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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球都) 인천, 부활하다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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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good morning incheon(2007.12)
Dynamic Incheon|인천 야구사
구도(球都) 인천, 부활하다
인천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단 SK 와이번스가 창단 8년 만에 한국시리즈 패권을 거머쥐었다. 인천 연고구단으로서는 지난 1998년 현대유니콘스 이래 두 번째 경사이며 구도 인천의 자존심을 되살린 쾌거다. 2007 한국시리즈 우승을 맞아 야구하면 죽고 못 사는 인천의 야구사를 되짚어본다.
글·사진제공·박달화 스포츠칼럼니스트
축구로 나눈 뜨거운 동포애
기록에 나타난 인천 최초의 야구단은 일제강점기 시절 경인기차통학생들의 친목단체로 출범한 한용단이다.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 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용단은 훗날 국회부의장을 지낸 곽상훈 선생을 주축으로 인천출신 통학생들이 만든 학생야구단이었다. 한용단의 최초기록은 1920년 6월 27일 지금의 제물포고 자리인 웃터골에서 펼쳐진 고려구락부와의 경기였는데, 이듬해에는 지금의 전국체전에 해당하는 제2회 전(全) 조선야구대회에도 출전했다. 한용단은 이후 일본팀과의 경기도중 일어난 판정시비가 빌미가 돼 해체됐지만, 한용단이 웃터골에서 야구경기를 펼칠 때면 한인들이 똘똘 뭉쳐 응원할 정도로 인천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됐던 야구팀이었다.
인천의 자랑 인천상업
인천이 야구의 도시로 이름 날리게 된 계기가 바로 인천상업의 출현이다. 1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천상업의 야구역사는 현존하는 국내 야구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인천상업은 당대 조선 최고의 실력을 갖춘 팀이었다. 인천상업은 1934년 조선신궁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5년간 우승 2회 준우승 1회를 차지하는 막강 실력을 과시했고 특히 1936년과 1938년 그리고 1939년 모두 세 차례나 조선을 대표해 일본학생야구의 최고무대인 갑자원 본선에 진출했다. 물론 일본학생들이 주축이 된 팀이었지만 그 중에는 김선웅, 장영식, 김영택씨 등 인천선수들도 함께 활약했으며 이들은 훗날 인천야구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인천야구 전성시대
인천이 구도라는 명성을 얻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50년대다. 전쟁의 상흔이 채 식기 전부터 전국에는 고교야구열풍이 불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 바로 인천이 있었다. 1930년대 중후반 전국을 휩쓸었던 인천상업의 후신 인천고에는 갑자원 출전의 주인공인 김선웅 씨가 무보수 감독으로 부임, 모교를 전국 최강팀으로 만들어낸다. 인천고는 1952년 전국체전 우승을 기점으로 1953년 3관왕, 1954년 3관왕을 차지하며 고교야구의 무적함대로 군림하게 된다.
이후 고교야구의 맥은 동향의 라이벌 동산고로 넘어갔다. 1948년 야구부를 창단하고도 한동안 인천고의 아성에 주눅이 들어있던 동산고는 1955년 혜성같이 등장한 1학년생 투수 신인식을 중심으로 고교야구의 중심에 우뚝 선다. 지금도 최고의 명승부로 회자되고 있는 청룡기 결승전은 동향의 라이벌 인천고와 동산고의 멋진 한판승부였다. 결국 12회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동산고는 인천고의 대회 3연패 등극을 저지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1957년까지 3년 연속 우승을 거머줘 청룡기를 영구 보전하는 유일한 학교가 됐다.
인천 고교야구의 부활
인천지역 고교야구의 부활은 1980년대 후반에야 이뤄졌다. 그 선봉에는 동산고의 1학년 투수 위재영이 있었다. 1950년대 신인식 투수의 재림을 연상케 한 위재영은 1988년 황금사자기에서 팀을 22년 만에 전국무대 정상으로 이끌었고 1989년에는 봉황기를, 1990년에는 화랑기를 우승으로 이끌며 인천지역 고교야구의 부활을 선도했다. 이 과정에서 라이벌 인천고도 1989년 황금사자기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인천야구열기를 부채질했다.
세월이 다시 흘러 인천지역 고교야구가 제3의 전성기를 맞은 것은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뒤였다. 2004년 인천고가 대통령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 대통령기는 유독 인천팀에게는 정상등극을 허락지 않았던 대회였지만 인천고는 그해 대통령기 정상에 올라 그 징크스를 깼다. 인천고는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2005년 한국야구 100주년 기념행사로 만들어진 일명 왕중왕전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에 질세라 라이벌 동산고도 2005년 청룡기 대회에서 무려 39년만에 정상을 탈환하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동산고는 환갑을 맞은 60회 청룡기의 주인이 돼 50년대 3연패를 비롯해 청룡기에서만 무려 6차례나 우승하는 기묘한 인연을 이어갔다.
인천을 거쳐간 프로구단들
구도 인천을 연고로 한 프로구단들은 처음엔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에서 인천을 대표했던 삼미수퍼스타즈는 1983년 재일동포투수 장명부를 앞세워 잠시 어필하는가 했지만, 1985년 후반에 이름조차 생소한 기업 청보핀토스에 팀을 매각했다. 청보역시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한 채 인천연고구단은 1988년부터 다시 태평양돌핀스로 간판을 바꿨다. 태평양돌핀스는 1989년 연고구단으로는 최초로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지만 거기까지였다. 결국 막강 자금력을 앞세운 현대유니콘스가 1996년부터 다시 인천연고구단이 됐다. 현대유니콘스는 창단 첫해 준우승을 차지하는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2년 뒤인 1998년에는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어 인천연고 프로구단의 역사를 새로 썼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현대는 이후 서울입성을 시도해 인천시민들의 원망을 샀고 기업의 쇠퇴로 서울입성이 좌절되자 새롭게 팀을 창단한 SK와이번스에게 연고지를 넘겼다.
2000년부터 인천의 새 구단으로 자리매김한 SK와이번스는 창단 4년째인 2003년 인하대 출신 조범현 감독을 사령탑에 선임, 새 바람을 일으킨다. 2003 정규시즌을 4위로 마감, 팀 창단 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고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삼성을, 플레이오프에서는 기아를 잡고 대망의 한국시리즈까지 올랐다. 하지만 마지막 7차전에서 현대유니콘스에게 고배를 들며 시리즈전적 3승4패로 ‘아름다운 준우승’에 만족해야했다. 그로부터 다시 4년이 흘렀다. 그리고 비룡선수들은 한국시리즈 우승이란 선물로 인천시민의 야구열정에 화끈한 불을 지폈다.
댓글목록 0
김현일(90회)님의 댓글
특히나 한국야구100주년 기념 왕중왕전에서 우승한 것은 우리 인고가 한국야구 100년과 시작을 함께 한다는 것에 더욱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후배님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김성수(95회)님의 댓글
그래서 어느선배님이 야구부들에게는 어디고교출신이냐 물어보면 인천상업고출신이라고 말하라고 하시더군요 ㅠㅠ-- ㅎㅎ
다니엘님의 댓글
인천고의 청룡기3연패 목전에서 발목을 잡은 동산고는 우승을 하고도 인천시민들의 원성에 환영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날 이후로 밤마다 동산고의 유리창이 깨어져 나가는 수난이 이어졌단다..환영은 커녕 인천에 영원히 모실 수 있었던 청룡기를 홀라당 집어먹었으니...이후 2연패를 달성할때 까지도 인천시민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모양이다. 비로서 동산이 3연패를 달성하여 청룡기 영구보존하자 그때에야 박수를 받았다는 가슴 찡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