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원현린(75회) 칼럼/희망의 새로운 철학을 기다리며(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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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기호일보(21.12.14)
희망의 새로운 철학을 기다리며
/원현린 주필(主筆)
원현린 주필(主筆)
묘서동처(猫鼠同處), 고양이와 쥐가 함께 기거한다는 뜻으로 도둑을 잡아야 할 사람이 도둑과 한 패거리가 됨을 일컫는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2021년 ‘올해의 사자성어’다.
이 신문은 해마다 12월이면 전국 대학교수들의 의견을 수렴해 한 해 동안 대한민국의 사회상을 사자성어로 압축, 공표한다. 고양이 묘(猫), 쥐 서(鼠), 한가지 동(同), 곳 처(處) 이 네 글자 성어를 추천한 최재목 영남대 교수는 "공직자가 위아래 혹은 민간과 짜고 공사 구분 없이 범법을 도모하는 것은 국가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 …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이 묘서동처 격이라면 한 마디로 막나가는 이판사판의 나라이다"라고 현 시대상을 지적했다.
교수신문은 2006년부터 연말 한 해의 사자성어처럼 연초에 새해를 맞아 바라는 바 소망을 담은 ‘희망의 사자성어’를 발표해 왔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生鮮)을 삶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무엇이든 가만히 두면서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政治)라는 2006년의 ‘약팽소선(若烹小鮮)’, 태평한 세상의 평화로운 풍경을 나타내는 2010년의 ‘강구연월(康衢煙月)’, 사악(邪惡)한 도리(道理)를 깨뜨리고 바른 도리를 드러낸다는 뜻을 지닌 2012년의 ‘파사현정(破邪顯正)’ 등이 그것이었다.
이처럼 새해의 사자성어가 희망 섞인 긍정의 사자성어라면 연말 사자성어는 절망 그 자체였다. 단 한 해도 연초의 바람이 실천된 적이 없었다. 두어 건을 비교해 본다. 일이 잘못됐을 때 남의 탓을 하지 않고 그 일이 잘못된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아 고쳐 나간다는 의미인 ‘반구저기(反求諸己)’가 연초 사자성어였다(2007년).
이러한 단어가 한 해 끝에 가서는 자신도 믿지 않는 말이나 행동으로 남까지 속이는 행위를 비유하는 ‘자기기인(自欺欺人)’으로 결말이 났다.
또 한 해에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강조할 때 인용되는 문구, ‘백성이 존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벼운 존재’라는 새해 사자성어 ‘민귀군경(民貴君輕)’도 연말이 되자 나쁜 일을 하고 남의 비난은 듣기 싫어서 귀를 막지만 소용이 없음을 뜻하는 ‘엄이도종(掩耳盜鐘)’으로 전혀 다른 변이종이 돼 나타났다(2011년).
해마다 새해 아침의 희망이 한 해 끝에 가서 절망으로 결론지어지곤 하는 우리 사회다. 어쩌면 그렇게도 교수신문의 사자성어 기획이 시작된 지 20년이란 장구한 기간 동안 한 해를 결산하는 문구가 단 한 번도 부정적 의미가 아닌 긍정의 네 글자로 선정되지 못하고 있는지 자괴감마저 든다.
교수신문은 연초 ‘희망의 사자성어’를 ‘희망의 노래’로 대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나오는 문구, 꽃이 만발하고 열매가 풍성하다는 말인 ‘곶 됴코 여름 하나니’(2016년)와 아무리 가물어도 시내를 이루어 바다에 간다는 고어(古語)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2017년)를 선정했었다. 이도 2회에 그치고 2018년부터는 선정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연말의 사자성어가 나는 옳고 남은 모두 다 그르다는 ‘아시타비(我是他非)’였다. 요즘 말로 ‘내로남불’이다. 여전히 개선되는 분야가 단 한 군데도 없다. 한 해의 사자성어가 우리 사회 자화상이라 하지만 실은 정치권을 풍자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정작 각성해야 할 정치권 인사들은 그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참과 거짓이 멋대로 조작돼 뒤바뀌곤 하는 사회다. 실체적 진실 발견을 통해 정의(正義)를 구현한다는 수사기관과 사법부는 그 사명을 잊은 지 오래다. 실종된 정의를 찾을 길이 없다. 목하 대선(大選) 유세 소식을 듣고 있자니 어느 말이 진짜이고 어느 말이 가짜인지 국민들은 헛갈린다.
정책 대결은 사라지고 상대 헐뜯기는 갈수록 가관(可觀)이다. 하나같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들이다. 국민의 무게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나온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하며 진영 간 ‘네 탓’ 공방(攻防)만이 치열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온통 암흑 속에 뒤덮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도(道)마저 땅에 떨어진 상태, 말 그대로 혼용무도(昏庸無道) 사회다. 희망의 새로운 철학이 요청된다.
입력 202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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