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그때 그시절2탄
작성자 : 이은용
작성일 : 2005.05.21 18:08
조회수 : 2,796
본문
![]() 미스코리아 선발대회(1952-01-21) ![]() ![]() ![]() ![]() ![]() ![]() ![]() ![]() ![]() ![]() ![]() ![]() ![]() ![]() ![]() ![]() ![]() ![]() ![]() ![]() ![]() ![]() ![]() 칼을 찬 순경이 죄인을 감시하고 있고, 오른쪽 이발소 간판 밑에 가로등이 보인다. ![]() 앞의 종탑은 명동성당이며, 뒤의 흰 3층건물은 샬트 수녀원이다. ![]() 일본에 의해 황근우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조선호텔을 건축하기 전의 모습이다 ![]() 당시 충무로와 소공동은 가장 번화한 거리이다. 중앙의 누각은 현 조선호텔에 남아있는 황궁우이다. ![]() 이곳은 나룻배를 건조하던 장소로 유명하다. 줄무늬 상의를 입은 소년과 목판에 엿을 담은 어린 엿장수가 엿을 팔고 있다. 소년의 옷차림이 당시 유행에 민감했음을 보여준다. ![]() 왼쪽에 밤섬이 보이고, 이곳 마포 나루터는 화물 선착장으로 유명했다. ![]() 진고개는 현재 충무로 2가의 고갯길로서 흙이 몹시 질어 진고개라는 지명이 생겼다. 명동성당과 북악산이 보인다. 1906년 8척 가량 파내어 길을 닦고 높이 5척의 방주형 수멍을 묻었다. 이것이 서울시내 수멍도랑의 시초이다. ![]() 당시 이거리는 도성에서 제일 넓은 거리였다. 왼쪽에는 통감부 통신관리국이 있고, 오른쪽 건물엔 일본관리인과 군부대가 있었다. ![]() 소공동 주변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약방이 많았는데 일흥노약방 뒤로 원구단 누각이 보인다. ![]() 당시 이곳에는 곡물창고가 있었고 왼편의 건물은 전차수리소이다. 멀리 보이는산은 인왕산이다. ![]() 뒤의 누각은 경복궁 동십자각이며 백악산 밑에서 경복궁을 거쳐 청계천과 합류하였다. 하천 주변에 주민들은 이곳을 빨래터나 목욕터로 이용하였다 ![]() 청계천은 서울 중심을 흐르는 하천이며 말그대로 물이 맑아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이용되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사진이다. ![]() 각종 채소들이 집산되어 시내로 유입된다. 이곳은 일본인들이 의주통이라 불렀다. ![]() 충무로 입구에서 바라본 명동성당이다. 당시 충무로는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 이곳은 저지대라 비가오면 진흙땅이 된다. 멀리보이는 건물은 약현성당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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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동철님의 댓글
와 ! 좋은자료 입니다 관리잘하시면 후배들에게 좋은 교육자료가 되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