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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Ramana Maharshi - 펌
본문
Ramana Maharshi
라즈니쉬도 붓다나 예수, 크리슈나와 같은 존재라고 극찬하였던 라마나 마하리쉬는 1879년 12월, 남인도 타밀지방의 티루출리에서 태어났다.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아버지의 사망후 삼촌집에서 중학교 과정을 수학하였다. 17세 되던해, 평범한 소년으로부터 성인으로 변모하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내적 체험은 그에 따르는 외적 변화도 수반하게 된다. 1896년 집을 떠난 이후 1950년 4월 14일 영면하게 되기까지 아루나찰라 산의 사원에서 수도하였으며 1916년부터 1922년까지 스칸드 아쉬람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빛을 밝혀주었다.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가르침을 편 그는 <자아탐구>를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최고의 길이라고 하면서 특별히 이길을 가기가 어려운 사람들에게만 헌신의 길을 권유하였다. |
<나>는 누구입니까?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시각,청각,후각 미각, 촉각 등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내가 아니다. 말하고,움직이고, 붙잡고,배설하고, 생식하는 다섯 가지 운동기관은 내가 아니다. 호흡 등의 다섯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프라나(Prana)등의 다섯 가지 기(기운)는 내가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도 내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입니까 ?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고 나면 그것들을 지켜보는 각성(awareness)*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나다. - 소아
(주해) * 이 각성이 <진정한 나>, 즉 <진아>다. 그러나 이 각성이라는 표현은 진아의 세 가지 측면인 실재, 의식, 지복 중에서 의식의 측면이 강조된 표현이다.
그 각성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
그것의 본질은 실재(Sat)-의식 (Chit) -지복(Ananda)이다.
어느 때에 진아(진정한 나)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인식이 사라질 때 진아를 깨달을 수 있다.
현상계가 실재한다고 인식하는 한은 진아를 깨달을 수 없습니까 ?
그렇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인식과 진아에 대한 깨달음과의 관계는 뱀과 밧줄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다(길을 가던 사람이 길에 떨어진 밧줄을 뱀이라고 잘못 오인하는 경우).그 뱀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밧줄에 대한 을바른 인식이 생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그릇된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한 진아를 깨달을 수 없다.
어느 때에 현상계가 사라집니까?
* 객관 세계, 대상 세계. 주관과 분리된 객관으로서 인식되는 세계. 여기에서는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는 이 물질 세계는 물론이고, 여려가지 의식 차원에서 객관화되어 나타나는 모든 현상 세계를 통털어서 의미한다. 예컨대 블교식으로 설명한다면 욕계, 색계,무색계의 삼계를 통털어서 지칭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때로는 좁은 의미로, 물질 세계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현상계에 대한 모든 인식과 행위의 원인은 마음이다. 따라서 마음이 사라지면 현상계도 사라진다.
마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
마음이란 진아 안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힘이다. 그것은 모든 생각을 일으킨다.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각이 바로 마음의 본질이다. 또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현상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꿈이 없는 깊은 잠을 잘 때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 따라서 현상계도 없다. 그러나 깨어 있을 때나 꿈꿀 때에는 생각이 있으며 따라서 현상계도 있다. 거미가 몸 밖으로 거미줄을 뽑아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듯이 마음도 바깥으로 현상계를 투사했다가 다시 안으로 거두어들인다. 마음이 진아 밖으로 나올 때 현상계가 나타난다. 따라서 현상계가 나타날 때 진아는 나타나지 않으며 진아가 나타날 때 현상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의 본질을 끝까지 파고들어가면 마음은 진아를 떠나서 사라져 버린다. 진아가 바로 아트만 Atman 이다. 마음은 항상 무엇엔가 의존하고 있으며 흘로 존재할 수는 없다. 흔히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마음이다.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탐구해 들어가야 합니까?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생각은 <나>라 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 다른 생각들이 일어난다. 이는 마치 l인칭이 있고 난 연후에 2인칭과 3언칭이 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까 ?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계속 탐구해 들어감으로써 가능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계속하면 다른 생각들은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마치 다른 장작들을 다 태운 뒤에 스스로도 타버리는 불쏘시개 장작처럼 사라지는 때가 온다. 그러면 그때 깨달음이 드러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계속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놓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나에게>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이렇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하면 마음은 점점 그 근원으로 향하게 되고 생각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까 ?
