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원규(65회) 단편소설 [천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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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의 꿈
이 원 규
내가 베이징 공항 청사를 나왔을 때는 한여름의 무더운 낮이 끝나 가고 있었다. 저녁해가 옷자락을 걷어올리듯이 거대한 광고탑에 걸린 빛살을 거둬들이고 있었으며,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쪽에 드문드문 선 백양나무들은 허리 높이까지 이미 어둠에 젖어들고 있었다.
나는 갈 곳 모르는 저녁 짐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혼자 여행하며 느끼는 외로움도 있었지만 내일 서울로 돌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망설임 때문이었다. 나는 신문사의 르뽀르따쥬 원고 청탁을 받아 보름 동안 만주 일대를 답사하고 나온 참이었다.
내 곁에 선 은사시나무 가로수에서 갈매미들이 찌르르 찌르르 초조하게 울어댔다. 그 소리들은 소설이 지독하게 안 써지고 이명증에 시달릴 때 귓속에서 끊임없이 울어대어 나를 절망스럽게 하던 소리와 비슷했다.
‘만주 동포들의 구전민요’, 그걸 조사하라고 나를 보내 준 신문사의 원고는 문제없지만 그보다 소설을 써야 한다. 소설 소설 소설. 소설을 못쓰면 내 존재도 없다. 소설감을 얻으려고 여기 온 것이다. 그러나 귀국 날이 다가왔건만 나는 여전히 텅빈 그릇이다. 내 마음속에 있는 내가 손가락질을 하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는 텅빈 그릇이라고.
어둠이 어느 새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배낭 멜빵을 한 쪽 어깨에 걸머멘 채 외로운 개처럼 택시 승차장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내 발소리가 쓸쓸하게 내 뒤를 따라왔다.
택시 기사가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보름 전에 묵었던 인터내셔널 호텔로 가기로 작정하고 한문으로 거기 데려다 달라고 썼다. 기사는 알아본 듯 주절거리더니 차를 몰고 나가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소설에 대한 초조감이 옥죄어 왔다.
택시가 나를 내려 준 곳은 낯선 호텔 앞이었다. 나는 소설에 대한 상념을 책을 덮듯 덮어 버리고 네온사인을 올려다보았다. 천산반점(天山飯店)이라는 한자, 그리고 이탤릭체 영어로 쓰여진 ‘호텔 텐산’ 밑에 붉은 별 다섯 개가 빛을 뿜고 있었다. 인터내셔널 호텔과 다름없는 최고급이라는 표시였다. 붉은 제복을 입은 포터가 다가와 내 배낭을 들었고, 나는 그를 따라 회전문을 빙글빙글 돌리며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 로비는 안락하고 고급스러웠으며 대리석 분수에서는 물줄기들이 몇 가지 색으로 바뀌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묵자. 돈도 넉넉하니 비자가 끝날 때까지 베이징 시내와 근교의 명승지나 어슬렁거리다가 귀국하자.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하다가 무심결에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거대한 그림이 강력한 자석처럼 내 눈을 잡아끌었다. 프런트에서 조금 떨어져 정면 벽 전체를 덮은 그 그림은 너무나 커서 그 앞에 선 사람들이 걸리버의 소인국에 나오는 난쟁이들같이 작아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림 전체를 보기 위해 어린 학생들이 목돌리기 체조를 할 때같이 고개를 휘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백설을 머리에 인 웅장한 산과 구름, 그리고 힘차게 날아오르는 한 마리의 날개 돋친 말이었다. 아, 하고 나는 탄성을 올리며 빨려들듯이 그림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림 위에는 ‘천산천마(天山天馬)’라는 글자가 있었다. 나는 이것이 천산산맥을 배경으로 그려진 천마도라는 것과,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카펫 직조방식으로 만든 타피스트리임을 알았다.
프런트에서 방 열쇠를 받으면서 나는 베이징 근교 관광을 원하니 믿을 만한 여행사를 연결해 달라고 매우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그리고는 천마도를 다시 바라보고 승강기를 향해 걸었다.
