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원규(65회) 단편소설 [늙은 악사]
본문
단편소설 늙은 악사
이 원 규
군산대학은 규모는 작지만 나무가 무성했다. 싱싱하게 물 오른 나무들이 목을 뽑고 강당 안을 기웃거리다가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손을 흔들었다. 나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서 강연을 했는데 그것은 청중이 내 말에 열중하는데다 그 싱그러운 가지들이 유리창을 통해 시종 눈에 들어온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성공적으로 초청강연을 마쳤다.
대학 동기인 김교수는 내가 담배 한 대를 태우기가 무섭게 자기 차에 태웠다. 그의 동료 교수 두 사람도 뒷자리에 탔다.
“내일 강의가 없다는 걸 아니까 서울로 내뺄 생각은 말게.”
나는 차창 밖으로 천천히 뒷걸음치는 대학 정문을 바라다가 “그러지 뭐”하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목이 칼칼해서인지 내 목소리는 탁하게 울려 나왔다. 등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5월 초순치고는 기온이 높은 날이었는데 한 시간 반 동안 강연에 열중했던 것이다. 강연을 잘 끝냈다는 것에서 오는 나른함과 함께 갈증이 났다. 물이든 술이든 나는 어서 목을 적시고 싶었다.
승용차는 어선 부두가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을 천천히 달렸다. 초여름의 긴 낮이 바다 쪽으로 허리를 눕히며 기울어 가고 있었다. 먼바다 쪽 하늘은 은은히 낙조에 물들고 부두에 정박한 어선들의 마스트 위로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 나는 차창을 조금 열고 비릿한 냄새를 싣고 밀려들어오는 바람을 들이마셨다. 뿌웅 뿌웅 어디선가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김교수가 나를 돌아보았다.
“횟집으로 가는 게 아냐. 내가 단골로 다니는 괜찮은 집이 하나 있지.”
나는 어떤 집이냐고 묻지 않았다. 김교수가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내가 수없이 술을 사긴 했지만 하룻밤 술자리가 어디면 어떠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김교수는 우리가 처음 만난 청년 시절부터 용케도 좋은 술집을 찾아내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군산보다 더 큰 항구 도시인 인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터라 바다나 부두에 대해 심드렁한 편이었다. 아무튼 그가 어디로 데려 가건 나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김교수가 카라디오를 틀었고 피아노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나왔다.
“자넨 소문난 오디오 마니어지. 이 곡은 누가 작곡한 건가?”
김교수가 물었다. 나는 그가 몹시 심심허거나, 뒷자리에 앉은 동료 교수들에게 나를 더 자랑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리스트의 소나타군. 리스트는 수많은 피아노곡을 작곡했지만 이상하게도 소나타는 이거 하나야. 한 개의 악장이라 작곡한 뒤에 말도 많았지. 이게 환상곡이지 소나타냐구 말야. 지금 나오는 건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1975년에 녹음해서 필립스에서 찍어낸 건데 뼈대가 굵고 설득력인 강한 명연주라는 평을 듣는 명음반이지.”
“허 참,국문과 교수가 줄줄 잘도 읊어 대는군.”
김교수는 씩 웃으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뒷자리에서도 한 마디 했다.
“이삼십 초 듣고 나서 분석하시다니. 윤교수님, 대단하시군요. 음대 교수들을 잡아먹으시겠어요.”
김교수의 승용차가 멎은 곳은 ‘해송(海松)’이라는 간판을 단 꽤 큰 청기와집 앞이었다. 넓은 정원에 노인처럼 허리가 굽은 노송 몇 그루가, 담장을 따라 핀 채송화, 봉숭아, 분꽃 따위 꽃 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어린 시절의 꽃들. 지금은 요정으로 쓰이고 있는 이 집이 지난날 중선배를 여러 척 부리는 선주의 소유였을 것이라는 짐작이 내 머리를 스쳐갔다. 포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인데다 어딘가 과거의 영화를 세월 속에 묻고 있는 집인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몸집이 좋은 선주가 정원에 서서, 귀항하는 자기 배를 원통형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상상. 그러나 내 상상은 금세 끝났다. 앞차로 출발한 김교수의 동료 교수들이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들은 미리 도착해 소나무 그늘 밑에 놓인 평상에 앉아 부두의 낙조를 바라보다가 일어선 것이었다. 내가 아까 그들을 못 본 것은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처럼 부두의 낙조를 바라본 때문이었다.
