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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red>이원규 단편소설 [올드 랭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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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올드 랭 사인
이 원 규
자리를 떠나 유액 위장약을 손에 든 채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가을이 끝나 가는 거리에는 낙엽들이 수북수북 쌓여 있었다. 늙은 환경 미화원이 은행나무 낙엽들을 대나무 갈퀴로 긁어 커다란 자루에 담고 있었다. 지난주 그는 장대를 들고 은행을 땄다. 열매와 잎 들이 몸 위로 후두둑 쏟아졌다. 나와 함께 점심을 먹고 들어오던 김과장이 발을 멈추었다. 아저씨는 세월을 두드리시는 것 같아요. 그가 장대를 잡은 채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두드리지 않아도 세월은 갑니다. 며칠 전 세월을 두드렸던 그는 이제 세월의 잔해를 담고 있었다.
낙엽이 불룩하게 담긴 자루를 바라보며 유액 위장약 봉지를 빨아 마셨다. 삼 년 전 타은행과 합병하며 감원 태풍이 불었던 우리 은행이 다시 감원과 파격인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아침에 전해졌다. 2백 명을 감원하고, 삼십대 후반의 능력 있는 직원을 점포장으로 발탁한다는 것이었다. 삼 년 전에 살아남은 터라 점포장까지는 갈 것으로 알았는데 마흔 다섯 살 가을에 다시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자꾸만 위(胃)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신경성 위궤양이 다시 도지고 있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우리 은행의 경인지역 본부장을 저녁에 찾아가리라 결심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지난달 일요일 아침, 공원에서 조깅을 하다가 그와 마주쳤다. 그가 알은체를 했고 우리는 잠시 벤치에 앉았다. 나는 전공학과는 다르지만 대학의 후배라고 말했다. 그는 반색을 하고 자기 집이 303동 1202호라고 하면서 한 번 놀러 오라고 했다. 나는 오늘 저녁 그의 집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열심히 일할 것이며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컴퓨터 모니터의 입출금 현황에 눈길을 돌렸다.
그 때 전화가 왔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밝고 친절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큰빛은행 이현수 차장입니다.”
“오랜만이다.”
낯익은 바리톤의 음성이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고등학교 동창 동식이었다. 학창시절에는 같은 중창단 멤버라 가깝게 지냈으나 한동안 뜸하게 지내 온 사이였다. 그는 고향 인천에서 불도저와 포크레인 따위 중기(重機)사업을 해 왔는데 엎치락뒤치락 부침이 심했다. 그리고 위기에 빠졌을 때 내가 신용대출을 도와 주지 않았다고 야속해하고 있었다.
“끗발 좋은 은행 간부님한테 개길려고 전화한 게 아니니까 걱정 마라.”
비꼬는 어투였다. 다시 위에서 신물이 올라왔으나 나는 꾹 참았다.
“아주머니와 애들은 잘 있니?”
“네가 걱정 안 해도 잘 있지. 광희가 온댄다.”
“뭐라구?”
나는 그렇게 말했다. 옛 친구 이름은 그만큼 망각의 골짜기 깊은 곳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브라질로 이민 간 뒤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 없던 조광희가 돌아온단 말야.”
“뜻밖의 소식이구나.”
내 머릿속은 생애의 절반이 넘는 긴 세월을 치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한꺼번에 떼를 지어 표면으로 떠올랐다.
“지금 일본 도쿄에 있어. 사업 때문에 출장 왔는데 오늘 오후 인천공항에 내린댄다. 한국에 머물 시간이 이틀밖에 없대. 옛날에 부산 가서 배웅한 네 사람 이름을 찍어서 오늘 여섯시 동인천역으로 나와 달라는 연락을 해 왔어.”
동식은 광희가 총동창회 사무국으로 전화를 해서 그런 요청을 했으며 그것이 간접적으로 자신에게 전달되었다고 설명한 뒤 내게 물었다.
“넌 나가겠지? 우리 멤버 중 광희와 가장 친했으니까. 난 선약이 있어 못 가.”
나는 길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나도 사정이 있어.”
“그럴 줄 알았다, 임마. 우정이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없는 놈.”
못 나가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하고 내가 말하려는데 전화는 끊어졌다.
우울한 기분으로 일에 매달려 있는데 이번에는 윤찬에게서 전화가 왔다. 역시 조광희를 부산까지 배웅한 중창단 친구였다.