방에 들어가 샤워를 한 뒤 한껏 편한 자세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문득 천마도와 함께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떼를 지어 떠올랐다. 밀양 박씨 내 조상의 시조이기도 한 신라의 혁거세왕은 천마가 전해 준 알에서 태어났고 고구려의 주몽도 기린말을 타고 승천했다는 신화,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 그림, 천마총이 신라 지증왕의 것이라는 고고학자들의 추측, 지증왕은 음경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나 되어 왕후를 구하기 어려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 따위였다. 그것들은 호텔 로비의 오색 분수같이 내 머릿속에서 순서 없이 떠올랐다 가라앉곤 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들고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가로등 하나가 내 방 바로 아래까지 목을 뽑아 올리고 있었는데 나방이와 하루살이 들이 서로 먼저 타 죽겠다고 아우성치며 날아들고 있었다. 나는 다시 침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초조감이 절망의 하루살이들같이 다시 내 머리 위로 엄습했다. 소설보다 더 감동적인 일이, 소설보다 더 극적인 일이, 소설의 인물보다 더 놀라운 인간들이 수없이 나를 놀라게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뛰어넘는단 말인가. 서른다섯 살. 상상력이나 감성이 아직 마를 때는 아닌데 나는 메마른 강바닥처럼 고갈되어 있다.
--여보세요. 텔레비전, 케이블 텔레비전, 비디오 레코더, 컴퓨터 씨디 롬. 볼 게 허다한데 누가 골치 아픈 내용으로 된 당신 소설을 읽나요. 이젠 팔리는 소설을 쓰세요. 누구는 당신같이 신춘문예 통해 어렵게 등단하지 않았으면서도 소설 한 권 써서 베스트셀러 만들어 텔레비전 토크쇼 진행자도 되고 탤런트하고 결혼도 하고, 누구는 광고 모델까지 하지 않아요. 당신도 소설에 꿀을 발라 매혹적인 상품으로 만드세요.
그렇게 말하는 아내는 서른세 살이 되어도 시들지 않는 농밀한 여인. 사업 수완이 좋아 나보다 수입이 많다. 아파트 평수 늘리기, 설악산에 콘도미니엄 마련하기, 자동차 새 것으로 바꾸기, 큰아이의 바이올린 레슨비, 작은아이의 피아노 레슨비, 내 집필실로 쓰는 오피스텔 관리비. 내가 무수히 날아오는 지불 청구서들 가운데서도 휘청거리지 않는 것은 모두 아내의 덕분이다. 그녀는 보름 전 내가 떠나올 때 용돈을 5천 달러나 주었다. 내 소설이 빛을 잃을 때부터 그녀는 활기가 살아났다. 나의 열패감은 그녀와 함께 눕는 침대에까지 이어진다.
예술가여, 묵묵히 만들어라. 말하지 말라. 그저 내뱉는 입김이 그대의 시이니라. 괴테의 거룩한 말이다. 이봐, 르뽀 원고를 건성으로 쓰라는 건 아니지만 자넨 전업작가가 아닌가. 이번 여행에서 소설의 영감을 잡아 와. 자기가 일하는 신문에 지면을 만들어 준 대학 선배의 말이다.
이것저것 다 잊으려고 침대 옆 탁자에 있는 텔레비전 무선조절기를 집어 들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지만 내 눈을 끄는 것은 없었다. 나는 중국말을 거의 모르는 여행자였던 것이다. 아무 채널이나 틀어 놓고 구경하는데 전화기가 울었다. 수화기를 들어보니 여행사의 조선족 안내원이었다. 나는 사흘간의 베이징 시내와 근교 관광안내를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어느 날 아침 내 몸뚱이가 말로 변해 있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가 큰 딱정벌레로 변한 것처럼. 길게 뻗은 네 다리, 길쭉한 머리와 뿔처럼 솟아난 두 귀, 목덜미에 난 갈기, 그리고 야구 방망이처럼 거대하게 발기한 생식기를 가진 말이었다. 내가 놀라 탄식하는데 목소리도 히이잉 말 울음소리로 울려 나왔다.
잠에서 깼을 때는 새벽 두시 경이었다. 겨우 세 시간 남짓 눈을 붙이고 이상한 꿈 때문에 깨어난 것이었다. 꿈속의 기억은 방금 겪은 일처럼 선연해서 나는 정말 내가 말로 변신한 게 아닌가 내 몸을 둘러보았다. 이마와 등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한참동안 멍하니 침대에 앉았던 나는 성기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없이 쪼그라져 있었다. 문득 까마득히 깊은 골짜기에 묻혀 있던 한 조각의 기억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철없던 유년시절에 보았던 말이었다.
