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원규(65회) 단편소설 [강변에서의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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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에서의 하룻밤
이 원 규
비행기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중국어 방송이 흘러나오고 천장의 좌석 띠 표시등에 불이 들어왔다. 곧 착륙한다는 방송이겠지. 김현규는 손목시계를 보며, 뒤로 조금 눕혔던 시트를 정상 위치로 당기고 좌석띠를 맸다.
연변에 네 번째 들어가는 옆자리의 박사장이 투덜거렸다.
“젠장, 중국 국내선은 이래요. 자기네 말로만 방송을 한단 말예요.”
김현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좌우를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한국인들, 행색으로 보아 백두산 탐승 패키지 관광단원들이었다. 위태롭게 버텨 가는 회사를 놓아두고 떠나 온 그로서는 그들의 여유가 부럽기만 했다.
비행기가 덜컹거리고 기압 때문에 귀가 멍해졌다. 기창으로 내다보니 구름 층을 뚫고 고도를 낮추는 중이었다. 차가운 안개가 잘게 부서지며 뒤로 밀려갔다. 그리고 얼마 후 황혼에 물든 만주 땅이 내려다보이기 시작했다.
머리 위 짐칸에 넣은 손가방이 생각났다. 그것에는 편지와 사진 들이 들어 있었다. 휴전선이 막혀 멀리 만주 땅을 돌아서 서울까지 온 것들, 그리고 이 쪽에서 다시 보내 줄 것들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만주 땅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州都) 연길시에 있는, 은밀히 북쪽 가족을 찾게 해 주는 조직에 편지와 사진을 보낸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아마 알았더라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쪽의 가족을 찾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허다한 노력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달 전에 기적같이 소식이 온 것이었다. 조강식이라고 이름을 밝힌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이 북한에 들어가 아버지의 가족들 소식을 갖고 나왔다고 하고는 편지와 사진을 우송했던 것이다.
우편물을 받고 아버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님이 십 년 전에 돌아가셨어. 그렇지만 난 제삿날도 모르고 살아 온 불효자야. 꺽꺽 소리 내어 울다가는 이런 넋두리도 했다. 아흔이 넘은 분들이니 돌아가신 게 당연하지. 그렇지만 내 아들 정규가 살아 있어.
그러더니 어느 날 그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나 만주에 다녀와야겠다. 그 사람한테서 또 전화가 왔어. 이북 들어가기가 다시 쉬워져서 돈을 보낼 수 있으니 하루 빨리 들어오라는 게야.”
현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북은 오백만원만 보내 주면 부자로 살 수 있댄다.”
“안 돼요. 아버진 가실 수 없어요.”
그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북쪽에 보내 줄 5백만 원에다 여비도 3백만 원쯤 들어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 비록 중소기업을 경영하며 불황 속에 쩔쩔매고는 있지만 그에게 그리 큰 돈은 아니었다. 문제는 아버지의 건강이었다. 삼 년 전 심장 관상동맥 확장수술을 한 뒤로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 일도 피하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뚜릿뚜릿한 눈으로 그를 다시 한 번 쳐다보고는 힘없는 걸음으로 당신 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버지는 이제 아무런 능력이 없었다. 몸은 늙고 병들었고 경제적으로도 그가 매달 드리는 50만원의 용돈밖에 수입이 없는 처지였다. 부자간에 각별한 정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다른 일 같으면 아버지 편을 들어 그에게 매달리곤 하던 어머니도 이번에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 뒤 아버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말이 없어졌고 멀쩡한 대낮에 아파트 노인정 계단에서 낙상을 해서 발목을 다치셨다.
--자넨 무정한 사람이군. 그 어른을 보낼 수 없으면 자네가 가면 될 거 아닌가.
이웃 노인들이 한 마디씩 했다.
어머니와 누이 현숙이도 말했다.
--애비야, 네가 다녀오너라. 저러시다간 심장병 또 도지신다.
--내 생각에도 오빠가 다녀오시는 게 좋겠어요. 회사 일에 바쁜 건 알지만 이북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오빠고 조카들이에요. 남들은 많은 돈을 써서 일가족을 탈출시키잖아요.
그는 누이를 향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비밀조직이라 허탕칠 가능성이 많아.
--오빠, 어린 시절 생각 때문에 거부감을 갖고 계신 거지요. 이제 그걸 버리세요. 아버지가 살아야 얼마나 사신다고.
