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font color=red>이원규 수필 바이칼 호수로 가며 춘원의 <유정>을 다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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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수로 가며 춘원의 「유정」을 다시 읽다
지난가을 마침내 바이칼 호수에 갔다. 나로서는 세 번째의 시베리아 여행이었는데 앞서 두 번은 제작을 거들었던 방송사의 취재 일정이 바빠 아쉽게도 그냥 비행기로 호수 위를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이번에 대한매일 신문의 해외 항일 유적지 취재 요청을 받고 나는 기획회의에서 여러 가지 명분을 내세워 바이칼의 인접도시 이르쿠츠크를 확실하게 점찍었다.
그 곳에는 한국 공산주의운동사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이르쿠츠크 공산당 창당 건물이 남아 있다, 홍범도가 러시아 적위군 군복을 입음으로써 그가 생애를 걸었던 우리 독립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현장이 있다, 자유시 사변 때 갈란다시베리 장군에게 복속해 버린 홍범도와 달리 우리 독립군의 지휘권을 끝까지 지키려고 복속을 거부하다가 포로가 된 독립군 지휘관들이 갇혔던 감옥이 남아 있다는 것 등이었다.
치타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야간 침대열차를 타고 갔다. 일행은 신문사의 박차장과 사진부 최기자, 그리고 통역으로 따라나선, 백계 러시아인 아버지와 우리 한인 모친 사이에 태어난 혼혈 청년 비탈리 군까지 넷이었다. 시발역인 하바로프스크에서 타지 않은 까닭으로 우리는 침대 네 개 짜리 컴파트먼트 한 칸에 들지 못했다. 두 사람은 한 칸에 들 수 있지만 둘은 세 사람이 이미 차지한 다른 칸의 짜투리 자리에 나뉘어 들게 되었던 것이다.
“걱정 마시오. 내가 짜투리 자리 찾아갈 테니까.”
나는 시베리아 여행이 처음인 두 기자에게 말했다.
결코 불안하지도 아쉽지도 않았다. 잭나이프를 가진 마피아가 있을지도 모르는, 천성 자체가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루스키들 가운데로 혼자 배낭을 메고 들어가서 열다섯 시간을 보내는 일. 그 긴장과 서먹서먹함을 어떻게든 헐어버리고 마음을 활짝 여는 훈훈한 즐거움, 그것을 이미 두 번이나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그 즐거움을 이번에도 만끽했다. 내가 찾아간 컴파트먼트는 60대 노부부와 40대 중년 사내가 타고 있었다. 나는 러시아어 회화책 두 권을 꺼내들고 루스키들이 무척 좋아하는 한국산 초코파이로 환심을 사기 시작했다.
“당신이 서울에서 온 작가라구요?”
젊어서 단편소설 두 편을 써 봤다는 백발의 노신사 알렉산더는 키가 190센티미터는 될 거구였는데 커다란 팔로 내 어깨를 끌어안고 양쪽 뺨을 교대로 비비는 인사를 했다. 그의 아내 나탈리아는 앞가슴이 핸드볼공만큼씩 컸는데 한국산 초코파이처럼 맛있는 것을 먹어본 적이 없다며 즐거워했다. 마흔일곱 살 먹은 건축기사 이고르는 금발이 아름다웠다.
우리는 훈제 연어를 안주로 보드카를 마셨다. 함께 어깨동무하고 몇 년 전 <모래시계>라는 드라마가 테마음악으로 썼던 러시아 민요 <백학>을 같이 불렀다. 적당히 취해 침대에 누운 것은 밤 11시경. 방 안에는 러시아인들의 독특한 노릿한 체취가 히터의 열기를 타고 떠돌다가 코로 스며들어왔다.
여행은 나를 대자적(對自的)으로 바라보게 한다. 내가 고국에 두고 온 사람들, 그리고 크고 작은 문제들과 고민거리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인생의 무거운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자유, 그런 자유 속에서 나는 찬찬히 나를 바라보고 내 소설을 바라보고 내가 두고 온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알 수 없는 객창감과 애수가 불면으로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자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잠은 나를 두고 달아났다. 결국 이리저리 몸을 뒤척거리다가 잠자기를 단념했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일어나 머리맡의 독서등을 켜고 침대 밑에서 배낭을 끌어올렸다. 다른 세 사람이 깨지 않게 소리 없이 뚜껑을 열고 손을 집어넣어 춘원의 장편소설 <유정>을 꺼냈다. 시베리아 밤열차에서 책을 읽는 것은 고상해지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멀리 달아난 잠을 붙잡아오고 싶을 때 내게 가장 잘듣는 처방이 독서인 것이다.
