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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red>이원규 단편소설 [사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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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사과나무
이 원 규
알마아타의 구월은 태양이 불타듯이 선홍으로 이글거렸다. 눈덮인 천산산맥 너머에서 이따금 편서풍이 구름을 안고 밀려와 스코올을 뿌리기도 했으나 대기는 건조했으며 하늘은 늘 쨍하게 맑았다. 그래서 이 도시에 지천으로 많은 사과나무 가지에서는 사과들이 보석처럼 빨갛게 익어 갔다.
그 도시에 도착한 셋째날 오후, 나는 동포 지도자 장세르게이 선생 내외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도시 중심가의 호텔을 떠나 천산산맥 쪽 교외 고급 주택가에 있는 그들의 집 앞에 막 도착한 것이었다. 내가 승용차에서 배낭을 내리는데 “세르게이!”하고 장 선생을 부르는 젊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한낮의 정적과 폭염 때문인지 그것은 숲속에서 노래하는 나이팅게일의 소리처럼 청량하게 내 귀에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장 선생댁과 나란히 앉은 이웃집이었다. 붉은 사과들이 탐스럽게 매달린 사과나무 아래서 아름다운 백계 러시아 여인이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스물일고여덟 아니면 서른 살일까. 그녀는 러시아인으로서는 작은 키에 금발과 푸른 눈을 갖고 있었고 빨간색 블라우스 아랫자락을 허리에 질끈 잡아매고 천산산맥의 눈처럼 흰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균형 잡힌 몸매와 맑은 얼굴은 정말 매혹적이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더위를 잊어 버렸다.
그녀는 다감한 눈웃음을 지으면서 장 선생 내외와 대화를 나누었다. 러시아어를 거의 모르는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이웃집 방문객에 대한 그녀의 관심에 노부부가 답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안나 마사노프 부인인데 우리의 다정한 이웃이에요. 영어를 잘하지요.”
하고 장 선생의 부인 윤클라라 여사가 그녀를 내게 소개했다.
그녀는 흰색 페인트를 칠한 허리 높이의 울타리문을 열고 걸어와 내게 팔을 벌렸다.
“나이스 투 밋 튜, 미스터 너블리스트(당신을 만나 기쁩니다, 작가님).”
“아임 그랫 투 씨 유, 미시즈 안나 마사노프(나도 당신을 만나 기쁩니다, 안나 마사노프 여사).”
그녀는 내 어깨를 가볍게 안고 양볼을 번갈아 대는 러시아식 포옹을 했다. 그녀에게서 약한 재스민 향기가 났고 잘 익은 과일 같은 농밀함이 느껴졌다. 바람을 팽팽하게 넣은 풍선처럼 탄력 있는 가슴이 몸에 닿고 그녀의 뺨이 내 뺨을 스치는 순간 숨이 콱 막히는 듯했다. 그리고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한 달 가까이 러시아 땅을 여행하며 러시아 사람들과 몇 차례 그런 인사를 나눈 터였으나 젊은 여인은 처음이었다. 나는 서른일곱 살의 사나이답지 않게 수줍음에 휩싸였다.
장 선생 내외가 발을 떼어놓았으므로 나는 그녀를 놓아두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안나의 남편 미하일은 알마아타 대학 교수에요. 내가 이웃 초청 파티를 열겠소.”
장세르게이 선생이 자기 집 울타리문을 열면서 말했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집들은 이삼백 미터쯤 떨어져 있었는데 유독 두 집만이 가깝게 붙어 있었다.
장 선생 집에도 그녀의 집처럼 나무가 많았다. 천 평도 넘을 큰 정원에는 자작나무, 이깔나무, 무화과나무, 사과나무, 돌배나무, 앵두나무 들이 싱싱하게 우거져 있었으며 과목들은 향기로운 열매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습도가 낮아선가 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가자 기분 좋게 시원했다.
클라라 여사가 나무 그늘을 벗어나 집 앞의 작은 잔디 마당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알마아타에서는 과일이 잘 열리지요. 우리는 다차(주말 별장)도 갖고 있는데 거기는 과목들이 더 많아요.”
“여사님, 알마아타가 ‘사과의 아버지’라는 뜻이라는 걸 저도 압니다.”