언덕 위의 요정이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고 해서 나를 대번에 사로잡았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서울의 요정에 비해 자별할 것도 없고 수십만 인구가 사는 이 도시에 여기보다 좋은 곳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눈매가 서글서글한 여주인이 예닐곱 명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반색하며 나와 일행에게 알은 체를 했고 김교수와는 가벼운 포옹까지 했다. 우리는 기다란 툇마루 아래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십장생 병풍이 쳐진 방이었다. 곧 준비된 술상이 들어왔고 우리는 여자들과 짝을 지어 앉았다.
“너 오늘 밤 윤교수 잘 모셔라. 오늘의 주빈이시니 객고를 잘 풀어 드려야 한다.”
김교수가 허리가 가는 내 파트너 미스 장에게 말했다. 내가 호텔에서 잘 것이니 동침까지 해야 한다는 뜻 같았다. 미스 장은 안기듯 내 곁으로 다가왔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미스 장이 몸에 좋은 안주를 열심히 골라다 내 입에 넣어 주었고 초장 술에 약한 나는 든든히 속을 채우며 술을 마셨다. 김교수와 그의 동료들은 이 날의 나의 강연 ‘역사적 진실과 시적 상상력’에 대해 인사치례식의 칭송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방대학 교수의 일이 따분하며 연구비가 적다고 투덜거리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투덜거렸다면 그것을 열심히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는 일이 정말 나에게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김교수의 안분지족이 내게 조금은 고마운 일이었다. 지방대학에 몸담고 있는 그가 모교로 자리를 옮기려 안달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늘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나를 붙잡고 한바탕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스무 살 청년에 만나 20년 동안 쌓아온 우정도 크지만 모교 교수가 지방대학에 있는 동창들에게 기울여야 하는 배려가 있었다. 사실 그것 때문에 멀리 군산까지 와서 강연을 한 것이었다.
기분 좋게, 약간은 지루하게 양주 한 병을 거의 비워 갈 즈음이었다. 밤 공기를 적시고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에 나는 술상을 향해 웅크렸던 어깨를 폈다. 이난영이 부른 대중가요의 고전 ‘목포의 눈물’이었는데 흐느끼듯 축축한 음색의 그 소리는 음향 기기를 통해 나오는 재생음이 아니라 생생한 연주로서 내가 아까 바다의 낙조를 바라보았던 안뜰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이거 때문에 나를 여기 데려 왔구나 하는 뜻으로 나는 눈을 끔벅거리며 김교수를 바라보았다. 김교수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가에 앉은 아가씨에게 손가락을 까딱해 보였다. 그 아가씨는 금방 알아듣고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사이 밤이 되어 바깥은 어둠이 짙었는데 안뜰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정원등이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가운데 백발에 흰옷을 입고 등이 굽은 노인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예순 고개를 넘었을 늙은 악사가 초여름 밤의 정원에서 연주하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열댓 걸음 정도 떨어져 표정은 볼 수 없었으나 나는 평생을 연주하며 살아 온 사람이라는 것을 그의 연주 모습과 깊고 그윽한 음색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나는 강렬한 자석에 끌리듯 늙은 악사의 연주에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목포에 와서 ‘목포의 눈물’을 저런 연주로 듣는구나 하고 잠시 이 곳이 목포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내가 착각임을 깨달은 것은 그 곡이 끝나고 미스 장이 “교수님, 신청곡을 결정하세요.” 하는 말을 여러 번 거듭하다가 소매를 잡아당길 때였다.
내가 고개를 방 안으로 돌리자 김교수가 말했다.
“괴짜 노인이야. 술집에 와서 연주를 하는 주제에 꼭 흰 양복을 입지. 마당에서 한 곡을 켜고는 각 객실당 한 곡씩만 신청곡을 받는단 말야. 팁을 많이 줘도 절대로 손님방에는 오지 않아. 자네가 주빈이니까 한 곡 정해 봐.”