누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항변하듯이 말했다.
며칠 뒤, 현규는 라이온스 클럽의 동료 회원인 박사장을 만났다. 그는 가발공장을 차릴 계획으로 세 차례나 연변에 다녀온 사람이었다. 그는 현규의 말을 듣고 쩍쩍 입맛을 다셨다.
--연변으로 북쪽의 가족을 찾으러 가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구 교활한 브로커들에게 돈만 날리는 경우가 허다하다구 들었소. 젠장, 정부 지원기관인 남가본(남북이산가족찾기본부)이 제 구실을 못하니까 의뢰자들은 브로커들을 찾는 거지요. 칠월 초에 내가 다시 들어가는데 생각 있으면 같이 갑시다.
아버지는 거의 침식을 끊었고 어머니와 누이의 성화도 커졌다. 그래서 그는 확신도 열망도 없이 떠밀리듯이 중국행에 오른 것이었다.
공항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현규를 붙잡고 아버지는 눈물을 글썽거리셨다.
--돈을 보내 주면 큰 도움이 되겠지. 네 형 정규가 괜찮은 자리에 앉아 있다지만 모두들 굶주린다는데 사정이 오죽하겠냐. 그리구 북에서 온 편지에 네 숙부들과 고모 이야기가 없다.
쿵 하고 활주로에 바퀴가 닿는 듯싶더니 여객기는 역추진 엔진소리를 내며 빠르게 미끄러져 달렸다. 기창 밖을 내다보니 수묵화처럼 침침한 잡초지대가 어둠과 뒤섞여 쏜살같이 뒤로 달아나고 있었다.
“김사장, 그냥 관광 왔다면 내가 재미있게 해 줄 텐데. 아무튼 일이 잘 되기를 빌겠소.”
비행기가 덜컹거리는 소리와 쐐애 하는 역추진 엔진 소리 때문에 박사장의 말소리는 웅웅거리며 들렸다.
여객기가 활주로 끝에 멈췄을 때 사위는 사뭇 어두워져 있었다. 여객기는 다시 천천히 움직여 청사 근처까지 가서 멎은 뒤 옆구리 문으로 탑승자들을 쏟아 냈다. 마치 먼 여로를 헤엄쳐 와 꾸역꾸역 산란하는 거대한 물고기처럼.
현규는 사람들을 따라 트랩을 걸어 내렸다. 땅을 밟는 순간 풀냄새를 실은 초여름 바람이 가슴에 안겨 왔다. 지척에서 제트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승객들은 그 소리에 질린 데다가 공항이 매우 어두워서인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한국의 시골 역사(驛舍)처럼 허름한 청사의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불빛, 그들의 등뒤로 어둠 속에 보석처럼 점점이 박혀 있는 활주로의 유도등, 그리고 하늘에 총총히 돋아난 별빛뿐이었다.
“곧장 나가는 거예요. 우리가 앞장섭시다.”
박사장이 악을 썼다.
갑자기 비행기 엔진 소리가 작아지더니 꼬리를 감추듯이 스르르 꺼졌다. 그리고 마치 태고 때와 같은 적막이 지상에 가득 들어찼다.
“젠장, 이놈의 나라는 불도 못 켜고 사나. 코를 베 가도 모르겠군.”
어느 여행객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짐을 찾아 공항청사를 나섰다. 청사 앞 광장은 시꺼멓게 콜타르를 칠한 통나무 전주(電柱)가 하나 서 있고 꼭대기에 백열전등이 매달려 눈부시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아래서 사람들이 온통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름을 적은 조그만 피케트를 머리 위에 치켜든 안내원, 단체 관광객을 맞는 현지 여행사 가이드, 손님을 끌려는 택시 운전사, 내국인 손님을 붙잡으려는 여관 주인, 일행을 찾느라 이름을 불러 대는 단체 관광객들이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 동업자가 저기 나왔군.”
박사장이 말했다.
현규는 자신의 이름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제 오후 직접 통화를 한 조강식이라는 알선자는 비밀을 지키라는 부탁과 함께 호텔 도착 즉시 방 번호를 알려 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박사장의 동업자가 다가왔고 현규는 악수를 한 뒤 박사장과 함께 그를 따라 가서 택시를 탔다. 동업자는 이름이 송광호였다.
호텔에 도착해 방을 잡자마자 공중 전화를 걸었다. 저 쪽에서 침착하게 말했다.
