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 韓中日 삼국지/주석, 총통, 천황 그리고 대통령(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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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기호일보(21. 5.27)
주석, 총통, 천황 그리고 대통령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역사소설가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수반은 주석(主席)이라 부른다. 사드 배치 문제로 기분 나쁘다고 말석(末席)이라 부를 수는 없다. 타이완의 경우 장개석 이래 총통(總統)이라는 칭호는 자연스럽다. 때로 히틀러를 연상할 수 있다 해서 기피하는 경우도 있으나 별로 개의치 않는다. 일본도 해방 이후 오랫동안 천황(天皇)이라 불러왔으나 대략 1990년대부터 일왕(日王)이라고 매스컴에서 표기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칭호는 여전히 천황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이 발발했고 일본은 당시 조선에 신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국서에 천황을 썼다가 거절당했다. 그 외교문서에 중국 황제만이 쓸 수 있는 ‘황(皇)’ 자가 있었고 메이지라는 일본 연호를 사용한 것이 그 이유였다. 구한말 사대주의라고 하기에 조선 조정의 대응은 그리 기분 나쁘지 않다. 실상 천황보다 일왕이라 쓰는 사람들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자존심도 상하고 식민지 시절 잔재 같아 기분이 나빠서 그런다고 한다. 마치 우리의 상전 같은 느낌이 들어 싫다고 하는 이도 많다.
지금 어떤 시대인데 ‘황’ 자 하나로 우리 대통령보다 높은 느낌이 든다는 걸까. 대한제국이라 국호를 바꾸고 고종이 황제 칭호를 쓰면서 연호를 사용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면 대등한 걸까?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7년여 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황제 지배체제를 끝낸 중국에서 원세개가 황제 부활을 꿈꾸다가 실패한 사건과 무관하게 우리 임시정부는 당당하게 공화국을 수립했고 국가수반은 대통령이라 했다. 중통령이나 소통령이 아닌 ‘대(大)’ 자를 썼다.
‘대’ 자도 사연이 있다. 구한말 인천에 세워진 전환국에서 신화폐를 발행할 때 ‘대조선(大朝鮮)’이란 국호 표기를 두고 당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원세개가 감히 조선에 ‘대’를 쓰다니 안 된다고 생떼(?)를 쓰는 바람에 표기된 동전을 쓰지 못하고 폐기했다는 웃기는(?) 과거를 생각해보면 대통령이란 칭호를 그리 가볍게 볼 일도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명시했다. 감격스러운 문장이다. 거기에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밝혔다.
일본의 헌법과 견줘 보면 정말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일본 헌법 제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그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다. 국민이 아니라 천황이 맨앞에 나오는 것이다. 제2조 역시 국민은 없다. ‘천황의 위는 세습되며 국회가 의결한 황실전범이 정하는 바에 따라 승계한다’고 돼 있다. 일본은 ‘천황’의 그늘 아래 억눌려 있고 민주주의 역시 그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호칭으로 부르든 간에 그들의 선택일 뿐이다.
‘왕’이라 불렀다고 기분이 풀어지는 그런 문제가 전혀 아니다. 우리와 가깝지 않은 나라거나 언짢은 기분이 드는 나라라 해서 해당국의 국가수반을 호칭으로 절하하려는 건 별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세계 각국이 일본의 천황(Emperor)라고 부르는 이유가 일본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 아니라 적대국가가 아니라면 그 나라의 호칭을 존중해주는 성숙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도 시진핑 국가주석에 대해 공산당 제1서기라는 호칭으로 불러 불편한 감정을 표시한 적이 있었다. 주석이라는 말보다 제1서기라고 하면 공산당 일당독재의 뉘앙스도 풍기면서 갈등의 상대방을 조금은 무시하는 기분풀이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그런 표현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되레 옹종해 보인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시진핑을 국가주석이라 부르지 않는다 해서 그가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아니랄 수 없고, 일본 천황을 일왕이라 부른다 해서 역사 인식이 투철하고 자존심 있는 한국인이 되는 것이 분명 아니다. 주석이든 총통이든 천황이든 무슨 위원장이든 간에 아니 옥황상제라고 하든 대총통이라 하든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불러주면 된다. 대한민국 민주시민의 자존심만 잃지 않는다면…….
2021.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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