“조금 전에 동식이 전화 받았어. 너 광희 맞으러 오기 어렵다고 했다며? 나도 바쁜데 너 어떻게 안 되겠니?”
윤찬이 증권회사에서 일할 때 나는 돈을 맡겼다가 치명적인 손해를 보았다. 내가 의뢰한 주식을 사지 않고 제멋대로 딴 것을 사 놓고는 당장 팔라고 하는데도 듣지 않고 며칠만 더, 며칠만 더, 하다가 거의 휴지처럼 값이 떨어졌던 것이다. 내 생애에서 안았던 가장 쓰라린 실패였다. 그 뒤 그는 실적을 못 올린 탓에 명예퇴직을 하고 나와 음식점을 하다가 퇴직금을 날려 버렸다.
그는 고등학교 중창단 시절에는 베이스 바리톤 파트에다 기타 반주도 맡았는데 대학시절부터는 영화에 깊이 빠져들어 전문가 뺨치는 영화 매니아가 되었다. 결국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얼굴을 하고 인천에서'시네 빌리지’라는 전국적 체인에 속한 비디오 대여점을 차려 실컷 영화를 보며 살고 있었다. 수입이 적어 아내가 보험설계사로 일하는데 그는 팔자 좋게 동네 문화센터에서 영화 해설을 하고 때로는 기타를 치며 노래도 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몹시 미안해하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래.”
“난 구청 문화회관에서 한 달에 한 번 영화 강의를 해. 근데 그게 오늘이야.”
윤찬은 잠시 묵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실리가 있는 일이라야 가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관두자. 옛날에는 우리가 이러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호남이놈은 찾을 수도 없고.”
그는 툴툴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두 친구가 뒤집어 놓은 속을 달래려고 회전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김호남은 덩치가 컸으나 눈치가 빠르고 영민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미장이일을 해서 집이 가난했고 공부 잘하는 형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했다.
영악한 것이 그의 병이 되었다. 9급 공무원 임용고시에 합격해 동사무소와 구청에서 삼사 년 일했으나 진득하게 붙어 있지 못했다. 사표를 내고 나와 피라미드 판매에 맛을 들여 많은 사람들의 돈을 끌어들였는데 그게 망해 검찰에 구속되고 사람들의 원망을 샀다. 교도소에서 몇 달 살고 나와 유통업으로 다시 일어서나 했더니 IMF 구제금융을 받은 경제위기 때 주저앉았다. 이삼 년 뒤 통신판매업으로 또다시 일어섰으나 경기가 나빠지면서 부도를 냈다. 그렇게 뜬구름 잡듯이 사느라 결혼도 하지 못했다.
동창들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린 그 녀석한테 고마워해야 해. 실패한 사업에 한 번도 동창생을 끌어들이지 않았으니까.”
“맞아. 우리 동창 누구에게도 손해를 끼치지 않았어.”
졸업한 뒤에도 모교 중창단은 후배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었다. 그리고 동문들도중 어떤 기는 사십대에 들어서 OB 중창단을 부활하여 발표회도 갖고 후배들의 예술제에 찬조출연하기도 했다. 우리 동기 중창단은 잊혀져 있었다. 가장 재능이 뛰어났던 리더가 졸업 전에 이민을 가 버리고, 나머지 네 사람도 사는 길이 워낙 다른데다 몇 가지 일들로 갈등이 생겨 결속력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중창단 동기들도 그랬지만 동기 동창회도 잘 안 돌아가고 있었다. 약국을 해서 돈을 모은 동창회장은 내년 시의원으로 출마하기 위해 조직을 활성화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래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언제고 접속만 하면 25년 전의 졸업 앨범과 몇 사람의 가족사진들, 송년 모임의 동영상들, 그리고 하루에도 십여 개씩 올려지는 동창들의 메시지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드나드는 사람은 스무 명 안팎이었다. 그리고 컴퓨터에 미리 장치를 해 놓아, ‘근조 아무개 동창 부친상 빈소 00대학병원 장례식장’식으로 메시지를 치면 일제히 전체 동창의 휴대전화에 꽂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각자 살기에 바빠서인지 그것도 반응이 약했다.