아마 여섯 살 때였던 것 같다. 아버지가 나를 늙은 마부네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나는 기관지가 약해 늘 천식을 안고 살았는데 말과 입을 맞추면 낫는다는 속설을 믿으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무섭다고 발버둥치며 우는 나를 안아 기어이 그 검푸른 털을 가진 말과 입을 맞추게 하셨다. 말은 온순해서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지만 나는 엉엉 울면서 아버지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저자거리에서 한 번 더 그 말을 보았다. 말이 끄는 여러 대의 달구지가 모여 있었는데 그 말도 거기 있었다. 그 말은 달구지의 멍에를 메고 있었고 입에 거품을 물고 암말의 등뒤로 다가가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보았다. 과수원 말뚝처럼 길고 굵은 생식기가 물기로 번들거리며 배 밑에서 쑥 나와 있는 것을.
그 말에 대한 기억은 그 시절 가지고 놀았던 구슬이나 딱지, 잘 돌아가던 팽이, 바람개비, 방패연, 종이배 따위와 함께 작은 편린으로 망각의 골짜기 깊은 곳에 묻혀 있다가 표층으로 떠오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나는 말에 대해 더 이상의 기억이 없었다. 그 때 이후 다시 말을 본 기억도 없었으며 경마장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 만났던 말, 베이징에서 우연히 보게 된 타피스트리 벽화, 천마총과 지증왕, 이 모든 것들이 왜 갑자기 뛰어나와 나를 에워싸는 것일까. 나는 모두가 부질없는 몽상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해도 잠은 오지 않았다. 배낭에서 책을 꺼내 읽어도, 룸바에서 부드러운 코냑을 꺼내 마셔도 소용없었다. 결국은 아침이 밝아오고 말았고, 나는 욕실로 가서 수면 부족으로 푸석푸석한 얼굴을 닦았다.
아침 식사를 한 뒤 다시 거대한 타피스트리 앞으로 갔다. 빨려드는 듯한 느낌은 여전했다.
“서울에서 오신 박준 선생님이십니까?”
옆에서 한국말 음성이 들려 돌아보니 어떤 청년이 웃고 있었다. 그는 만나기로 약속한 조선족 안내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턱끝으로 타피스트리를 가리켰다.
“천산산맥에 사는 유목민들이 만든 겁니다.”
그리고 그는 자금성, 명십삼왕릉, 이화원, 만리장성 따위 베이징 근교의 관광지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으나 내 귀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천산산맥은 어디인가. 중국의 서쪽 변방 실크로드 타클라마칸 사막 너머에 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막고굴과, 이노우에 야쓰시(井上靖)의 소설 ‘돈황’의 무대보다도 아득히 멀어 가기 힘든 곳. 그리고 천리명마가 사는 곳. 나는 손으로 타피스트리를 가리켰다.
“천산에도 갈 수 있소?”
안내원 청년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산산맥 너머에 있는 우루무치까지 가는 건 어렵잖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내 비자는 닷새 남았어요. 그 사이에 다녀올 수 있겠소?”
“직항 항공편이 매일 있어요. 호텔 예약은 문제없을 거구, 영어 가이드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회사가 모든 걸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운 좋으면 오늘 오후에 떠나는 비행기표를 잡을 수 있을 거구요.”
조선족 안내원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어서 그걸 잡아 주시오.”
오후에 나는 우루무치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승객들 가운데는 눈이 파랗고 얼굴이 흰 반동양 반서양의 얼굴을 가진 중앙 아시아인들이 더러 섞여 있었다.
나는 기내식을 먹자마자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다섯 시간을 날아야 하는 먼 비행인데다 서너 시간의 시차가 생길 것이므로 일단 밀린 잠을 자둬야겠다는 생각해서였다. 간밤에 잠을 설친 때문인지 요람에 누운 아기처럼 나는 편안히 잠에 빠졌다. 안 써지는 소설에 대한 초조와 절망도 잊어버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기내 방송에 놀라 잠을 깼다.
“기장입니다. 곧 천산을 넘느라 급상승과 급강하를 하겠으니 좌석띠를 매시기 바랍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기장의 목소리도 긴장해 있었지만 승객들이 거의 모두 기창으로 밖을 내다보기 때문이었다. 몇몇 사람은 주문 같은 것을 외기까지 했다. 그들은 위그르인이거나 카자흐인들이었다.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그들의 말에서 내가 알아들은 것은 “알라 알라!”뿐이었다.
좌석띠를 매며 그들처럼 기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만년설을 머리에 인 산봉우리들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형상으로 비행기를 찌를 듯이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봉우리들은 구름이 허리에 감겨 있었으며 거대한 도끼로 찍어낸 듯한 협곡은 내가 탄 제트 여객기쯤은 흔적도 없이 삼켜 버릴 것같이 컸다. 나는 두려움을 느끼며 심호흡을 했다.