나는 정원수들에 가려져 붉은 함석지붕만 보였던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자작나무 원목으로 만든 이층 저택은 팔십평 쯤 될까. 두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큰 규모였다.
내가 혼자 배낭을 메고 러시아 연해주에서 시작해 시베리아를 횡단해 중앙 아시아까지 간 것은 우리 동포들의 비운에 찬 강제 이주를 장편소설로 쓰기 위해서였다. 열차를 보름간이나 탔고 카자흐스탄 국경을 넘어서는 동포들의 대표적인 정착지 세 군데서 삼사 일씩을 보냈다. 마지막 기착지 알마아타는 소설의 중심배경은 아니지만 서울행 전세기가 뜨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경비가 떨어질 때까지, 빽빽하게 기록한 세 권의 취재노트를 정리하며 구상을 끝내는 장소로 정한 곳이었다. 그런데 장 선생이 호텔로 찾아왔던 것이다.
“한 맺힌 강제이주를 소설로 쓴다니 이보다 고마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좋으니 내 집에 와서 묵으십시오.”
장 선생이 내 손을 꼭 잡고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로서는 이게 웬 떡이냐 싶을 정도로 큰 행운을 잡은 셈이었다.
장 선생 내외는 강제 이주 1세대로서 그 처절했던 시대를 몸으로 겪은 분들이었다. 장 선생은 올해 예순여섯 살로 구소련 정부 교육성의 고급관리로 일하다가 은퇴했고, 부인 클라라 여사는 의사 출신이었다. 장성한 자식들은 분가해 나가 살고 있었다.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결심을 하게 되었다. 여행경비가 남을 테니 아예 초고를 쓰고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두 분이 곁에 있으니 완벽한 고증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현관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 장 선생이 곧장 이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전망 좋고 바람 잘 드는 이층 큰 방을 쓰시오.”
나는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와 책상이 있는 널찍한 방이었는데 커튼을 제치자 시야가 탁 트이며 천산산맥의 장려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제게는 분에 넘치는 방이군요. 고맙습니다.”
나는 장 선생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했고 장 선생은 만족한 듯 배를 내밀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오. 두어 시간 쉬시오.”
그가 나간 뒤 나는 천산산맥의 설봉을 바라보다가 카메라와 삼백 밀리 줌렌즈를 꺼내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렌즈를 조절한 뒤 몇 번 셔터를 끊었다.
카메라를 거두다가 무심결에 옆집으로 눈을 돌렸다. 안나가 정원의 잔디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그녀의 집에도 장 선생네처럼 큰 잔디밭이 있었다. 그 바깥은 역시 과목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장 선생댁과 그녀의 집 사이에는 길가 쪽처럼 허리 높이의 울타리가 쳐져 있었으며 왕래하기 쉽게 하기 위해선지 자물쇠를 걸지 않고 빈 빗장만 있는 작은 문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그녀는 모터펌프에 연결된 호스로 물을 분사하고 있었다. 다른 식구들이 없는 듯 정원은 고요했으며 킹 차일즈 스파니엘 종 개 한 마리가 강동거리며 그녀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붉게 익어 가는 사과가 매달린 푸른 나무와 푸른 잔디, 한 마리 애완견과 수밀도처럼 농밀한 여인. 나는 그녀 모르게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천산산맥의 만년설에 카메라 렌즈를 겨냥했다.
그녀가 갑자기 영어로 소리쳤다.
“나를 찍어 주세요.”
내가 카메라를 들고 나와 선 것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이 쪽을 바라보며 포즈를 취하는 그녀를 향해 나는 손을 흔들어 대답했다. 줌렌즈를 쑥 밀어내자 그녀의 웃는 모습이 파인더 안에서 왈칵 다가왔다. 아까 러시아식 포옹을 위해 나를 향해 걸어온 것처럼.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금발과 미소를 머금은 푸른 눈, 이슬처럼 물방울이 맺힌 뺨, 그리고 볼록하게 솟은 가슴이 숨쉬는 모습이 내 눈앞에 가득했다. 나는 숨을 멈추고 셔터를 끊었다.
“발브쇼에 쓰발시바(고마워요).”