나는 “‘추풍령’이라는 노래가 좋겠어.”하고 말했다. 내가 딱히 이 노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왜 그런지 그냥 제목이 떠올랐다. 미스 장이 작은 쪽지에 그것을 적었고 김교수가 그녀에게 만원 짜리 한 장을 내밀었는데 그녀는 그것들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가 악사의 발치 아래 놓인 바이올린 케이스에 돈을 넣고 쪽지를 건네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른 손님들의 방에서 나간 여자 둘이 그녀와 똑같이 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문 앞으로 자리를 옮겨 목을 뽑고 다른 방을 내다보았는데 우리들처럼 문을 열고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늙은 악사는 다시 신청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역시 흘러간 대중가요였지만 노인의 바이올린 소리는 마치 영혼의 깊은 곳에 고여 있다가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탁월한 기교가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호소력이 강했다.
나는 바이올린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늙은 악사의 머리 위에 뜬 달을 보았다. 아니, 그것은 달이 아니라 정원등이었다. 축구공 만한 우윳빛의 둥근 정원등은 암청색 쇠기둥의 새의 목처럼 굽혀진 끝에 달려 있었는데 보름달인가 착각될 정도였다. 늙은 악사는 그 밑에 서서 악보도 없이 연주하고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는 듬성듬성 불이 켜진 밤부두의 정경이 내려다보였다. 나는 바이올린 소리가 유난히 쓸쓸히 느껴지는 것이 달처럼 보이는 정원등과 부두의 불빛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김교수의 동료인 홍교수가 입을 열었다.
“난 저 악사를 볼 때마다 과거가 어땠을까 상상해요. 혹시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아니었을까요?”
김교수가 술잔에 든 것을 입속에 털어 넣고 고개를 저었다.
“두어 달 전 공대 교수들하고 같이 왔을 때 누군가가 ‘다뉴브강의 물결’인가 하는 상당히 대중화된 고전음악을 신청했지만 할 줄 모른다는 대답이었어요. 방랑 악극단이나 서커스에서 청춘을 보낸 게 분명해요. 윤교수 말을 한 번 들어봅시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는 두 분 말이 다 맞아요. 기초를 튼튼히 배운 뒤에 대중음악으로 돈 듯해요. 어딘가 우수에 찬 분위기로 연주하는 걸 보면 오랜 세월 방랑 악사였는지도 몰라요.”
방랑 악사. 내 입에서 나온 말 때문에 갑자기 내 머리를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까마득한 망각의 저편에 잠들어 있던 한 조각의 기억이었다. 왜 기억이라는 것은 잠자코 엎드려 있다가 어떤 작은 계기로 인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일까. 삼십 년이 지난, 내 소년 시절의 한때와 함께 떠오르기 시작한 그 기억의 편린은 내 두뇌에서 부활하는 새처럼 망각의 표층을 뚫고 날개를 펄럭이며 나와 가슴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시절을 완전히 회상할 여유가 없었다. 늙은 악사가 연주를 끝내고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넣고 그 자리를 떠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녕히 가세요, 노악사 선생. 김교수가 그렇게 소리쳤고 역시 단골인 듯한 손님들이 다른 방에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툇마루로 나갔다. 손님방에는 절대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 전에 들었으나 가슴속에서 일기 시작한 충동을 이길 수 없었다. 나는 구두를 제대로 신지 못한 채 절름거리며 걸어가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잠깐 뵐 수 있을까요?”
나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인지 여주인이 따라 나와 거들었다.
“이분은 서울에서 강연하려고 내려오신 문학 교수님이세요.”
늙은 악사는 우리 두 사람을 무시하고 바이올린 케이스를 옆구리에 꼈다. 나는 한 발 더 다가가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내 진심을 헤아려 주기를 간절히 기대하면서.
“선생님, 약주를 한 잔 대접하며 한 곡 더 듣고 싶습니다.”
늙은 악사는 홱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발을 떼어 내가 나온 방을 향해 걸었다.
눈치 빠르게 김교수가 새 안주를 넉넉히 주문했고 나는 늙은 악사와 나란히 술상 앞에 앉았다. 환한 불빛 아래서 가까이 본 늙은 악사의 얼굴은 더 늙은 모습이었다.
안주가 들어왔다. 노약한 사람에게 보양이 될 만한 것들이었다. 나는 늙은 악사에게 첫잔을 권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음악을 많이 들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의 연주에 끌려서 저도 모르게 달려나갔습니다.”
