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인디텔과 그 이후(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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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2. 6.18)
조우성의 미추홀-인디텔과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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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인천일보와 인하대, 인천상공회의소, 새얼문화재단 등은 지역사회 발전을 모색하며 지역 최초의 정보통신망을 개통시켰다. 이름은 '인천'의 '인, '디지털'의 '디', '텔레폰'의 '텔' 자를 따 '인디텔'이라 했다. 서울의 '하이텔'에 이은 과감한 시도여서 각지에서 주목했고, 후발 통신망이 여기저기서 선을 보였다. 그에 참여했던 필자는 KBS TV에 나가 "정보통신망이 지역을 살려 나가는 촉매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었다.
단기간에 가입자가 3만여 명을 넘었고, '홍보관'을 찾는 이들도 많았다. 그같은 당찬 출발은 원영무, 문병하, 이기상, 지용택, 안길원 회장 등 지역원로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지원해 주어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산파역은 혼신의 열정을 쏟아 개설을 주도했던 배해영 인하대 교수와 인천일보 인디텔 요원들, 인하대전산소 직원들이 맡았다. 그들의 헌신은 지금도 잊지 못할 향기로 느껴진다. 함께 꿈꾸며 젊음을 불태웠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광속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인터넷'에 밀려 서울의 '하이텔'이 문을 닫는가 하면, 프랑스의 '미니뗄'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인디텔'의 운명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불가항력적인 귀결이었다.
최근 '하이텔'을 계승한 PC통신 사업체 '파란'이 다음달 31일을 기해 마침내 서비스를 종결한다고 발표했다. 문자 위주이던 PC통신이 사진과 그림은 물론 동영상까지 나오는 웹에 밀려 생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누구도 '인터넷'이 이렇게 발전하리하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인디텔의 불운'은 거의 운명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보환경을 돌아보면, 20여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인터넷'은 서울에 완전 점령당하고, 몇몇 지역지와 FM방송국 한 곳만이 분투하고 있을 뿐이다. 시대에 걸맞은 지역정보의 확산과 공유가 시급하다.
/객원논설위원
2012년 06월 18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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