그녀는 다시 웃으며 소리친 뒤에, 잔디 위에 던져진 채로 저 혼자 물을 뿜어내고 있는 호스를 들어 이번에는 사과나무를 향해 물을 쏘았다. 호스 끝에 분사와 직사를 조절하는 장치가 달려 있는 듯 하얀 물의 막대기가 곧장 뻗쳐가 야단스럽게 나무를 흔들었고 그 바람에 사과 몇 개가 뚝뚝 떨어졌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취재노트를 정리했다. 워낙 조용한 마을이기 때문인가. 자동차 소리가 다가와 멈추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집 쪽이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드는데 남녀의 러시아말 음성이 들려 왔다.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일어섰다. 창 앞에 서서 내려다보니 그녀가 나이가 지긋하고 풍성하게 수염을 기른 사내의 손을 잡고 사과나무 그늘을 벗어나 잔디 위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내는 쉰 살 가까이 들어 보였지만 나는 그가 그녀의 남편임을 직감해 버렸다. 대학교수 같은 분위기가 몸에서 흐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풍겨나는 농밀스런 아름다움이 스무 살쯤 나이가 많은 남편과 살기 때문일 것이라는 상상을 했고 그녀에 대한 호기심은 산봉우리처럼 커졌다. 이봐. 너는 알마아타까지 와서 쓸데없는 호기심을 갖는군. 나는 나 자신을 향해 중얼거리며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녀에 대한 상념을 떼밀듯이 밀어내고 이번에는 내 창작노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날 밤을 나는 장 선생 내외와 긴 이야기를 나누며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는 내 소설의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 장편소설은 긴 시간의 지속적인 열광과 자기 도취가 있어야 쓸 수 있다. 나는 서서히 나의 정신을 열광과 도취로 몰아갔다.
장 선생 댁은 편안했다. 한낮에 밖에서는 폭염이 이글거리지만 집 안은 서늘했으며 특히 이층 방은 바람이 쉬지 않고 밀려들었다. 스코올이 내려 목마른 나무와 풀 들을 적시는 때도 있었다. 나는 며칠 동안 계속 소설의 초고를 잡아나갔다. 녹초가 되도록 몇 시간을 매달릴 때도 있었다. 소설 초고를 매일 2백자 원고지로 50장 이상 써야 했던 것이다.
때로는 머리를 식히려고 정원으로 나가 사과나무와 무화과나무 밑을 거닐었다. 느닷없이 주먹만한 사과가 떨어져 내 머리를 아프게 때리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집어 우적우적 깨물어 먹음으로써 복수를 했다.
장 선생이 약속한 이웃 초청 가든 파티는 닷새째 되는 날 저녁에 열렸다. 해가 카자흐 평원 너머로 떨어져갈 무렵 장 선생이 잔디 정원에 램프를 켰고, 사람들은 포도주와 보드카를 들고 왔다. 장 선생처럼 연금을 받아 사는 퇴역 대령 부부, 축산 연구원 부원장 부부, 안나와 남편 미하일 교수, 그리고 중년의 음악교사 부부였는데 모두가 백계 러시아인이었다. 안나는 킹 차일즈 스파니엘을 데리고 왔고, 음악교사는 아코디언을 메고 왔다.
나는 그들 모두와 러시아식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안나의 남편 미하일은 수염이 무성하게 턱을 덮고 있는데도 선량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나를 포옹한 뒤 갈색 눈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반갑습니다. 뉴샤(안나의 애칭)한테서 당신 이야기를 들었지요.”
“당신의 환대에 감사합니다.”
미하일과 나는 장 선생의 통역 없이 영어로 인사하였다.
안나가 남편에 이어 다시 나를 포옹했다. 다시 쟈스민향이 났다.
모두가 잔디 위에 놓인 장방형의 식탁 앞에 앉았다. 식탁에는 카자흐인들이 시시케바브라고 부르는 양고기 꼬치 구이와 라이보리(麥)로 만든 러시아식 흘레브빵, 천연꿀에 잰 무화과와 싱싱한 과일들, 보드카, 포도주, 그리고 나에 대한 배려인지 한국식 불고기와 쌀밥이 놓여 있었다.
안나의 남편 미하일이 내게 보드카를 부어 주며 말했다.
“당신은 작가니까 러시아 문학도 읽었겠지요?”
“물론입니다. 외국문학 중에서는 가장 많이 읽었지요. 나는 차이코프스키와 보로딘과 무소르그스키의 음악도 좋아합니다.”
미하일이 다시 물었다.
“당신은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나요?”
