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원현린(75회) 칼럼/음서제(蔭敍制)가 살아 있다니…!(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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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기호일보(25. 3.12)
음서제(蔭敍制)가 살아 있다니…!
/원현린 주필(主筆)
원현린 주필(主筆)
음서제(蔭敍制)는 부(父)와 조부(祖父)의 음덕(蔭德)에 따라 그 자손을 관리로 서용하는 제도다. 과거(科擧)가 실력에 의해 관인을 선발하는 제도라면 음서는 가문에 기준을 둔 등용제도다. 관인지배체제(官人支配體制) 확립을 지향한 고려 왕조가 관인의 신분을 대대로 계승해 주기 위해 마련한 제도인 것이다. 음서제가 성행했던 고려다. 아무리 명경대부(名卿大夫)라 하더라도 과거를 거쳐 진출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천거, 문음에 의한 서용 등 여러 제도가 있어 관리로 진출하는 길이 하나만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과거시험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고려 광종9년(958년)이었다. 당시 호족연합정권적 형태를 띠고 있던 시기였기에 무훈공신(武勳功臣)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대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음서에는 왕족의 후예와 공신의 후손, 5품 이상 일반 고급 관료의 자손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 등 크게 세 종류가 있었다. 특별한 경우 음서의 범위가 원손(遠孫)에까지 미치기도 했다. 음서제 하에서 혜택을 받는 자는 아들 외에도 조카, 사위, 동생 등 여러 명에 이르기도 했다. 때문에 음서 출신자 수가 과거급제자에 비해 많았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음서 출신자들은 가세 여하에 따라 처음부터 유리한 조건에서 벼슬길에 올랐다. 음서제의 커다란 특징 중 하나가 관직에의 조기 진출이다. 10세 미만에서 음직을 받는 예도 많았다. 대략 15세를 전후해 관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 음서 출신자라 하여 한품제(限品制)와 같은 제약은 없었다. 대부분이 5품 이상 직에 오르고 재상에 진출하기까지 했다.
상기(上記)는 음서제의 약술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아직도 1천 년 전 고려조의 음서제가 통하는 집단이 있다니, 말 그대로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다. 그것도 헌법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라니.
현행 국가공무원법에는 "공무원의 임용은 시험성적·근무성적, 그밖의 능력의 실증에 따라 행한다"는 임용의 원칙(제26조), "공무원은 공개경쟁 채용시험으로 채용한다"는 신규채용의 원칙(제28조), "공개경쟁에 따른 채용시험은 같은 자격을 가진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공개하여야 한다"는 평등의 원칙(제35조) 등을 엄연히 명문화했다. 이렇듯 엄격한 과정을 거쳐야 공무원 신분을 취득할 수 있다.
최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일부 직원들의 자녀 채용비리 문제로 논란이 일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를 열면 노태악 위원장의 ‘고위직 자녀 채용 관련 대국민 사과문’이 첫 장을 장식하고 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고위직 간부들의 자녀 특혜 채용 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큰 실망과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으로서 통렬한 반성과 함께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해 끊임없는 자정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이다.
감사원이 선관위를 상대로 2013년부터 2023년까지 11년간 291차례 경력채용을 전수조사한 결과 878건의 규정 위반을 적발했다. 여기서 우리를 허탈하게 하는 것은 "친인척 채용은 선관위의 오래된 전통"이라는 선관위 측 답변이다. 더욱 가관(可觀)인 것은 부정 채용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당사자를 사퇴시키지 못하겠다는 점이다. 대국민 사과문으로 갈음하려는 태도다. 사실 시간이 흐르면 흐지부지되고 마는 비리가 한둘이었던가. 직원 자녀들의 특혜 비리 채용은 합격권 지원자들이 대거 탈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합격권에 들고도 억울하게 불합격한 수험생의 한(恨)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는가.
선거관리위원회는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공명정대한 선거 관리라는 헌법적 책무를 부여받고 1963년 창설된 헌법기관이다. "선거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약속입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공정한 선거 관리로 민주사회의 발전과 함께 우리 사회 통합에 기여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라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인사말이 공허하게 들린다. 21세기 오늘날에도 대한민국 선관위에서는 1천 년 전 고려조의 음서제가 여전히 살아 운용되고 있다. 오랜 전통과 관행이라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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