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기고]/'시부사와'의 야망과 인천 '개항장'(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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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24. 7.16)
기고] '시부사와'의 야망과 인천 '개항장'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인천의 명소로 알려진 중구 '개항장' 일대는 일본이 집요하게 획책했던 금융 침탈의 적나라한 현장이었다.
그 발단은 세칭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일컬어진다는 시부사와 에이치( 澁澤榮一)가 1873년에 창업한 제1국립은행이 부산, 원산에 이어 1882년에 인천 출장소를 설치한 일이다.
이 은행은 1888년에 지점으로 승격하였다. 그 2년 뒤인 1890년에는 일본 나가사키 상인들이 중심이 돼 설립한 제18국립은행이 최초의 해외 지점을 인천에 마련하였고, 1892년에는 오사카에 본점을 둔 제58은행이 사옥을 완공해 문을 열었다.
그로써 지금의 중구청 앞 일대에서는 일본의 3개 은행이 영업했는데 이들의 위세는 당대 조선의 금융계를 쥐락펴락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1은행권의 발행이었다.
시부사와는 1902년 금융을 원활히 하고, 무역을 촉진한다는 명분으로 일본 대장성의 허가만 받고 민간은행이 방자하게도 조선에서 은행권을 발행했던 것이다.
첫 근대 화폐일 수밖에 없는 1원, 5원, 10원권에는 은행의 경영 당사자였던 시부사와의 초상이 들어가 있었다.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그때 인천의 민족계 상인 집합체인 인천항신상협회(仁川港紳商協會, 현 인천상의)가 전국 최초로 수수 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은행이 딴전을 부려 쌀과 금 수출에 혈안이었고, 관세 업무 등을 넘보는 행태에 분개한 신상협회 회원들은 그해 5월27일 총회를 열고 이를 배척키로 결의했다.
결국 11월에 정부가 나서서 통용을 금지했다. 시부사와는 개항장 외곽이 출발 기점인 경인선 철도의 건설에도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애초에 정부는 자력으로 철도 건설을 꿈꾸었으나 여의치 않자, 미국인 모오스에게 부설권을 주었다.
모오스는 인천에 사는 콜브란을 기술장에 임명하고, 미국 뉴욕에서 자금을 조달해 1897년 3월22일 인천 우각리에서 어렵사리 기공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모오스의 자금은 바닥난 상태였다. 노선 부설에 1년여, 한강 교량 건설에 2년여가 소요되고, 인천과 경성 양쪽에서 진행되는 공사가 순조로울 리 없었다.
정작 기공식에 불참한 채 모오스는 4월2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일본 외무대신의 허가 아래 경부철도발기위원회 위원장인 시부사와를 만나 부설권의 양도 의사를 전하고 있었다.
그 후 경인철도인수조합이 결성되고, 1899년 5월15일에 이르러 조합은 자본금 72만5000원, 사원을 15명으로 조직하고, 시부사와를 대표이사에 취임시켰다.
이들은 공사를 재개해 그해 9월18일 제물포∼노량진 사이의 33.2㎞를 개통했다.
일본이 경인선 건설에 집착했던 것은 인천이 조선 침탈의 교두보 역할을 감당케 하기 위함이었다.
일본 동양방적의 창업자 시부사와는 또 1934년 3월24일 인천 개항장 외곽인 만석동에 동양방적 인천공장을 차리고, 조업을 개시하였다. 당대 동양 최대의 시설이었던 동양방적은 국내 여러 곳에 분공장을 두었다.
훗날 이 공장은 인천항 제1독(Dock), 일본제분, 조병창 등과 함께 인천을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드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그 시부사와는 조선 총독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절친한 친구였고, 정한론자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평소 '훌륭한 호걸'이라고 칭했던 인물이었다.
과연 그가 조선과의 호혜를 위해 인천 개항장에까지 손을 뻗쳤겠는가?
1만엔 지폐 속에 재등장한 시부사와가 침탈의 선두에 서서 인천에서 이런 일들을 벌였다는 걸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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