어마어마한 준봉이 앞쪽에서 천천히 다가왔다. 지금까지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봉우리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비행기는 마치 우주의 블랙홀에 빨려들듯이 곧장 설산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태초의 신비가 깃들인 듯한 설산은 눈부시게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고 손을 뻗으면 닿을 듯이 가깝게 보였다. 왜 비행기가 천산의 최고봉보다 낮은 고도로 아슬아슬하게 접근하는 것인가. 나는 불안을 떨치려고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승객들도 나처럼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비행기는 기수를 급히 왼쪽으로 돌려 우뚝 버티고 선 빙벽을 옆구리에 차듯 끼고 날기 시작했다. 반대편 기창을 내다보던 승객들이 탄성을 올렸다. 목을 뽑고 그 쪽을 바라보니 그 쪽에도 우뚝 선 빙벽이 보였다.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천산산맥의 정상을 넘는 것이 아니라 해발 4천 미터쯤 높이에 문처럼 열린 거대한 협곡으로 빠져나가는 것임을.
협곡을 벗어난 비행기는 갑자기 곤두박질하듯 기수를 아래로 숙였다. 마치 높이 비상했다가 내려앉는 거대한 고니처럼. 기압의 변화 때문에 귀가 멍하더니 고막을 꼬챙이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여객기를 수도 없이 타 보았지만 이렇게 급하게 하강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승객 여러분, 무사히 천산을 넘었습니다. 곧 우루무치 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방송이 다시 울려나오고 비행기는 하강각도를 조금 줄였다. 기창을 내다보니 눈 녹은 고원이 갑자기 뭉툭 끊어지면서 사막이 시작되고 있었다. 타클라마칸이었다.
여객기는 무사히 착륙했고 나는 승객들에 섞여 기문을 나섰다. 땅바닥을 디디고 서자 햇빛이 얼굴을 향해 바늘 끝처럼 따갑게 쏟아졌다. 그리고 사막에서 불어오는 열풍이 장딴지를 휘감았다. 나는 사람들을 따라 공항청사를 향해 걸었다. 활주로 너머 아득히 멀게 펼쳐진 지평선 저 끝에 내가 비행기 안에서 경탄하며 굽어보았던 천산이 장려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산중턱은 뭉게구름에 휘감겨 있었으며 흰 눈에 덮인 상봉은 푸른 기운에 싸여 있었다. 저 산은 왜 어제부터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서 있다가 앞서 간 승객들을 따라 잡았다.
시내로 들어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가벼운 흥분에 젖은 채 차창을 스쳐 가는 거리 풍경을 내다보았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석류나무들이었다. 꽃이 막 지고 열매가 두툼하게 익어 가는 석류나무들은 이 도시에 지천으로 많은 듯했다. 서양인들처럼 깊고 푸른 눈에 오똑한 코를 가진 여인들, 콧수염을 기르고 반달칼을 허리에 찬 사나이들, 그들은 대개 원색이 강한 아라베스크 무늬로 된 옷을 걸치고 거리를 천천히 걸어갔다. 수박과 포도를 실은 달구지를 끄는 말, 주인을 싣고 천천히 걸어가는 낙타, 그리고 푸른색 지붕을 한 모스크 사원도 보였다.
또 한 가지 나를 흥분시키는 것은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시차였다. 오후 9시가 지났는데도 내가 베이징을 떠나던 4시경과 다름없이 해는 조금 서쪽으로 기운 채 열기를 확확 뿜어내리고 있었다.
예약된 홀리데이인 호텔에서 버스를 내렸다. 일부러 그렇게 설계했는지 호텔 로비의 창문 밖으로 멀리 천산의 만년설이 보였다. 해가 더 많이 기울었기 때문인가. 천산은 푸른색이 옅어져 있었다.
호텔 프런트에서 위그르족 지배인이 내 여권을 들여다보며 알은체를 했다.
“부탁하신 영어 가이드를 구했지요. 그는 카자흐족인데 찝차도 갖고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을 불러 주십시오.”
그는 로비의 소파에 앉아 있는 어떤 사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사내는 콧수염을 기른 얼굴을 앞세우고 곧장 프런트로 걸어와서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이스마일 파하르입니다. 당신의 목적지는 어딘가요?”
그는 푸른 눈을 뚜렷이 들어 나를 바라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천산에 가고 싶어서 왔소.”하고 나는 창 밖으로 천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콧수염을 손등으로 쓸었다.