이 방법 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없다. 다른 방법을 통해서 마음을 조절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호흡조절을 통해서 마음을 가라앉힐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흡이 조절되는 동안만이며 호홉이 흐트러지면 마음이 다시 작용하기 시작한다. 사실 마음과 호흡의 근원은 같다. 마음의 본질은 생각이고 최초의 생각은 <나>라는 생각이며 이것이 바로 에고 ego 인데, 바로 이 에고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호흡도 시작된다. 따라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홉이 조절되고, 호흡이 조절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깊은 잠을 잘 때에는 마음이 사라져도 호흡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신의 뜻이다. 그럼으로써 육체가 유지될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 육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깨어 있는 상태와 삼매 상태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조절된다. 호흡은 거치른 형태의 마음이다. 마음은 죽기전까지 육체안에서 호흡을 유지하며, 죽음과 동시에 호흡을 가지고 가버린다. 따라서 호흡조절 훈련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도움이 도지만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호흡조절과 마찬가지로 신의 형상에 대해 명상을 한다든가, 만트라를 외운다든가, 음식을 절제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신의 형상에 대해 명상을 하거나 만트라를 외우는 것은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마음에 여러 가지 생각이 잡다하게 있으면 생각 하나하나의 힘은 약해지지만 한 생각만 있으면 마음이 집중되어 그 힘이 강해진다. 이러한 마음상태에서는 자아탐구가 쉬워진다.
또,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지켜야 할 것 중에서는 과일, 야채 등 채식을 위주로 하는 식사를 적당량 섭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도 자아탐구에 도움이 된다.
대상에 대한 생각들이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모든 생각들이 언제 없어집니까 ?
진아에 대한 명상이 깊어짐에 따라 그 생각들은 사라져 간다.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 계속되어 온 이 대상에 대한 생각들이 모두 없어지고, 순수한 진아로서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 앞에서 설명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계속 진아 안으로 몰입하는 방법을, 라마나는 <자아 탐구)라고 하였다.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느냐를 따지지 말고 진아에 대한 명상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설사 큰 죄를 지은 죄인일지라도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될 수 있겠느냐>라고 생각하여 괴로와해서는 안된다. 우선 <나는 죄인이다>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진아에 대한 명상에 모든 힘을 기울여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선한 마음이 따로 있고 악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세속적인 대상이나 보통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들에 쏠리게 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에게 나쁘게 대해도, 그들에게 증오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욕망과 증오는 둘 다 피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사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이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남에게 베풀지 않겠는가? 자신의 자아가 나타나면 모든 것이 나타나고 자아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그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또한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어디에서든 살 수 있게 된다.
자아 탐구는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합니까 ?
마음 속에 대상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누구인가> 라는 탐구가 필요하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즉시 이 탐구를 통하여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진아를 깨달을 때까지 완전히 진아에 몰입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요새 안에 적이 남아 있는한 그들은 언제고 다시 공격해 오겠지만, 나타나는 족족 없애 버리면 요새는 결국 우리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진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오직 진아만이 실재하며 현상계, 개아*, 신**등은
*개체적 자아, 서로 분리되어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개개의 생물체 내지는 사물.
** 라마나는 신이라는 말을 두 가지로 사용하였다. 하나는 구체적인 이름과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과는 분리된 존재로서의 신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들이 진아를 인격적인 관점에서 인식하는 개념으로서의 신이다. 라마나는 이러란 개념으로서의 신을 진아와 동의어로서 자주 사용하였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다.
진아 안에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 이 셋은 동시에 나타났다가 동시에 사라진다. 진아는 <나>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바로 그곳이며 <침묵>이라 고도 한다. 진아가 곧 현상계이고 진아가 곧 개아이며 진아가 곧 신이다. 진아는 모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입니까?
자기 자신을 진아, 즉 신*에게 완전히 던져 버리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다. 자기 자신을 신에게 던진다는 말은 진아에 대한 생각 외에는 어떤 다른 생각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진아 안에 몰입한다는 뜻이다.
