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원현린(75회) 칼럼/막걸리 한잔(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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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기호일보(24.10.31)
막걸리 한잔
/원현린 주필<主筆>
원현린 주필
술의 역사는 아마도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을 것이다. 오늘이 막걸리의 날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막걸리협회와 2011년 막걸리 등 전통주시장 활성화와 세계화를 위해 10월 마지막 주 목요일을 ‘막걸리의 날’로 지정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이날을 전후해 막걸리 축제기간을 정하고 시음식(試飮式)을 하는 등 축제가 한창이다. 요즘은 막걸리를 생산하지 않는 지자체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상품이 나와 있다.
막걸리는 영어로 ‘Rice Wine’이라 하고, 로마자로는 ‘Makgeolli’라고 표기한다. 쌀을 치대어 누룩과 함께 물에 넣어 버무려 발효시키면 막걸리가 된다. 이름은 ‘지금 막 거른 술’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혼탁한 빛깔 때문에 ‘탁주’나 ‘탁배기(경상·제주·황해지방 방언)’라고도 불린다.
지자체들은 ‘추억을 마신다’, ‘이렇게 맛있는 막걸리를 아빠만 드셨나요?’ 등의 문구를 내걸고 막걸리 되살리기에 진력하는 모습이다. 널리 애창되는 유행가 ‘막걸리 한잔’도 있다. "온 동네 소문 났던 천덕꾸러기, 막내아들 장가 가던 날, 앓던 이가 빠졌다며 덩실 더덩실 춤을 추던 우리 아버지…."
선조들이 막걸리를 빚어 마신 기록도 보인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정월령(正月令)에 "며느리는 잊지 말고 소국주(小麴酒:막걸리의 하나)를 걸러라. 온갖 꽃이 만발한 봄에 화전을 안주 삼아 한번 취해 보자"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얼마나 정취나는 문구인가.
정조(正祖)는 조선조 군주 중 술을 유난히 좋아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하들과 연회를 하는 날에는 ‘불취무귀(不醉無歸)’라 하여 "취하지 않는 자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라고까지 했다. 성균관 시험에 합격한 유생(儒生)들에게 왕이 축하의 의미로 술과 음식을 내리며 한 말이라고 알려졌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 장차 나라의 동량(棟梁)이 될 유생들이기에, 술 취하게 한다는 것보다는 모든 백성들이 함포고복(含哺鼓腹)하며 술에 젖은 것처럼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군왕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술’하면 이태백(李太白)이다. 필자도 이백의 "하늘이 만약 술 좋아하지 않았다면 하늘에 주성(酒星)이 있지 않을 것이요, 땅이 만약 술 좋아하지 않았다면 땅에 응당 주천(酒泉)이 없으리라. 하늘과 땅이 이미 술 좋아하니 술 좋아함 하늘에 부끄럽지 않네. 이미 청주(淸酒)는 성인에 비한단 말 들었고 다시 탁주(濁酒)는 현인과 같다고 말하누나. … 세 잔 술에 대도(大道) 통하고 한 말 마시면 자연(自然)에 합치되네…"라는 시구를 읊으며 석 잔을 넘겨 말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인 유령(劉伶)은 늘 술을 휴대하고 다녔으며, 하인은 삽을 메고 따랐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바로 그 자리에 나를 묻어라"라고 했다. 고려 문신 이규보(李奎報)도 ‘내일 또 마시리(明日又作)’라는 시에서 "병이 들었어도 단호히 술을 끊지 못하니, 죽은 날에야 비로소 술잔을 내려 놓으리라. 술깨어 멀쩡히 살아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리, 취한 채 하늘로 돌아가면 참 좋을 것이다"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서양에도 이에 못지않는 술 예찬이 있다. 예이츠(W. B. Yeats)의 ‘술의 노래’가 그것이다.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 우리 늙어 죽을 때까지 알아야 할 진실은 이것뿐. 술잔을 들어 내 입술로 가져가며 그대를 바라보고, 나 한숨짓노라."
상기(上記) 시문(詩文)들을 보노라면 술의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막걸리의 날을 맞아 축제도 좋고 지역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것도 좋다.
지나친 음주는 시민 건강을 상하게 한다. 만약 위장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주인님 속이 쓰립니다!", 심장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주인님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애주가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약간의 술은 혈액순환에 이롭다고 하는 의사가 있는 반면 단 한 잔의 술도 해롭다는 의사도 있다. 지나친 술을 경계하는 말은 많다. 오래전 필자가 한 지자체로부터 계영배(戒盈杯)라는 술잔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말로만 듣던 술잔이었다. 당시에 ‘내 마음속의 계영배’라 하여 지나친 음주를 삼가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여하튼 매사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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