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부모님 살아 계실때 꼭 해드려야할 45가지 02
본문
둘 : 비밀통장 - 목숨 걸고 용돈 드리기
아침 운동을 위해 나선 어둑한 새벽길에서 또 영우 씨를 만났다.
"아니,또 밤샘했어요? 몸 좀 위해주세요."
"젊어서 너무 위했더니 나이 먹어 이 고생이네요."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인사를 받는 그와 따끈한 우동 한 그릇으로 새벽을 맞던 어느날, 나는 그의 흐뭇한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
영우 씨는 삼형제중 막내다. 머리가 좋고 1등을 도맡아 수재로 이름을 날렸던 큰형, 우직하고 끈기
가 있어 집안의 든든한 기둥이었던 둘째형, 두 형들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자랑거리였다.
그리고 막내인 그가 있다. 형들처럼 드러나게 잘난 구석이 없던 영우씨는 두형의 그림자에 짓눌려 지
내야만 했다. 두드러진 제능 대신 여리고 예민한 감성을 지니고 있던 그로서는 늘 자신이 초라하기만 했
고, 그것은 안으로 깊은 상처가되었다.
영우 씨는 집안에서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사춘기에 접어들자 마음은 갈피를 못잡고 이리
저리 흔들렸다. 바에 나가 주먹다짐도 하고 술에 절어 지내기도 했다. 그런 행동들은 자신을 가족으로부
터 더더욱 멀어지게 했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불안감과 외로움을 잊으려 가까이 하게 된 술은 실수를불렀고, 그런 막내를 지켜봐야 했던 부모님들은
늘 걱정이 떠나질 않았다. 수렁 속을 헤매던 시절이었다.
요동치던 세월의 파도는 이제 그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살던 집까지 날려버려 강박적으로 벌였던 일
들도 이제 모두 접었다. 뒤늦게 적성을 차차 직장에 들어간 후 2, 3일에 한번은 밤샘을 애야하는 힘든 여
건 속에서도 잘 버텨 나가고있다. 알뜰한 아내 덕에 새로 아파트도 장만했고, 빠듯하지만 저금도 붓고
있다.
그 세월 동안 부모님은 나날이 쇠약해지셨고 마음도 많이 지치셨던 모양이다. 남은 생을 고향의 흙 속
에서 살겠다며 낙향하신 것이 두어 해 된다. 간혹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아직도 막내에 대
한 염려와 근심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다. 예전 같았으면 반발했을지도 모른다.
"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세요?"하면서.
하지만 이제 그의 나이도 불혹을 넘었다. 고된 현실 속에서 남자의 역할,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서도 깊
이 돌아볼 수 있었다. 부모님 가슴에는 똑똑한 큰형이나 든든한 둘째형만으로 체울 수 없는 자신만의 빈
자리가 있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흐린 영광등의 낮은 소음까지 감지되는 깊은밤. 어느덧 창밖의 차 소리마저도 뜸해지고 있을 때였다.
설날 귀성객들은 이미 고향집의 따뜻한 온기 속에서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지만, 이번 설에도 영우 씨
는 고향에 내려가지 못한 채 밤샘 근무를 하고 있다.
컴퓨터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오른쪽 책상 서랍으로 향한 영우 씨는 살며시 서랍을 열었다. 그의 손
이 서랍속에 쌓인 몇 개의 노트 사이를 헤집고 저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잠시후 안쪽 깊숙이 넣어두었
던 통장이 그의 손에 들려 나왔다.
통장을 펼쳐보는 영우 씨의 얼굴에 기쁜 빛이 어렸다. 흐린 불빛도, 그리고 점점 노안으로 변해가는 눈
에도 그 숫자는 선명히 들어왔다. 꼭 한번 남았다. 다음 달이면 적금을 탈 수 있다. 먹고 싶은 음식 안 먹
고, 옷태가 좋은 그가 입고 싶은 옷 안 입고 아껴 모은 돈이다. 이번 설을 아버지와 같이 보내지는 못하지
만, 다음 달에는 이 적금을 타서 아버지 앞에 내놓고 그동안의 일에 대해 용서를 빌리라.
이미 새해는 밝아오고 있었다. 창밖에 어슴푸레 여명이 비치기 시작했다. 영우 씨는 참으로 오랜만에 진
정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기분 이었다.
아침편지 고도원의
부모님 살아 계실때 꼭 해드려야할 45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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