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원현린(75회) 칼럼/전가통신(錢可通神) 유감(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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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기호일보(24. 4.26)
전가통신(錢可通神) 유감
/원현린 주필(主筆)
원현린 주필(主筆)
법조계(法曹界)를 비롯해 우리 사회는 여전히 ‘돈 있는 사람은 죄가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죄가 있다’는 뜻의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전근대적 문구가 잔존한다. 진작에 사라졌어야 할 용어다.
돈만 있으면 귀신과도 통할 수 있다는 뜻의 ‘전가통신(錢可通神)’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금전의 위력으로 못할 게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어쩌면 이 네 글자가 온갖 비리로 얼룩져 혼탁한 오늘날 우리 사회를 대변하는 초상(肖像)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오늘이 ‘법의 날’이기도 해 성어에 얽힌 고사 유래를 전재(轉載)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성싶다.
당(唐)나라 장연상(張廷賞)은 경사(經史)를 많이 읽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정통했다. 때문에 그의 벼슬길은 매우 순탄해 조정 대신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그가 하남 부윤(府尹) 벼슬을 하고 있을 때 굉장히 중대한 사건을 처리하게 됐다.
이때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 중에는 전직 고관과 지방 유지를 비롯해 적지 않은 황제의 친척도 끼어 있었다.
사건 처리에 공평하기로 이름이 난 장연상은 이 사건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 부하 직원들에게 아직 출두치 않은 범인들을 모조리 체포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때 어느 관료 한 사람이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니오?" 하고 그를 만류했다.
장연상은 냉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임금의 녹(祿)을 먹는 자는 임금의 근심을 감당해야 하고, 백성의 봉(俸)을 받는 자는 백성의 마음을 달래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무슨 고관 대작이니 황친국척(皇親國戚) 할 것 없이 내 손에서는 모두 중하게 다스려질 것입니다."
명령이 하달된 이튿날 출근해서 보니 부윤 공관의 책상 위에 첩자(帖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열어 읽어 보니 "3만 꿰미의 돈을 바치오니 고충을 헤아려 살피시어 더 이상 본 사건을 추궁치 말아 주기 바랍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장연상이 읽어 본 후 안색이 돌변하면서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해 손에 쥔 종이쪽지를 마룻바닥에 내던졌다. 그의 부하들이 공포에 질려 사지를 덜덜 떨며 쥐 죽은 듯 아무 소리도 못했다. 아마도 그들이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다.
그런 후 이튿날 또 하나의 첩자가 놓여 있었다. "돈 5만 꿰미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더욱더 화가 난 장연상은 이틀 안으로 끝내라고 다그쳤다.
다음 날 아침에 또 첩자가 놓여 있었는데 "돈 10만 꿰미입니다(錢十萬貫)"라는 내용이었다. 10만 꿰미의 큰돈이 남몰래 장연상의 손아귀에 전해지자 그는 이 사건을 무마시켜 버렸다. 하마터면 영어(囹圄)의 신세가 될 뻔한 사람들은 법망에서 벗어나 태연히 한가한 나날을 보내며 지냈다.
이 사건이 뇌리에서 거의 잊혀질 무렵, 그의 부하 직원이 어찌된 영문이냐고 물었다. 장연상은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 없이 자랑 삼아 말했다. "10만 꿰미의 돈이라면 가히 신(神)과도 통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네. 세상에는 되돌리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를 또 받아들이지 않으면 화를 입게 되는 것이니 두려워서라도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네(錢至十萬 可通神矣 無不可回之事 吾懼及禍 不得不止)."
지금 이 시각에도 10만 꿰미의 돈더미에 묻혀 지나가는 희대(稀代)의 사건이 그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신만이 알 뿐이다. 법은 신분이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고 먹줄은 굽은 것을 따라 휘지 않는다(法不阿貴 繩不撓曲)고 했다. 듣기 좋은 이 번듯한 문장은 실은 법조 수장들의 취임사에서나 나오는 단골 문구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법을 제정하는 자가 법을 어기기를 여반장(如反掌)으로 하면 이는 모순이 아닌가. 한(漢)나라 간웅(奸雄)으로 칭해지는 조조(曹操)도 자신이 군령을 어겼다 해 "나 자신이 법을 만들고, 나 스스로 그 법을 범하면 어떻게 사람들을 복종시키겠느냐(吾自制法, 吾自犯之, 何以服衆)" 하고는 스스로 목을 배려 하지 않았던가.
필자는 해마다 법의 날이 돌아오면 "우리는 과연 법치국가(法治國家)인가?" 하고 회의에 젖곤 한다. 법의 날 제정 취지는 국민의 준법정신을 앙양시키고 법의 존엄성을 고취하기 위함이다. 오죽하면 ‘사법(死法)의 날’이 어떨까라는 생각도 해 봤다.
입력 202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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