짐이 되는 것은 모두 신에게 맡겨라. 그가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이다. 지고한 신의 힘이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는데, 왜 우리들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가? 기차 를 타면 기차가 모든 짐을 다 운반해 준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계속 짐을 머리에 이고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왜 짐을 기차에 내려놓고 편히 쉬지 못하는가?
* 여기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된 신이다.
무집착이란 무엇입니까 ?
생각이 일어날 때 아무런 찌꺼기도 없이 그 생각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무집착이다. 진주를 캐는 사람이 허리에 돌을 달고 바다 밑바닥에 내려가서 진주를 캐오듯이 우리는 무집착을 달고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 진아라는 진주를 캐내야 한다.
신 또는 스승이 인간으로 하여금 구속에서 벗어나도록 해 줄 수는 없습니까?
신과 스승은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줄 뿐이지 벗어난 상태를 주지는 않는다. 사실, 신과 스승은 다르지 않다. 일단 호랑이의 입 속으로 들어온 먹이는 다시 빠져나갈 수 없듯이, 일단 스승의 자애로운 은총 속으로 들어온 제자는 스승에 의해 구원받게 되어 있다. 물론 신이나 스승이 제시한 길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따라와야 한다, 자신의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자신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깨어 있는 상태와 꿈꾸는 상태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
깨어 있는 상태는 길고 꿈꾸는 상태는 짧다. 그것말고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그 상태에서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둣이 꿈꾸는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꿈꾸는 상태에서 마음은 다른 체(body)*를 가진다. 또 어느 상태에서나 생각과 이름과 형상들이 동시에 나타난다.
해탈을 구하는 사람이 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마음은 의식의 차원이 변화함에 따라 각 의식 차원에 맞는 체(body)를 갖게 된다. 깨어 있을 때 가지고 있는 것이 육체 physical body 이고, 꿈 속에서는 에테릭 etheric, 에스트랄 astral 체를 갖거나 간흑 멘탈 mental 체를 갖기도 한다. 이 체 (body) 에 대한 설명은 라즈니쉬의 [영혼의 가르침] (신종현 역)의 6장과 7장에 자세히 나와 있다.
경전에서는 해탈을 얻으려면 마음을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결론은 마음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며 이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더 이상 책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진아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으로 탐구해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이것이 책을 통해서 가능하겠는가 ? 누구나 자기 자신의 지혜의 눈으로 자기 자신의 진아를 알아야 한다. 진아는 다섯 가지 감각의 내부에 있으며, 책은 그들의 밖에 있다, 따라서 책 안에서 진아를 찾아봐야 소용이 없다. 자신이 배운 것을 다 잊어버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
행복은 바로 진아의 본질이다. 행복과 진아는 다르지 않다. 현상계의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 우리는 무지로 인하여 어떤 대상으로부터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이 밖으로 향할 때, 그것이 경험하는 것은 불행뿐이다. 어쩌다가 마음이 바라는 바가 완전히 달성되면, 그 마음은 제자리로 돌아와 행복을 즐기지만, 그것 역시 진아의 행복이다. 즉, 깊은 잠을 잘 때, 삼매에 들었을 때, 기절했을 때, 그리고 마음이 바라는 바가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 마음은 내면으로 향하면서 순수한 진아의 행복을 즐기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행복과 불행을 번갈아 경험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 있다가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오면 시원함을 느낀다. 그런데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그늘 아래에서 안주한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아를 떠나지 않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현상계를 헤매며 불행을 느끼다가, 어쩌다가 한 번씩 진아로 돌아와서 행복을 경험한다. 사실 현상계란 생각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현상계가 사라질 때, 즉 아무런 생각이 없을 때 우리는 행복을 경험하텨 현상계가 나타날 때 불행을 경험한다.
무욕과 지혜의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
무욕이 지혜다. 둘은 다르지 않다. 무욕이란 마음이 어떠한 대상으로도 향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지혜란 마음속에 아무런 대상도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진아가 아닌 것을 구하지 않음이 무욕이고, 진아를 벗어나지 않음이 지혜다.
자아 탐구와 명상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
자아 탐구는 마음을 진아 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명상은 자기 자신이 브라흐만 Brahaman*, 즉 실재-의식-지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힌두교에서의 절대자, 여기에서는 진아와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해탈이란 무엇입니까 ?
구속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탐구해 들어가서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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