“우리 한인들의 강제 이주 역사지요. 천구백삼십칠년에 스탈린은 우리 동포 십육만 명을 화물열차로 실어다 사막에 던지고 지도자 이천오백 명을 재판도 없이 총살했어요. 내가 밟은 여행경로는 바로 강제이주의 길이에요.”
좋은 자리가 서먹서먹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인들도, 장 선생 내외도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금방 어색해졌다.
안나가 천산산맥 위로 떠오른 둥근 달에 눈길을 둔 채 입을 열었다.
“당신은 러시아를 좋아하지 않겠군요.”
나는 망설였다. 나는 러시아의 문학에 한없이 경도하면서도 러시아를 그 이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내가 강제이주 정착촌에서 무수히 만났던 노인들의 눈물 때문이었다. 내 취재노트들은 노인들의 한과 비탄으로 가득차 있었다.
“미움과 사랑이 반반씩이라고 해야겠지요.”
가장 나이가 많은 퇴역대령이 내 말을 받았다.
“우리가 오늘 모이기를 잘했군요. 우리가 당신을 이해하게 됐고 당신이 러시아인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테니까요.”
나는 할 말을 해버렸으므로 이제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론입니다. 그걸 위해서 내가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마침 아코디언도 갖고 오셨으니 내가 학창시절부터 러시아의 거대한 평원을 상상하면서 불렀던 ’스텐카라진‘을 부르겠습니다.”
음악교사가 아코디언으로 전주를 켰다. 내가 노래를 시작되자 퇴역대령이 곁으로 와서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불렀고 곧 전체의 합창으로 이어졌다.
나는 러시아인들의 요청으로 장 선생 내외와 함께 아리랑도 불렀다. 노래가 끝난 뒤 클라라 여사가 아리랑은 한인들의 비애와 한이 담긴 노래라고 설명했고, 러시아인들은 가사를 러시아 알파벳으로 적어 이것도 합창을 했다. 고맙게도 두 노래의 합창은 내 말 때문에 어색해졌던 분위기를 밀어냈다.
아코디언이 러시아의 무곡을 경쾌하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장 선생 내외를 포함하여 모두가 잔디 위에서 춤을 추며 나를 끌어들였다. 안나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내 손을 잡았는데 나는 생전 처음 추어 보는 춤이라 그녀를 따라 하기에 바빴다. 미하일은 음악교사의 아내와 춤추며 우리를 향해 박수를 쳐댔다.
춤을 끝내고 모두가 잔디 위에 앉아 한숨 돌리는데 안나가 내 귀에다 대고 말했다.
“당신은 마력을 가진 분이에요.”
미하일도 들은 듯했는데 그는 싱거운 사람처럼 싱글벙글 웃었다.
뜨겁고 건조한 낮과 달리 알마아타의 밤은 더할 수 없이 시원했다. 어둠이 잦아 내리면 편서풍이 천산산맥의 만년설을 스치며 급강하해 불어오기 때문이라 했다. 게다가 정원의 사과 열매들이 달빛을 받아 루비처럼 황홀하게 빛났다.
장 선생이 천연꿀을 흘레브빵에 바르며 미하일에게 물었다.
“미사, 당신은 새 학기가 시작되어 바쁘지요?”
미하일은 보드카 잔을 기울여 안에 담긴 것을 수염 투성이 입 속에 털어 넣었다.
“강의도 해야 하지만 이번 학기에는 연구과제가 많아 더 바쁩니다.”
내가 모든 일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을 아는지 클라라 여사는 러시아어 대화들을 친절하게 통역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소곤거리며 묻는 말에도 대답해 주었다. 나는 안나가 톰스크 대학 인류학과에 다닐 때 스승이던 미하일을 사랑해 결혼했으며 지금 스 물아홉 살이고 아이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화제가 알마아타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클라라 여사가 내게 물었다.
“김선생, 이 도시에서 찾아볼 곳은 없나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내려놓았다.
“여사님 댁에 오기 전 고고 민속박물관과 러시아 정교회 등 몇 군데를 들러 봤지만 메디오산을 못갔습니다. 거기 카자흐인들의 전통가옥 유르따가 있다지요?”