나는 책을 펴들고 독서등을 향해 배를 깔고 엎드렸다. 정비석의 권말 해설이 실려 있고 내려쓰기 2단으로 조판된 1963년판 삼중당 이광수 전집 제8권. 노란색 하드커버에 녹색 케이스가 있는 이 책은 먼지가 낀 채 내 서가의 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꽂혀져 있었다. 나는 거의 40년이 된 이 책의 내력을 문득 생각했다. 지금은 팔순이 넘은 아버님이 중년에 직장에 다니실 때 월부로 구입하셨던 것이다. 나는 이번 러시아 여행에 바이칼 호수를 포함하기로 확정하고 며칠 뒤 이 책을 찾아내 먼지를 털었다. 10대에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읽고 배낭에 넣어온 것이었다.
<유정>의 스토리 라인은 이렇다.
존경받는 교육자 최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같이 했던 친구 남백파가 죽자 그의 딸 정임을 집으로 데려 온다. 그녀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사랑을 느끼고, 그녀도 그를 사랑의 대상으로 느끼게 된다. 일본에 유학한 정임이 앓아눕자 달려가서 수혈을 하고 회생시킨다. 그의 아내는 정임의 일기를 보고 오해하고 분개하며 주변에 이야기하고 그것은 신문에 보도되어 그를 부도덕한 교육자로 낙인찍어 여학교 교장직을 내놓게 한다. 재산을 정리한 그는 일본으로 가서 정임의 고백을 듣고 그녀를 포옹한다. 그러고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시베리아 바이칼호로 떠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그는 R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R은 그와 비슷한 처지에서 여자 제자를 아내로 맞아 고국을 떠난 사람이다. 최석은 그게 옳지 않다고 하고 타이거 삼림 속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으려 한다. 그 사실을 안 정임도 바이칼로 달려가 최석의 주검을 안고 통곡하고 타이거 삼림 속에 묻혀버린다.
권말에 실린 정비석의 해설에는 1937년 1월 [삼천리]에 실린 춘원의 ‘자작의 변(自作의 辯)’이 들어 있다.
문:<유정>은 처녀작 <무정>의 속편입니까?
답:아녜요. 그런 뜻은 없어요. 나는 다만 <유정>에서 인정의 아름다움을 그리느라고 했어요. 외람된 말이지만 만일 내 작품 중에서 후세에 남을 만한 게 있다면 <유정> 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외람한 말이나 외국어로 번역될 것이 있다면 <유정>이라고 생각해요. 더구나 <유정>에서 서백리아의 자연묘사를 한 것에 이르러서는 나는 상당히 힘을 기울였소이다.
춘원은 아마 자신의 내면적 진실이 가장 잘 담겼다고 여긴 듯하다. 그리고 정비석이 유려하다고 판단하여 뽑은 <유정>의 시베리아 배경묘사 중 횡단열차 부분은 이렇다.
가도가도 벌판. 서리맞은 마른 풀 바다. 실개천 하나 없는 메마른 사막. 어디를 보아 도 산 하나 없으니 하늘과 땅이 착 달라붙은 듯한 천지. 구름 한 점 없건만도 그 태양까지도 마치 이루 다 비추지 못하여 ---지평선, 호를 그린 듯한 지평선 위에는 항상 황혼이 떠도는 듯한 세계. 이 속으로 내가 몸을 담은 열차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해가 가는 걸음을 따라 달리고 있소. 열차가 달리는 바퀴소리도 반향할 곳이 없어 힘없는 한숨같이 스러지고 마오.
나는 궁금해졌다. 최석과 남정임은 왜 죽음을 택했을까. 양심적인 교육자인 그에게 남정임에 대한 사랑은 그만큼 큰 죄의식이었단 말인가. 그래서 죽음이라는 자기 징계로써 모든 것을 초극하려 한 것일까. 작가는 소설 속에서 대리 체험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지 않은가. 작가의 행복이란 현실 속에서는 할 수 없는 욕망 충족을 자기 소설 세계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춘원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소설을 썼을까.