중창단 리더였던 조광희가 갑자기 이민을 떠난 것도 가을이었다. 우리는 처음에 아무 영문도 몰랐다. 두 해 동안 같은 반에 짝으로 나란히 앉아 학교생활을 했던 나는 아무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광희는 타고난 재능 때문에 성악을 전공해도 좋을 듯했지만 육군 대령인 아버지 뜻에 따라 법과대학에 가려 하고 있었다. 며칠 표정이 시무룩했는데 나는 그것이 마지막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진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무단결석을 했다. 집에 전화를 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방과후 집으로 찾아갔으나 불이 꺼져 있었다.
다음날 학교에 나온 광희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 브라질로 이민 간다. 아무것도 묻지 마. 아버지의 결정을 따를 뿐이야.”
우리 중창단 동기들은 털썩 풀밭에 주저앉았다.
“언제 떠나는데?”하고 내가 물었다.
“다음달 십삼일 부산항에서 이민선이 떠나.”
우리는 왜 갑자기 떠나냐, 집안에 무슨 문제가 있냐, 아버지가 갑자기 예편을 하게 됐냐, 어떻게 이민을 이십 일 만에 갈 수 있냐, 하고 열심히 물었지만 광희는 머리만 설레설레 흔들다가 벌떡 일어나 교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가족들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입 예비고사가 목전에 있었지만 우리는 방과 후 며칠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의 아버지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고 추측만 하였다.
이민선이 떠나는 날은 월요일이었다. 전날에 우리 넷은 가느다란 희망을 갖고 우리 집에 모여 공부를 했다. 혹시 광희에게서 전화가 올지 모르며, 그런다면 우리 집으로 우선 걸어 올 것이라고 추측했다. 우리의 짐작은 들어맞았다. 저녁 7시경 그에게서 전화가 오고 우리는 잠깐씩 통화를 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부산으로 가자!”
그렇게 말한 것은 머리 회전이 빠른 김호남이었다. 그는 광희네가 고국에서 마지막 밤을 보낼 광복동의 여관 이름과 이민선의 이름을 적은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래!”
나머지 셋은 동시에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마침 우리 집에는 동생들만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장롱에서 돈을 훔치고 대신 편지를 넣었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부산 가서 광희를 보내고 오겠습니다, 하고. 아버지의 카메라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세 친구와 함께 무작정 전철을 타고 영등포역으로 갔다.
일요일 밤이라 열차 좌석표는 없고 간신히 10시에 떠나는 입석표를 샀다. 부산에 내린 것은 새벽 4시 40분, 여관을 찾아 광희와 가족을 만난 것은 6시였다.
광희는 우리를 보자 입이 얼어붙은 사람처럼 눈만 껌벅거렸고 어머니는 "얘들아, 얘들아."하며 울먹였다. 세 살 아래 누이동생 은혜는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광희의 아버지가 우리를 하나씩 끌어안았다.
“이놈들, 예비고사를 코앞에 두고 부산까지 오다니. 올라가는 표는 사 놨느냐?”
“네. 일곱시 십오분 차예요.”
“서둘러야겠다. 역 앞에 가서 아침을 먹자.”
광희네 가족과 우리는 택시를 타고 부산역 앞으로 가서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전화를 빌어 우리 집과 장거리 통화를 하고, 아버지는 술 한 병을 들고 왔다.
“사나이답게 이별주를 마시고 헤어져라.”
광희네 가족들이 자리를 비켜 주었으므로 우리는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고맙다, 얘들아. 여기까지 와 줘서.”
“잘 살아라.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편지해라.”
시계를 보며 천천히 국밥을 떠먹다가 내가 물었다.
“왜 떠나는지 이젠 말해 줄 수 있지?”
조광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시간 뒤엔 떠날 테니 말해도 되겠지. 대신 너희들은 입을 열면 위험해진다는 걸 명심해. 보도통제 때문에 그냥 묻혀 버리겠지만 아버지는 독재정권을 쓰러뜨리는 군사혁명 조직에 참가하셨어. 그걸 정보기관이 눈치챘지. 장성과 고급장교들을 줄줄이 구속하면 세상에 알려질 테니까 은밀하게 처리하고 있어. 아버지는 남미행 이민선에 실어 보내라는 게 높은 분의 뜻이었대.”
내가 광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남들은 일년이 더 걸린다는 이민절차를 후딱 해치운 거구나.”