“당신은 지금 천산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커다란 새처럼 날아 천산을 넘어오지 않았나요?”
“말을 보고 싶소. 억센 다리로 우뢰처럼 내닫는 천산의 명마를 말이오.”
나는 이렇게 대답한 뒤에야 내가 정말 말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말을 보러 가신다구요?”
“그렇소. 갈기를 휘날리며 끝도 없는 사막을 질풍처럼 내닫는 천리명마를 말이오.”
이스마일은 얼굴이 갑자기 무쇠탈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나는 당신을 안내하지 않을 거요.”
하고 중얼거리고는 휑하니 몸을 돌려 걸어갔다.
“가이드를 안 맡아도 좋으니 이야기나 합시다.”
나는 달라붙듯이 그의 팔을 잡았다. 거절하는 이유가 어떤 금기나 외경심 때문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를 로비에 있는 의자에 끌어 앉혔다.
“나는 말을 탈 줄도 모르고 말을 본 기억도 별로 없소. 그런데 천산과 천산의 말이 나를 끌어당겼소.”
나는 직업이 작가로 표시된 명함을 한 장 건넸다.
“아, 당신은 작가이군요.”
“그렇소.”
나는 날개 돋친 말 타피스트리를 본 기억과 내 몸이 말로 변했던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보통 외국인을 안내할 때 받는 사례를 두 배로 쳐서 주겠다고 제의했다.
이스마일은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천산에 가겠어요. 왕복 이틀이 걸리니까 사례는 그걸 기준해서 받겠어요. 두 배를 받지는 않겠다는 말입니다. 신성한 천산이 당신을 받아들일지, 당신이 천산의 말을 볼지 못볼지는 나도 모릅니다.”
나는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콧수염 때문에 통 짐작할 수가 없던 나이를 물었다. 나보다 다섯 살쯤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두 살 적은 서른세 살이었다. 내가 형이고 너는 아우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스마일은 나를 껴안고 콧수염을 뺨에 비벼 댔다.
나는 이스마일에게 아까는 왜 주저했는가 슬쩍 물었다. 이스마일은 호텔 로비의 창으로 천산을 바라보았다.
“천산에 가보면 저절로 알 겁니다.”
다음날 아침, 이스마일의 찝차는 사막 저 끝에 장려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천산을 향해 달렸다. 이스마일은 카자흐 문양인 아라베스크 무늬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와 사뭇 달라 보였다.
사막의 길은 직선으로 뚫려 있었다. 바람에 밀려온 모래가 이따금 길 위에 봉싯하게 솟아 있어 찝차는 속력을 내지 못했다. 다른 차들의 통행은 없었다. 해가 중천으로 떠오르면서 열기가 확확 밀려 왔다. 나는 온몸이 땀에 푹 젖어 숨을 헐떡거려야 했다.
서너 시간을 달렸는데도 천산은 별로 가까워진 것 같지 않았다. 열사가 햇볕을 받아 아지랑이가 이글거리는 지평선 멀리 앉아 있었다.
“저 바위 밑에서 점심을 먹는 게 좋겠어요.”
이스마일이 턱이 튀어나오듯 움푹 패인 큰 바위를 가리키고는 그 쪽으로 차를 몰고 갔다. 그러고는 키 작은 풀 위에 륙색을 풀고 보자기를 꺼내 폈다. 천연꿀에 잰 무화과와 훈제 양고기와 둥글고 얇게 눌러 구운 ‘난’이라는 이름의 빵과 수박이었다. 나는 바위 그늘에 앉아 그를 따라 난을 손으로 찢어서 천연꿀에 찍어 먹었다.
열풍이 모래를 일으켜, 반달칼을 휘두르며 돌격하는 유목민의 기병대처럼 엄습해 왔다. 서걱서걱 모래가 씹히는 난을 다 먹은 뒤 나는 바위 그늘에 다리를 뻗고 앉아 더위 먹은 개처럼 헐떡거렸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열풍으로 꿈틀거리고, 내 절망까지도, 아니 내 생명까지도 불태워 버릴 것 같았다.
“어서 떠납시다.”
나는 비틀거리며 찝차로 걸어갔다.
찝차는 다시 펄펄 끓는 사구(砂丘)를 달리기 시작했다. 땀이 비오듯 흐르고 다시 마르고 내 의식까지도 말라 버리고, 내 존재마저도 말라 버리는 것 같았다.
한참만에 녹색의 수림으로 덮인 구릉이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나는 정신을 차렸다. 천산의 밑자락이었다. 이스마일이 갑자기 차를 세우며 소리쳤다.