“유르따가 있는 유목민촌을 보려면 주차장에서 한 시간 남짓 가파른 산길을 걸어 올라가야 하고, 거기서 더 올라가면 천산산맥 준봉들이 보이지요. 세로샤(세르게이의 애칭)하고 같이 가면 좋지만 저이는 숨이 가빠 등산을 못해요.”
클라라 여사가 이렇게 말하고 우리의 대화를 러시아어로 통역했다. 그러자 안나가 남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무엇인가 말했다. 미하일은 흠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는 나를 향해 돌아앉았다.
“내일 나하고 같이 가요. 내가 차를 운전해 미사를 대학까지 태워다 주고 거기서 곧장 메디오로 가면 되지요.”
부부가 합의한 듯 미하일은 나를 향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하시오, 작가 선생. 뉴샤도 심심한데 바람을 쐬면 좋지요.”
장 선생 내외는 물론 다른 러시아인들도 그게 좋겠다고 한 마디씩 하니 나는 그러겠노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파티가 끝나고 러시아인들은 아까보다 더 정겹게 나를 포옹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나는 미하일의 차를 타고 우선 알마아타 대학으로 갔다. 자기 연구실이 있는 건물 앞에서 차를 내린 미하일은 안나의 볼에 키스하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작가 선생, 잘 다녀오시오.”
그의 웃는 모습은 한없이 선량해 보였다.
안나는 운전석으로 옮겨앉았고 뒷좌석에 있던 나도 그녀의 옆자리로 갔다. 그녀는 차양이 큰 흰색 모자와 선그라스를 쓰고 위 아래 몸에 꼭 맞는 감색 티셔츠와 미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변속기어를 넣으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러시아 노래 ‘카튜샤’였는데 다 부르고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도 노래를 불러 봐요.”
“내가 러시아말로 부를 줄 아는 노래는 어젯밤에 부른 ‘스텐카라진’밖에 없어요.”
“우리 그거 같이 불러요.”
우리는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운전하는 러시아제 라다 승용차는 우리의 노래를 싣고 백양나무 가로수들이 관병식하듯 늘어서 있는 도로를 달렸다.
차는 시내를 벗어나 완만하게 경사가 진 구릉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숲이 우거진 산이 앞을 가로막았는데 이것이 천산산맥의 한 봉우리인 메디오산 입구였다. 차는 굽이굽이 에워도는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래쪽은 아열대수목들이 무성했지만 절반쯤 오르자 소나무와 잣나무 등 온대와 한대의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몇 번 차를 세우게 하고 풍광을 카메라로 찍었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은 산의 정상까지 삼분의 이쯤 올라간 곳이었다. 우리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국립 빙상 경기장 옆으로 난 숲길을 걸어 올라갔다. 이름 모를 잡초들이 가득한 풀밭에서 풀꽃이 바람에 가느다란 목을 흔들었다. 경사가 급한 길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소설에서 우리 러시아인을 포악하게 그리겠군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 소설에는 한인 지도자들을 예비구금해 총살하는 비밀경찰의 폭압과, 한인 처녀를 강간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이미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하면 우리 러시아를 용서하시겠어요? 춤을 출까요?”
그녀가 애교 있게 웃으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두 팔을 높이 쳐들고 활짝 웃으며 춤추기 시작했다. 러시아 발레의 한 동작 같았는데 꽉 끼는 티셔츠를 입어 요염한 허리가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비탈진 땅이라 발을 헛딛어 기우뚱하고 넘어지는 것을 내가 어깨를 받아안았다. 그녀가 내 가슴에 뒤로 안긴 꼴이었는데 나는 그녀가 균형을 잡자 떨어져 나왔다. 자칫하면 그녀를 포옹할 것 같은 내 마음 밑바닥의 충동 때문이었다.
그녀는 눈을 흘기며 웃었다.
“당신은 샌님이에요. 러시아 여인을 사랑하는 한인 남자는 소설에 안 나오나요?”
“주인공 하나를 그렇게 그릴 생각이오.”
나는 그렇게 해야 독자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얼마나 예쁜가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지요.”
“나보다 더 예뻐요?”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웃음이 가득 고였다.
나는 웃으며 머리를 내저었다. 그녀는 깔깔 웃으며 내 팔에 매달렸다.
눈앞에 작은 분지가 펼쳐지더니 몇 채의 유르따가 눈에 들어왔다.
<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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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열님의 댓글
꼴깍,,,,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