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지용택(56회)칼럼]/항우와 유방(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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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21.11.10)
[지용택 칼럼] 항우와 유방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춘추전국의 혼란을 매듭짓고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는 중국 서북 변방에 치우쳤기에 문화 및 모든 조건에서 중원의 다른 나라에 미치지 못해 오랑캐라고 멸시어린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진은 어떻게 하여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을까? 군사적인 용맹도 있었지만, 그 배경에는 진나라의 25대 효공이 위(衛)나라 출신 상앙(商鞅, ?~BC338)을 재상으로 등용해 법가 사상으로 나라의 골격을 세우고 국부를 튼튼히 한 것을 비롯해 인재 등용에 문호를 크게 개방한 덕분이었다. 진의 역대 재상 중 널리 알려진 백리해(百里奚), 건숙(蹇叔), 비표(丕豹), 유여(由余), 범수(范睢), 채택(蔡澤) 등은 모두 진나라 출신이 아니라 타국 출신의 객경(客卿)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진의 부국강병책은 이사(李斯, ?~BC208)의 책략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런 이사조차 위기에 처한 순간이 있었다. 한(韓)나라가 진의 인력과 국력을 소모시켜 침략을 막기 위해 치수(治水) 전문가 정국(鄭國)을 보내 진에서 대규모 운하건설 사업을 일으키는 책략을 구사하려던 것이 탄로나자 진의 왕족과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 객경들을 모두 추방하자고 성토했다. 이때 이사는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는 자세 때문에 높아지고, 하해는 작은 물줄기도 버리지 않아 더 깊어진다(泰山不辭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는 문장이 담긴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지어 올린다.
이것이 바로 “바다는 모든 강물을 품는다”는 ‘해불양수(海不讓水)’의 정신이다. 진시황은 이사의 간언을 수용해 축객령을 취소하고 이사를 재등용했을 뿐만 아니라 300리에 달하는 대운하사업을 10년 동안 계속해 마침내 성공시키고, 그 이름을 ‘정국거(鄭國渠)’라고 불렀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진의 재상 25명 가운데 타국 출신이 17명이고 평민 출신도 9명이나 되었지만 진나라 출신은 단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진이 천하의 주인이 된 배경에는 이런 개방적 인사정책이 첫 번째 원인이었다.
그러나 진시황이 나이 50세에 급사한 뒤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趙高)가 결탁하여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황제에 올리고 장남 부소(扶蘇)와 황족들을 살해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2세 황제 호해는 아방궁을 더 크고 화려하게 조성하는 한편 만리장성 축성에 동원된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뤄 민심이 크게 이반되었다. 지도자가 백성의 어려움을 알지 못할 때, 민심이 돌아서고, 민심이 돌아서면 천하에 의지할 곳이 없는 법이다. 이것이 망국의 시초였다.
기원전 209년 천한 신분의 진승(陳勝)이 친구 오광(吳廣)과 함께 진나라 타도의 기치를 높이드니 출신과 지역은 다르지만, 21세의 한신(韓信, BC228?~BC196)을 비롯해 24세의 항우(項羽, BC232~BC202), 47세의 유방(劉邦, BC247?~BC195) 등 뜻있고 불만에 찬 사람들이 몰려들어 함께 일어섰다. 특히 유방은 진시황보다 겨우 3살 아래라 진시황의 하늘 아래에서 47년을 함께 살았던 사람이었다. 이때 진승의 깃발에 새겨진 내용이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달리 있겠는가(王侯將相寧有種乎)!”란 말이었다. 고대노예제 신분사회였던 당시로서는 천하를 뒤엎는 큰소리였다.
유방과 항우, 그리고 한신은 하나같이 역사에 회자되는 영웅이었지만, 결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항우는 유방과 싸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유방은 60만 대군을 동원해 항우의 팽성(彭城)을 공격하고도 겨우 3만 명의 병사를 거느린 항우에게 크게 패배해 20만의 병력을 잃고 몸만 빠져나와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이때 유방의 부모와 처가 포로가 되었다. 훗날 황제가 된 유방이 한신에게 반역죄를 씌워 옥에 가둔 뒤, “나 같은 사람은 군사를 얼마나 통솔할 수 있을까?”라고 묻자 “폐하께선 10만 정도면 적당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 자네는 어떠한가?”라고 묻자 그는 “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益善).”라고 했다. 유방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면서 어째서 내게 사로잡혔는가?”하자 한신은 “폐하는 군사를 거느리는 데는 뛰어나지 않지만 장수를 거느리는 데는 누구도 따를 수 없습니다. 이 점이 바로 저 한신이 폐하께 사로잡힌 이유입니다.”라고 답했다.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는 항우는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하여 진을 멸망시킨 뒤 제후들에게 공평하게 분봉(分封)하지 않았고 가까운 인척만 믿고 범증(范增) 같은 참모를 버려 고립을 자초했기 때문에 결국 유방에게 패했다. 항우가 해하(垓下) 전투에서 대패하고 오강(烏江)에서 자결할 때의 모습을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장엄한 한 편의 서사시라 할 만하다. 당시 항우의 나이 31세, 젊은 나이였다. 한신이 이끄는 유방의 60만 대군이 10만의 항우군을 포위 공격하여 병사 8만 명이 전사했다는 기록으로 당시 상황의 참혹함을 상상할 수 있다.
적군에게 포위된 항우는 장중(帳中)에서 비분강개하는 심정으로 술을 마시며 시 한 수를 지어 노래하니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한데”라고 시작하는 ‘해하가’이다. 항우에게는 우(虞)미인과 추(騅)라는 천리마가 있었다. <사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초한춘추(楚漢春秋)>에는 우미인이 이 노래를 듣고 항우를 위해서 자진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참으로 애절하다.
좁혀져 오는 유방의 포위를 피해 항우는 오강을 건너 강동으로 돌아가려 했다. 의인(義人)이 강둑에 배를 대고 기다리다가 그가 나타나자 “강동이 비록 좁기는 하나 땅이 사방 1000리에 이르니 또한 왕 노릇을 할 만한 곳입니다. 원컨대 대왕은 속히 배에 오르십시오.”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항우는 웃으며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 내가 강을 건너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전에 강동의 젊은이 8000명과 함께 출발했는데 지금 나 혼자 살아 돌아간다면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내가 5년 동안 타고 다니던 추를 차마 죽일 수 없으니 이 말을 그대에게 주겠다.”라고 말했다.
적진에 서있던 예전의 부하 여마동(呂馬童)에게 “너는 예전에 내 부하로 있던 자가 아닌가? 내가 듣건대 한나라가 나의 머리를 가져오는 자에겐 1000금의 상금과 1만호의 제후를 준다고 하니 내가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하겠다.”라고 말한 뒤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항우는 최후의 일각까지 우직하고 영웅다웠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역사적으로 유방보다 항우를 사랑했다. 남송(南宋) 때 여류시인 이청조(李淸照, 1081 ~ 1141?)는 ‘하일절구(夏日絶句)’에서 “이제 항우를 생각하는 것은 강동을 건너가지 하지 않았기 때문이네(至今思項羽, 不肯過江東)”라고 노래했다. 항우의 마지막 절개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결코 내가 용병을 잘못한 탓이 아니다”라고 말한 오만을 크게 비판했다. 결론적으로 항우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곁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훌륭한 지도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줄 수 있는 충고는 사람을 찾고, 백성을 존경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202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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