“저기 말떼가 있어요.”
나는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백 마리, 아니 이백 마리쯤 될까. 우리와 멀지 않은 초원에서 말들이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수목들이 무더기무더기 서 있어 그 뒤로 금방 사라지고 말았지만 나는 말떼의 질주를 분명히 보았다. 극히 짧은 시간이었으므로 그것이 야생마인지 목동이 몰고 달리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가슴이 뛰었다.
“말을 봤으니 만족하나요?”
이스마일의 말에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가 혹시 말을 보았으니 돌아가자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그는 다시 수림이 우거진 구릉을 향해 달렸다. 그 곳에선 석류나무와 무화과나무와 이름 모를 활엽의 수목들이 어우러져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똬리를 튼 뱀처럼 구비진 수림 속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따금 양떼를 모는 목동들이 눈에 뜨이고, 새들도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다녔다. 숲속에서 세차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올라갈수록 더 커졌다.
찝차는 한 시간쯤 뒤 녹색 풀이 돋아나고 석류나무가 줄줄이 늘어선 마을을 지났다. 마을 한가운데로는 폭이 좁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천산 기슭에 이런 마을이 있군. 강이 흐른다니 놀랍소.”
내 말에 이스마일이 대답했다.
“강은 사막 밑으로 숨어 흐르다가 오아시스에서 몇 번 다시 솟아오르지요. 카자흐족은 그런 곳에 모여 살아요. 저 마을도 카자흐가 삽니다.”
이스마일은 눈앞에 보이는 마을을 가리켰다.
“당신들 카자흐족은 천산산맥 너머에 있는 카자흐스탄 평원에 많이 살지 않소?”
“그래요. 하지만 절반쯤은 천산을 끼고 곳곳에 흩어져 살아요. 지금도 천산에서 문명 사회와 담을 쌓고 사는 부족들이 있어요.”
그는 마을로 들어가 강변에 있는 석류나무 그늘에 차를 세웠다.
“여긴 토크순읍인데 우리가 오늘 밤 묵을 곳이에요. 친구 집에 잠깐 다녀오겠어요.”
그는 어디론가 걸어갔다. 나는 차에서 내려 강물로 내려가서 물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사막의 물답지 않게 얼음처럼 차가웠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마을을 구경했다.
마을에는 수레를 끄는 말과 낙타와 당나귀가 많았다. 포도를 가득 실은 짐마차, 사과를 싣고 뒤뚱거리는 당나귀, 허리에 뿔피리와 반달칼을 찬 목동을 따라 쫄랑쫄랑 걸어가는 양떼들. 마부와 목동 들은 원색의 아라베스크 무늬가 새겨진 망토 같은 옷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는 씩 웃으며 내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카자흐어로 뭐라고 소리쳤다.
유목민들의 바자르가 열리는 날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그리고 말을 찾았는데 그것들은 거의 모두 늘씬한 몸을 갖고 있었다. 안장을 얹은 승마용은 하나도 없고 수레를 끄는 멍에를 쓰고 있었으나 힘차고 균형 잡힌 모습이었다.
어디선가 북과 나팔과 심벌즈가 독특한 리듬의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원시의 분위기를 풍기는 이상한 소리였다. 나는 작은 둔덕으로 올라가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저자 앞에 있는 작은 모스크 사원이었는데 원주민 옷을 입은 사내들이 사원 건물 아치문 위의 테라스에서 힘찬 몸짓으로 악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저자의 모든 사람들은 일시에 땅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예배가 끝나고 조금 뒤 이스마일이 돌아왔고 찝차는 다시 떠났다. 산을 올라갈수록 물소리가 더 커졌다. 나는 호수가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나 달려 올라갔을까. 우리는 가파른 구릉 앞에서 차를 세우고 내렸는데 그 곳에는 키 작은 풀들이 페르샤 융단처럼 깔리고 검은 바위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나는 이스마일을 따라 골짜기로 난 오솔길을 타고 걸어 올라갔다.
“당신은 여섯 개의 천산 호수 중 한 곳에 왔어요. 카자흐족은 여기서 태어났어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광대한 호수가 시야 가득히 들어왔던 것이다. 호수는 물감을 풀어 놓은 듯이 짙푸른 색이었으며 수면은 미동조차 없이 고요했다. 까마득히 먼 호수의 대안에는 폭포가 실타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호수가 카자흐족의 고향이란 말이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천마가 물어다 놓은 알에서 태어났대요.”