우리는 아직 어둑어둑한 역광장을 걸었다. 늦가을 아침 바람은 차가웠다. 가로등 불빛에 어깨를 응승그리고 걷는 우리 다섯과 광희네 가족들의 그림자가 커졌다가 다시 작아졌다.
우리는 플랫폼까지 갔고 거기서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포옹을 했다. 그리고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올드 랭 사인’을 불렀다. 앞곡은 우리 중창단의 상징적인 노래였다. 몇 해 전 우리 선배들을 데리고 중창단을 창단한 음악 선생이 무척 좋아하여 집중적으로 연습시켜 대표곡이 되었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이 중창단 이름을 '파랑새’라고 지었던 것이다.'지나간 오랜 옛날’이란 뜻을 가진 스코트랜드의 이별 노래인 뒷곡은 선배들이 졸업할 때 불러주던 것이었다. 부산역 플랫폼에서 처음에는 테너 파트를 나 혼자 불렀는데 묵묵히 듣고 있던 광희가 하이 테너를 넣으며 들어왔다. 아침 플랫폼에 남성 5중창이 울려 퍼지자 승객들이 모여들었다. 곡이 끝나자 사연을 물었고 사정을 알고는 뜨겁게 박수를 쳤다.
인천의 학교에 도착한 것은 5교시가 진행중인 오후 2시경이었다. 우리는 삼년 개근이 깨어졌고 4시간 동안 복도에서 무릎을 꿇는 벌을 받았다.
나는 인연이 있는 현금 많은 큰손들에게 예금을 요청하는 전화를 하고 창구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챙기며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내 젊은 날을 풍요롭게 했던 중창단의 노래들과 친구를 보냈던 부산역의 정경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나는 어찌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옛 친구를 맞으러 나가기로 결심했다.
오후 6시를 앞두고 동인천역에 도착해 유료 주차장에 차를 두기 위해 택시 승강장 옆으로 난 통로를 타고 들어갔다. 알루미늄 난간에 기대 서 있는 동식이 보였다. 지난해 말 동창회 송년회에서 보고 열 달 만에 만나는 것인데 앞머리가 더 벗어지고 배도 더 많이 나와 있었다.
내가 차창을 열자 그는 놀부처럼 심술 섞인 표정을 하고 말했다.
“이렇게 올 수 있는데 아까는 왜 퉁겼냐, 임마.”
나는 그를 외면한 채 입을 열었다.
“너 보고 싶어 온 게 아니라 광희가 허탕칠 거 같아서 왔다, 임마.”
차를 전진시키려는데 그가 내 차 창틀에 손을 짚었다.
“찬이도 왔다. 이건 찬이 생각인데, 광희가 동인천역 어디 나타날지 모르잖아. 그래서 찬이는 백화점 지하 전철 출구를, 나는 택시 승강장을 맡기로 했다. 넌 시계탑으로 가라. 옛날에 늘 거기서 만났으니까.”
주차장에 차를 두고 나왔다. 지난날 이 도시의 중심이었던 역 주변은 한가했다. 십여 년 전에 옛 역사를 헐고 지은 백화점식 상가 건물 빼고는 거의 변하지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길도 그대로이고 건물들도 거의 그대로였다. 백화점식 상가 건물도 외벽이 낡아 시멘트가 벗겨진 자리가 흉터처럼 보였다. 내 일터가 있는 신도시의 화려하고 활기찬 모습과는 달리 조용하고 초라했다.
뻥튀기를 파는 노점상과 중국산 싸구려 양말을 파는 리어카들, 유리문이 부서진 공중전화 부스들 사이로 오후의 가을 바람이 낙엽 부스러기를 굴렁쇠처럼 몰고 다니고 있었다.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은 가로등의 기둥이 긴 목을 뽑아 올리고 허리에 울긋불긋한 광고 전단들을 갑주(甲冑)처럼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웃옷 속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기가 울렸다. 전철역을 지킨다는 윤찬이었다.
“왔구나.”
“응, 방금 도착했어. 시계탑 앞이야.”
전신이 증권분석가인 비디오 대여점 주인은 그냥 끊기 심심했는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수학여행 때 김호남이한테 거시기 사진 찍힌 일 생각나니?”
나는 그것이 화해를 구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웃음을 섞어 말했다.