늙은 악사는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술집을 찾아다니며 음악을 파는 늙은이일 뿐이오.”
더 자극하다가는 뿌리치고 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입을 다물고 꿀에 잰 인삼이며 갈비찜, 은행 따위를 그의 앞에 놓아 주었다. 그는 술은 딱 한 잔만 받아 마시고 가냘픈 손으로 음식을 들었다.
“젊어서 술을 많이 마셔 손이 떨린 적이 있지요. 그래서 지금은 많이 마시지 못해요.”
그는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는데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얼마나 활기 있게 음식을 먹느냐를 보고 수명을 짐작할 수 있다고 누군가가 한 말을 나는 생각했다. 내 짐작에 그는 오늘 같은 연주를 몇 년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노인을 바라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바이올린 연주를 처음 본 건 열 살 무렵이었어요. 방랑 악사 한 사람이 우리 집 행랑채에 묵었지요. 저는 사람의 손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선율이 흐른다는 게 참 신기했지요. 아버지는 모여든 마을 사람들을 위해 돈을 내놓았고 방랑 악사는 신청곡을 받아 연주했어요. ‘단장의 미아리 고개’ , ‘황성옛터’, ‘굳세어라 금순아’ 따위 대중가요였지만 아버지가 신청한 ‘바위고개’도 썩 잘 연주했어요. 나를 몹시 사랑했던 고모는 클래식 소품을 신청했는데 그것도 연주했지요.”
김교수가 끼여들었다.
“윤교수, 자네 집안은 김포 평야의 부호였다더니 그런 일도 있었군.”
“그랬다네.”
나는 지나간 영화를 회상하는 몰락한 귀족처럼 한숨을 쉬며 늙은 악사를 바라보았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속에서 밀물처럼 출렁거렸다.
악사는 무표정했다. 우리의 대화를 유심히 듣는지 관심 없이 흘려보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의 바이올린 연주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단봉낙타의 등처럼 치켜 올라간 왼쪽 어깨를 움직여 길게 숨을 쉬고는 내 친구 김교수가 권하는 술잔을 받았다.
두세 잔 더 받아 마셨을까. 늙은 악사는 야윈 팔을 뻗어 바이올린 케이스를 끌어당겨 열었다.
“고맙소이다. 교수님들을 위해 한 곡 더 켜고 일어나겠습니다.”
그는 활대를 잡고는 나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음악은 가장 순수한 영혼의 표현이지요. 몸은 늙었지만 내 영혼은 순수합니다.”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나는 숨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그 곡이 ‘사랑의 슬픔’이라는 소품이기 때문이었다. 그 곡은 옛날의 방랑 악사가 고모의 요청을 받아 연주한 곡이었던 것이다.
나는 늙은 악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 기억 속의 방랑 악사 바로 그 사람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거니와 그 때의 악사는 얼굴보다는 연주하던 몸짓이나 감미롭게 흐르던 선율로 내 머릿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의 슬픔’이 확인해 준 것은 없었다. 옛날에 내 가슴을 울렸던 이 곡의 음감은 내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삼십 년을 사는 동안 나는 이작 펄만이라든가, 아이작 스턴이라든가, 알렉산더 슈나이어라든가, 핑커스 주커만 등의 명연주가들의 연주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동안 음악을 가까이하며 살아온 것이 오히려 그 곡에 대한 인상을 지워버린 셈이었다.
나는 잠깐 동안 회상의 골짜기로 내려갔다. 연주가 끝나는 줄도 모르고 기억의 편린들을 더듬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나, 윤교수? 악사 선생 가시네.”
김교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드니 늙은 악사는 악기를 넣은 케이스를 옆에 끼고 문지방을 넘어 툇마루로 나가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악사 선생. 안녕히 가세요. 몸을 일으켜 인사한 것은 내가 아니라 김교수였다. 나는 그가 마당을 걸어나가 앞뜰이 그 보름달 같은 정원등의 빛만 남을 때까지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왜 넋을 잃고 있어? 늙은 악사가 자네 소년시절에 찾아왔던 그 방랑 악사라도 되나?”
김교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흔들었다.