갑자기 물안개가 호수 저 쪽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금방 수면을 덮으며 밀려 왔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를 포위하듯 에워쌌다.
“어서 내려가요. 해 지기 전에 토크순읍에 도착해야 해요.”
이스마일이 나를 재촉했다.
안개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어서 앞창에 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마치 물 속을 헤치고 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스마일은 열심히 길을 찾아 차를 몰았지만 아까 올라온 길은 없었다.
갑자기 안개가 옷을 벗듯이 걷혔다.
“이스마일, 우린 서쪽에서 온 게 분명하니까 서쪽으로 가요.”
나는 연신 방향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스마일이 내 지시대로 차를 몰았는데도 한참 후 나는 우리가 아까 간 길을 다시 지나고 있음을 알았다. 등산가들이 링반델룽이라고 부르는 혼란에 빠진 것이었다. 이스마일이 숲속으로 뚫린 길을 하나 찾아내 그 쪽으로 뚫고 나아갔으나 이번에는 차가 미끄러지며 구렁에 빠지고 말았다. 내려서 보니 짐승을 잡기 위해 파 놓은 작은 함정이었다.
나는 이스마일와 함께 찝차가 빠져나갈 수 있게 땅을 파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이 울고, 이따금 바람이 불면서 종려나무 잎들이 사르르 사르르 스치는 소리도 들려 왔다.
“당신은 천산의 말에 대해 소설을 쓸 건가요?”
하고 이스마일이 물었다.
“그렇소. 내 정신 속에 있는 말을 소재로 잡아서 쓸 거요.”
그 때였다.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나더니 이스마일처럼 아라베스크 무늬가 있는 천으로 온몸을 가린 기마대가 우리를 둘러쌌다. 그들은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사나운 얼굴에 붉은 칠을 하고 새의 깃이 달린 모자를 쓴 차림이었으며 장총과 반달칼을 차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들이 아까 이스마일이 말한 문명사회와 담을 쌓고 살아가는 부족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스마일이 긴장한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문명을 거부하는 욜와즈 부족이에요.”
그는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가 제 가슴을 끌어안는 동작으로 지휘자로 보이는 자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카자흐어로 뭔가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으나 말 탄 지휘자가 이스마일에게 왜 외방인을 데리고 왔느냐고 추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 겁이 났지만 뜻밖의 모험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참만에 이스마일이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를 자기네 부족 캠프로 데려 간대요. 대장 이름은 무스타파에요. 순종하면 해치지는 않을 거에요.”
“순종한다고 해요.”
내 말을 이스마일이 통역하자 무스타파라는 지휘자가 나를 바라보며 안장도 없는 빈 말 두 필을 가리켰다. 말을 타라는 뜻 같았다.
“당신이 말을 탈 줄 모른다고 말하겠어요.”
이스마일은 이렇게 내게 말하고 그대로 통역하는 듯했다. 그러자 무스타파가 내게 팔을 뻗었다. 같이 타자는 뜻으로 알아듣고 나는 그것을 잡아 그의 뒤에 올라탔다. 이스마일도 날렵하게 빈 말에 올라탔다.
그 순간 말들은 땅을 박차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뜩할 정도로 빠른 질주였다. 나는 떨어질까 두려워서 무스타파의 가죽 허리띠를 꽉 잡았다. 바람이 소리를 내며 내 귀를 스쳐 가고 천산의 나무와 풀들이 쏜살같이 뒤로 달아났다. 내가 궁금해서인지 이스마일이 이따금 말을 몰아 내 곁으로 다가왔다 멀어지곤 했다.
기마대는 물이 흐르는 골짜기 두 개와 작은 봉우리 두 개를 넘었고 관목과 키 큰 풀들이 자라는 초원도 달렸다. 내가 탄 말을 두 사람을 싣고도 거침없이 달렸다. 무쇠로 된 다리와 무쇠처럼 튼튼한 심장을 가진 듯 달리면 달릴수록 더 빨라졌다.
말들이 갑자기 속도를 줄였는데 치렁치렁 가지를 늘인 종려나무와 무화과나무 사이로 가죽천으로 만든 듯한 원뿔형 천막들이 나타났다.
“욜와즈 유르따!
하고 무스타파가 원뿔형 천막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카자흐어로 욜와즈란 용사(勇士)를 뜻하고, 유르따는 펠트 천으로 만든 유목민의 원뿔형 이동 가옥을 뜻하는 것이었다.
