 자리를 떠~억 잡고 후배들을 키워주었다면 이렇게 인천야구팀의 감독을 뽑는데 인천출신 후보를 한명도 배출하지 못하는 망신은 당하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것은 필요없는 기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우리 곁에는 그의 대를 이어 인천야구의 부흥을 책임질 '인천의 자존심' 김경기가 있기 때문이다. 인천팬들은 아버지가 못이룬 인천야구의 부흥을 그가 이루어 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천야구의 대부'-'인천의 자존심'으로 이어지는 인천야구의 대들보 계보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인천의 야구 부자 화이팅! 인천야구 파이팅! <퍼왔소이다>
20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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