“그런 거 같아. 아냐, 그 사람은 아냐.”
우리 집은 검정 기와를 얹은 디귿자형의 대저택이었고 마당도 깊고 넓었다. 아버지는 3정보나 되는 수리 안전답을 가진 지주였고 머슴을 셋이나 두고 있었다. 청년 시절에 인천의 명문 인상(仁商)을 나왔고 제법 풍류도 즐길 줄 아는 분이라 풍금과 축음기도 샀다. 마음 씀씀이도 엽엽해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금씩은 베풀 줄 아셨다.
아버지 밑에 아버지보다 열댓 살이나 어린 고모가 있었는데 인천에 유학해 여고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다가 집에 와 있었다. 나는 그 때 어렴풋이 알았지만 고모는 직장의 남자 선배와 지독한 실연을 겪고 집에 온 것이었다. 그깟 놈은 인연이 끊어지기 잘했다. 어서 잊어 버려라. 아버지는 고모를 감싸며 풍금과 전기 축음기를 고모 방으로 옮겨 주었다. 나는 그것들이 고모의 슬픔을 달래기는커녕 더 슬프게 하는 것을 지켜 보았다. 고모는 풍금을 치거나 전축을 들으며 걸핏하면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고모의 풍금소리와 고모가 들려주는 음반을 들으며 음악에 대한 귀가 열렸다. 당시 시골 초등학교에 같이 다니던 아이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회였다.
아버지는 고모에게는 자상하셨지만 어린 나에게는 오히려 엄격하신 편이었다. 넌 커서 육사(陸士)에 가야 해. 사나이가 되려면 어깨 펴고 늠름히 걸어야 해. 나는 그런 아버지 때문에 오히려 주눅이 들어가고 있었는데 그 때 고모가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고모와 같은 방을 썼다. 아마도 고모에게 축음기 같은 또하나의 위안이 되게 하려는 아버지의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늘 바쁘고 엄격한 아버지, 차분하면서 감정 표현을 여간해서는 안 하는 어머니. 나는 부족한 정을 고모에게서 듬뿍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고모 자신의 슬픔 때문이었던 것 같지만 걸핏하면 고모는 때때로 나를 꼭 껴안고 잤다.
방랑 악사가 온 것은 서늘한 바람이 부는 늦가을 해질녘이었다. 어제 타작한 벼 3백섬을 정미소에서 찧은 터라 온 가족이 넉넉한 기분에 잠겨 있을 때였다. 내가 수(繡)를 놓는 고모 곁에 엎드려 숙제를 하는데 갑자기 마당에서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고모,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팔짝 뛰어 일어났고 고모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수틀을 내려놓았다. 그 때 삐거덕 하고 큰 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큰머슴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어르신, 젊은이 하나가 와서 마당에서 깽깽이를 켜고 싶다는데요?”
나는 다람쥐처럼 민첩하게 대청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안방에서 무엇인가를 계산하셨는지 주판을 든 채 나오셨다.
“엉터리 약장수인 모양이군. 몇 명인가?”
“약장수는 아닌 것 같구요. 혼자입니다요. 가진 거라곤 깽깽이 하나뿐이구요.”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깽깽이를 켜서 돈푼이나 받겠다는 거군. 허락하겠네.”
아버지는 천천히 댓돌을 내려가 신발을 신으셨고 나는 얼른 다시 방으로 들어가 고모 손을 잡아끌었다.
고모와 함께 대문을 나가니 얼굴이 창백한 젊은 사람이 마당 가운데 서서, 내가 그림책에서나 본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아버지는 툇마루에 걸터앉으며 흡족하게 웃고 계셨다. 나는 악사의 낡은 검정색 양복과 모자가 조금은 우수꽝스러운데다 작은 악기에서 예쁜 소리가 울려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고모가 내 손을 꼭 쥐었다.
“외로운 방랑악사로구나.”
“고모, 방랑악사가 뭔데?”
“혼자 떠돌아다니면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란다.”
마당에는 벌써 마을 사람들이 바쁘게 모여들고 있었다.
한 곡이 끝났을 때 아버지는 천천히 박수를 치셨다.
“솜씨가 괜찮군. ‘바위고개’를 켤 줄 알면 해 보게.”