“응. 그런 일이 있었지. 그건 왜 물어?”
“갑자기 생각났어. 사진 찍힌 놈들이 다 모이니까 말야. 물론 우리 옷을 벗기고 찍은 놈은 못 오지만.”
“그렇군.”
나는 핫핫 과장하여 웃으며 발을 옮겼다.
2학년 수학여행 때 우리 다섯은 설악산에 도착하자마자 학년과장 선생한테서 특별명령을 받았다.
“내일 캠프파이어 할 때 교장선생님이 좋아하시는 탐 존스의 '딜라일라’와 ‘고향의 푸른 잔디’를 화음 넣어 부를 수 있겠느냐?”
리더인 광희가 대답했다.
“방을 따로 주신다면 연습하겠습니다.”
여관 2층에 작고 아늑한 방이 하나 있었는데 학년과장 선생은 그것을 우리에게 주었다. 첫날 저녁 우리는 거기서 연습을 했다.
그 때 내가 카메라를 가지고 갔다. 아버지가 사진 찍기를 취미로 가진 터라 우리 집에는 괜찮은 카메라가 있었다. 칼라 필름이 귀하고 현상 인화도 비쌀 때였으므로 나는 단 한 장도 헛두루 찍지 않았다.
연습을 끝낸 다음 소주를 마시고 취해서 정신 없이 쓰러져 잤다. 그런데 취하지 않고 잠 안 자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김호남이었다. 그는 내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낸 뒤 우리들의 바지와 팬츠를 벗겼다. 민망한 말이지만 그가 툭툭 건드리자 우리들 대부분이 페니스가 발기했다. 그는 혼자 킬킬 웃으면서 하나씩 카메라에 담았다.
다음날 아침에 카메라를 꺼내 든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 이번 필름에 몇 방이 남은 줄 알았는데 다 돌아갔네.”
그러다가 내가 착각한 것으로 여기고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둘쨋날 캠프파이어에서 우리는 두 곡을 불렀다. 윤찬의 기타 반주까지 잘 맞아서 효과는 만점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좋아서 입이 크게 찢어지셨다.
여행을 끝내고 귀가하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우리 회사 현상소에 맡길 테니 필름을 다오. 시중의 반값이면 되니까.”
나는 필름을 내드렸다.
사흘 뒤에 일찍 퇴근한 아버지는 사자처럼 성이 나서 다짜고짜 나를 마당에 엎드려뻗쳐를 시키셨다. <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t; F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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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호87님의 댓글
눈시울이 젹셔옵니다 올드 랭 사인이 노래였군요? 지난날의 추억속에 잠긴 내용들이 마치 내가 직접 그러한것처럼 바로 앞에서 펼쳐졌읍니다 음악적 내용은 다소 나에게 한계였지만 내용속에 묻어 유추해 보았읍니다
사는것이란 그저 시간의 비중이 아니라 여정의 비중으로 가는 소풍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읍니다
이환성(70회)님의 댓글
물론 창작이겠지만...정말 아름다운추억을 간직하신 선배님 감사드립니다...인천의 지명 나오니 더 친근감 갑니다..
윤인문님의 댓글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중창 노래가 듣고 싶어지는군요..
김태희(101회가족님의 댓글
작년엔가 인고 중창단 출신이라는 어떤분의 노래를 노래방에서 들었는데 정말 잘 부르시더군요.OB팀 모여서 발표회 가져보심은 어떨지요. 이원규선생님 사시는 아파트 같은동에서 살은 적이 있습니다.
김태희(101회가족님의 댓글
아참,,감동적으로 잘 읽었다는 말을 쓰려다가 딴소리만...정말 감동였습니다.
이원규님의 댓글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나는 중창반 출신이 아닙니다. 소설은 작가가 체험에다 기교와 상상력과 자기 세계관을 얹어 꾸며대는 이야기일 뿐이지요. 이 소설은 고3 때 이민 가서 40세에 돌아왔던 상인천중 1회 인고65회 한동황 동창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고 2003년 8월 [현대문학]에 발표했한 것이지요.
윤휘철(69회)님의 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너희는 함께 인생 길을 걸으며 추억을 이어 왔지만 나는 열아홉 살 가을로 정지됐지.”) --- 다른 세상으로 격리된 자의 아픔 많이 공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