마을에서는 여인들이 그늘에 앉아 융단을 짜고 있었으며 소년들은 말을 탄 채로 양떼를 우리 안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어떤 사내가 번쩍번쩍 날이 선 반달칼로 양의 목을 내리쳤다. 떨어져나간 머리에서는 눈이 껌벅거리고 몸뚱이는 펄쩍 뛰어 올랐다. 양을 도살한 사내는 벌떡거리는 양의 심장을 손에 들고 나를 향해 씽긋 웃었다.
나는 캠프의 중앙에 있는 제일 큰 유르따 앞에서 말을 내렸다. 울긋불긋한 새털모자를 쓴 노인이 나왔다. 그는 말의 머리가 조각된 지팡이를 짚고 있었으며 막료로 보이는 원로들을 거느리듯 있었다. 이스마일이 내게 재빨리 족장이라고 말했으므로 나는, 어떻게 나오는가 보자, 하고 대뜸 엎드려 큰절부터 했다.
“위대한 욜와즈의 족장님, 저는 동방에서 왔습니다.”
나는 수첩을 펴서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그리면서 열심히 설명했다.
족장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두 팔을 뻗어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대는 신라에서 왔군. 목이 마를 테니 말젖을 마셔라.”
신라라는 말에 나는 나를 둘러싼 시간이 갑자기 천 년을 거슬러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족장의 종자(從者)가 철철 넘치게 말젖을 담은 나무 대접을 내밀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 마셨다.
“그대는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 향료인가, 금인가?”
족장의 말에 나는 먼 나라에서 온 사자(使者)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천산의 말을 보고자 왔습니다.”
이스마일이 이 말을 통역하는데 그치지 않고 뭔가 길게 설명했다. 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모두 다 말하는 듯했다.
족장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갔다.
“무스타파, 동방에서 온 자에게 우리 욜와즈의 종마를 보여 주거라.”
나는 무스타파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같이 붙잡혀 온 이스마일과 함께 유르따 밖으로 나섰다. 온 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유르따도, 종려나무 잎사귀들도, 이스마일도, 무스타파도, 내 몸도 황금빛이었다. 사막의 해가 끝도 없는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무마다 깃을 찾아드는 새소리로 요란했으며 석류나무 아래서 두 사내가 지는 해를 향해 서서 이현금(二絃琴)과 북을 연주하며 비감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말들은 종려나무 숲에 만들어진 약간 경사진 우리 안에 있었다. 장총과 반달칼로 무장한 다섯 명의 무사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모두 삼사백 마리쯤 될까. 막 초원에서 돌아온 듯 그들은 대체로 조용했다. 우리 안을 가르고 지나가는 실개천에서 맑은 물을 마시며 투르르 투레질을 하는 말, 둥그렇게 만들어진 목책을 따라 괜히 몇 걸음을 겅둥겅둥 달려 보는 말, 벌써 잠을 청하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서 있는 말. 말들은 천산의 스텝 초원에서 뛰어서인지 살지고 털에서도 윤이 났으며 활력이 넘쳐 보였다. 더구나 금빛 낙조가 서쪽에서 뻗쳐 와 아름답기까지 했다.
무스타파가 휘익 휘파람을 불고 무청이 달린 홍당무 몇 개를 머리 위에서 흔들다가 우리 안으로 던졌다. 말들은 잠시 어깨싸움을 하며 동요했으나 갑자기 투르르 투레질 소리가 나자 고개를 숙이고 조용해졌다. 그 때 나는 보았다. 매우 잘 생긴 적토빛 수말 하나가 무리를 물길처럼 가르며 유유한 자세로 걸어오는 것을. 나는 말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그 말이 욜와즈족의 종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탄탄하면서도 미끈하게 발달한 네 다리와 늘씬한 허리도 눈길을 끌었지만 범접할 수 없는 위엄 때문이었다.
종마는 홍당무를 물고 의젓한 눈으로 무리들을 바라보더니 유유히 씹어먹기 시작했다. 청부루말 한 마리가 도전하는 듯 머리를 쳐들고 다가왔다. 그러자 종마는 앞발을 들어 번개처럼 빠르게 목덜미를 후려갈겼다. 청부루는 쓰러질듯 비칠거리며 달아났다.
무스타파가 손으로 종마의 배밑을 가리켰다. 종마의 생식기는 앞머리만을 내보이며 두툼한 껍질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그 주변의 털이 적토색이 아니라 거무튀튀하게 변해 있었다. 무수히 많이 암컷과 교배를 하느라 정액에 젖어서 그렇거나, 아니면 그래도 넘치는 정액이 고여서 그런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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