최석과 남정임을 ‘백설이 애애한 시베리아’의 타이거까지 끌고 가서 죽게 하는 해결방법은 평생 계몽적 도덕률을 안고 살았던 춘원의 한계와 다름 아니다. 연구가들의 말대로 이 소설이 쓰여진 1933년 춘원은 민족운동의 위기, 인촌 김성수에게 등을 돌린 자의식, 그런 갈등과 함께 사랑의 번민까지 안고 있었다. 그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따르던 스무 살 연하의 모윤숙과 연문(戀聞)이 돌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춘원은 [조선일보]에 이 소설을 연재했다. 그리고 뒷날 이 소설을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말했다.
나는 결국 소설이란 작가의 무의식과 그것의 창조적 의식화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자신도 모르게 춘윈이라는 작가를 화자와 동일시로 바라보았음을 깨닫고 혼자 웃었다. 나도 춘원처럼 속마음을 독자나 비평가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작가인 데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사람들은 종종 작가와 화자를 동일시해 작가를 거북하게 만든다. 내가 몇 번 창작집을 냈을 때도 그랬다. 아내 친구들이 사서 읽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남편 이번 소설책에서 연애 이야기 읽으니까 아주 실감이 난다, 아무리 소설이지만 경험이 있으니까 생생하게 쓰는 게 아니냐, 하고 말이다. 아내가 반농담 반진담으로 내게 그런 말을 전하면 나는 정색하고 대답했다. 소설쟁이의 아내가 작가와 화자를 구별 못하다니 딱하다고. 그러나 속마음으로는 나 자신도 알쏭달쏭하다.
소설 화자에 대한 이론적인 관심은 19세기 후반 화자가 표면에서 숨어버리는 경향이 생기던 무렵 독일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동일시론자들은 작가와 화자를 분리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깨끗하겠지만 그리되면 소설은 작가의 생활과는 무관한 독립된 픽션이라는 잘못된 견해에 빠져든다고, 독자는 작가가 그의 작품을 그의 생애에서 짜냈다는 사실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작가의 인격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분리론자들은 화자란 소설의 바깥에 있는 작가가 대리인으로서 내부에 넣은 것이며, 이야기의 중개자로서 소설 가상세계와 작가와 독자가 생존하는 현실 세계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작가이니 물론 분리론 편에 서지만 때로 거북스러움 때문에 화자를 3인칭으로 바꾼 적도 있다.
춘원은 <유정>에서 액자소설 형태를 택했다. 액자 바깥 소설의 도입부는 1인칭 화자인 ‘나’가 친구인 최석이 바이칼에서 보내온 소포물을 받고 최석과 남정임과의 안타까운 사랑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고, 액자 내부는 친구 딸과의 스캔들 때문에 바이칼 호수로 숨어버린 최석의 고백이다. 그리고 액자 바깥 후반부는 친구인 ‘나’가 최석을 찾아 남정임과 함께 바이칼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여러 가지 방법 중에 춘원은 왜 그런 포맷을 선택했는가 상상하는 것도 흥미롭다.
춘원이 젊은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 자신의 무의식적인 창작 욕구와 여러 가지 갈등과 번민 속에서 <유정>을 구상하면서 선택한 화자를 생각하며 나는 혼자 머리를 끄덕거렸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써 독자와 화자의 거리를 가깝게 하여 신뢰를 획득하되 작가와 동일시될 수 있는 포맷을 버리고 액자를 넣은 것이다.
밤열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유정>의 주인공 최석이 자신의 운명을 처절한 죽음으로 귀결시키기로 결심하고 타고 갔던 바로 그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요람처럼 천천히 나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소설은 왜 쓰는 것일까. 나는 혼자 싸르트르식의 화두를 내 가슴을 향해 던지고 중얼거렸다. 내가 무능하고 용기가 없어서 하지 못하는 행위를 소설 속에서 충족하고 싶어서지. 결국 대리 충족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귀착되었다.