방랑악사는 모자를 벗고 인사한 다음 다시 바이올린을 턱과 어깨에 꼈다. 아버지가 기분 좋을 때 흥얼거리곤 하는, 그리고 이따금 고모에게 풍금을 연주하게 해 내 귀에도 익은 ‘바위고개’가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그 때 어머니가 나와 아버지 곁에 앉았고 고모와 나도 아버지 곁으로 가서 앉았다. 나는 바이올린의 선율이 내 가슴으로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숨을 죽였다. 음악에 취해 마당 끝을 바라보았는데 키 큰 오동나무 가지 위로 붉은 해가 지고 있었으며 오동잎 몇 개가 춤추듯이 흔들리며 떨어졌다.
‘바위고개’가 끝나자 아버지는 툇마루에서 일어서셨다.
“이 툇마루를 무대로 쓰게. 그리고 모자를 벗어놓게.”
방랑악사는 툇마루에 걸터앉으며 발치 앞에 낡은 모자를 벗어 놓았다. 아버지는 지갑을 꺼내 돈을 모자에 넣고는 머슴 아저씨들에게 어서 전등을 끌어내 켜고 밀짚 멍석을 모두 꺼내다 깔라고 명령하셨다. 이미 마을 사람들은 넓은 마당을 반넘어 메우고 서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밀짚 멍석의 맨 앞에 앉았다. 백열전등 하나가 추녀 끝에 매달려 빛을 뿜었고 악사는 그 밑에 앉아서 어머니의 신청곡 ‘청실홍실’과 나의 신청곡 ‘낮에 나온 반달’을 연주했다.
“아가씨는 왜 신청곡을 말하지 않으세요?”
두 곡이 끝났을 때 어머니가 입을 열었으나 고모는 그냥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모는 어둠의 장막이 짙게 드리워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금 추웠으므로 나는 고모의 팔에 뺨을 대며 매달렸다.
방랑악사의 연주는 은빛 달이 동산 위에 커다랗게 떠오른 뒤에도 계속되었다. 검정색 모자에 모인 돈은 적었지만 악사는 열심히 연주를 했다. 그의 연주 모습을 바라보면 마치 그가 오로지 바이올린을 켜는 일 하나를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 시가 지났을까. 악사는 지친 모습으로 관객에게 정중히 인사한 다음 악기를 케이스에 넣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는데, 그는 문득 생각난 듯 손을 멈추고 고모를 바라보았다.
“신청곡을 말씀하시지 않았지요. 말씀하신다면 마지막 곡으로 연주하겠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서 그러라고 머리를 끄덕여 보이고 계셨고 마을 사람들도 그랬다. 고모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의 슬픔’을 연주할 수 있나요? 크라이슬러의 곡 말이에요.”
악사는 묵묵히 연주를 시작했다. 고모의 음반으로 들어본 것이었다. 제목 때문인지 고모의 슬픔처럼 늘 슬프게 느껴졌던 음악이었다. 앞서 연주한 것들과 달리 이 곡은 나와 고모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는 듯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고모의 얼굴을 훔쳐보았는데 두 눈이 물기에 축축이 젖어 있었다.
연주가 끝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고모가 내 이불을 펴 줄 무렵 큰머슴 아저씨가 아버지에게 하는 말소리가 아까처럼 들려왔다.
“깽깽이 악사가 이틀쯤 행랑채에 묵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요. 데리고 자도 될까요?”
“그러게.”
아버지의 음성은 밝았다.
이 날 밤 나는 고모가 뒤척이며 베개를 눈물로 적시는 것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아침에 아버지는 자전거를 몰고 읍내로 나가셨다. 어제 정미한 쌀을 팔고 농협에 저축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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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휘철님의 댓글
70년대 인천 신포동이나 동인천 선술집에서 가끔 바이올린을 연주해주던 방랑(?) 악사분이 계셨지요?
그 분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오랫만에 옛날 생각을 해봤습니다. 선배님 좋은 글 자주 올려주십시오.
이기호 67님의 댓글
이원규 선배님! 인사 드립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글, 잘읽었읍니다. 저두 고전음악을 즐겨듣습니다. 선배님 만나면, 대화가 잘될듯한 느낌! 시간나는 대로 선배님이 올리신글 통독하겠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