나는 나의 자문자답이 스스로 우스워져서 머리맡의 커튼을 제쳤다. 어둑어둑한 가운데 희끗희끗 자작나무들이 스쳐 갔다. 마치 내 자신이 엿보기 힘든 본연의 나, 나를 소설로 이끌어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본래의 나 같은 모습으로 자작나무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 건너편 침대에서 자던 이고르가 “미스터 너블리스트!” 하고 영어로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그는 짤깍 취침등을 켜고 바닥으로 내려서며 아까 먹다 남은 보다카병을 들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방에서 온 작가여, 당신이나 나나 잠을 못이루는 판이니 술이나 더 마시자고.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이고르와 나는 침실 밖 복도로 나가 간이의자를 펴고 앉아 훈제연어를 안주로 보드카를 마셨다. 이고르는 하바로프스크에 출장 왔다가 톰스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교감을 나누었다. 그는 내가 러시아 소설과 음악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서 대륙처럼 드넓은 러시아 남자의 가슴을 느끼고 있었다.
이르쿠츠크역에 내리자 대낮인데도 공기는 빙초산처럼 싸늘했다. 플랫폼에서 알렉산더, 나탈리아 부부와 건축기사 이고르와 헤어졌다. “다 스비다니야 (또 만납시다).”라는 정겨운 인사말을 허연 입김과 함께 내뿜으며 포옹을 했다.
이르쿠츠크의 목표취재를 한나절에 해치운 뒤 택시를 대절해 바이칼 호수로 달렸다. 눈덮힌 타이거 삼림지대의 풍광을 놓치기 아까워서 몇 번이나 차에서 내려 사진에 담았다. 지천으로 많은 전나무들은 밑둥이 두 뼘쯤 눈에 잠긴 채 하늘을 향해 푸르고 꼿꼿한 머리를 치켜올리고 있었다. 그것들 가운데 박힌 낙엽수들은 잎이 노랗게 물들어 더욱 선명했다. 그리고 사슴이란 놈이 무릎까지 눈에 파묻은 채 귀를 쫑긋거리며 머리를 내밀었다.
곧 앙가라강(江)이 나타났다. 차는 강을 끼고 달렸다. 나는 산야를 덮은 백설을 바라보며 자기를 채찍질하여 이곳까지 온 최석을 생각했다. 소설을 읽고 감동을 극대화하는 것은 인물과 심리학적 동일시를 이루는 것. 나는 그 도덕률의 인물 최석과 저절로 동일시가 되어 그리움과 절망을 안은 채 소설 속에 머물렀다. 젊고 명민하고 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의 환상,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얼마 후 시야가 탁 트이며 바이칼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타타르어로 ‘풍요로운 호수’라는 뜻을 가진 바이칼. 거기에서 밀려오는 시원한 공기, 나는 차에서 내려 흠뻑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물가로 걸어가 사슴처럼 엎드려 호수물을 마셨다.
춘원이 공간배경으로 잡았을 만한 장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 곳은 바이칼호 탐승의 중심지인 유람선 선착장을 3~4 킬로미터 못간 곳의 구릉이었다. 7도(度) 정도의 경사도를 갖고 부채꼴처럼 펼쳐진 밋밋한 비탈, 그 곳에 눈썰매를 타고 삼림으로 들어갈 만한 샛길이 나 있었다. 그 앞 호수는 폭이 좁아 2킬로미터쯤 대안의 어촌들이 숨은 듯이 보였다. 차를 세우고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헤치고 샛길까지 가 보았다. 그리고 눈 위에 최석과 남정임의 이름을 썼다.
선착장에서는 노점상들이 ‘오무리’라는 이름의 바이칼 송어를 훈제하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린 발을 구르면서 독일에서 온 여행자들과 함께 훈제 송어를 안주삼아 보드카를 마시는데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는 독일인들과 함께 낙조를 등에 받으며, 이 곳에 왔던 춘원도 아마도 묵었을 것 같은 바이칼 호텔을 향해 걸어갔다.
(2001년 겨울 월간 [문학과 창작]에 기고한 글. 춘원 전집을 물려주신 아버님은 내가 이 글을 쓴 몇 달 뒤 저 세상으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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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聖鉉님의 댓글
감사합니다.선배님! 주옥같은 글을 읽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劉載峻 67回 님의 댓글
감사 합니다 속편 역시 기대 하겠습니다
이환성(70회)님의 댓글
보드카 못하는 저는 낭만이 덜하겠네요...
차안수님의 댓글
오래전에 읽어 내용이 가물가물합니다만 그래도 조금은 내용이 생각나는군요...계속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