“잘 오셨습네다. 방 번호를 말씀해 주오다.”
방을 알려 주고 십 분도 안 지났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여니 키가 작고 깡마른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내레 조강식입네다.”
“들어오시지요.”
현규는 알선자를 맞아들이며 찬찬히 뜯어보았다. 서울 사람과 다름없이 영악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기야 이런 일을 하려면 영악해야지. 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강식은 박사장과 송광호가 누구인가 확인하고 나서 소파에 앉았다.
“공항에 마중을 못나가 미안합네다. 연길에는 남북 조선의 첩보원들이 많아개지구 조심해야 합네다. 기래서 우리는 점조직으로 돼 있습네나.”
그러고는 자기 여권을 꺼내 중간쯤을 펴서 내밀었다.
“내레 이틀 뒤에 다시 북조선에 갑네다. 일단 청진까지 가개지구 함경남도 당(黨) 선전부장을 하는 사촌 형님을 만나갔지만 기회가 생기면 북청까지 가서리 김정규 선생을 찾갔습네다.”
여권에는 ‘입국사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교부 장춘 총영사관 1997년 7월1일부터 9월 30일까지’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슬쩍 앞페이지를 보니 작년과 금년에 네 차례나 북한을 다녀온 입출국 기록이 있었다. 그는 조강식에게 묻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을 몇 번이나 성사시켰나요?”
조강식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네 번입네다.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통일수퍼 하시는 홍일구 사장님이레 노친네 소식 알려 드렸구, 속초 항에서 이름난 선주 강영설 사장님이레 누이한테 돈을 보냈습네다. 영등포에 사는 유민형 선생이레 동생 가족한테 페니실린 약하고 돈을 보냈고, 서울 경동시장서 약제상 하는 마동수 선생도 돈을 보냈습네다.”
조금도 더듬지 않고 말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어떤 경위로 북청의 아버지 가족과 접촉하게 됐나요?”
“지난 사월에 내레 경동시장 마동수 선생 일 맡아개지고 들어가지 않았습네까. 그 때 김사장 아버님 편지하고 사진도 개지구 갔수다. 명천까지 가서리 협조자 한 사람을 북청까지 보냈수다.”
“내 아버님은 언제 월남하셨지요?”
“흥남 철수 때 아닙네까?”
“편지에 쓴 것 말고 북청 식구들에 대해 더 아시는 게 있습니까?”
“내레 노친네들이 상새나셨다는 거하고 김정규 선생이레 오마이 모시고 산다는 거는 압네다. 김정규 선생이레 인민군대에 복무하구서리 김책공업대학을 나와개지구 기사로 일하다가 삼 년 전에 공장장이 됐다 합네다.”
“숙부와 고모는요?”
“못들었습네다. 이번에 소식을 알아개지구 나오갔수다.”
현규는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언행이 진솔해 보이는 데다 의심나는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박사장과 송광호를 슬쩍 바라보았는데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이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조선생을 믿습니다.” 하고 말하고 나서 그는 조강식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나는 오천 달라를 북청에 보낼 생각입니다. 조선생에게 사례와 경비를 얼마나 드려야 합니까?”
조강식은 금빛이 나는 라이터로 양담배 말보르를 피워 물었다.
“저로서는 목숨을 담보해야 하고 가는 데마다 돈을 찔러 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말씀해 주세요.”
“천이백 달라를 얹어 주시면 닷새 안에 돌아오갔습네다. 그리고 내일은 내레 사장님을 저의 집으로 초빙해서리 점심을 대접하갔습네다. 기래야 사장님이레 안심하실 거이 아닙네까.”
눈치 빠르게 알아서 대답하니 더 따질 게 없었다. 너무 자신만만해 보이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현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만 생각을 해보고 돈은 내일 드리지요.”
“아무래도 좋습네다.”
듣고만 있던 박사장이 조강식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북한이 얼마나 굶주리고 있나요?”
“비참합네다. 내레 굶어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거를 봤습네다.”
“젠장, 군대 유지하는 일에 돈을 덜 쓰면 될 게 아닌가. 우리 김사장 가족이 있는 북청은 어때요?”
“가 보진 못했지만 뻔합네다. 배급은 벌써 끊어졌구 각자 살아남기 위해서리 이리저리 발버둥치고 있을 겁네다.”
조강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강식을 보내고 세 사람은 곧장 식당으로 가서 꼬리곰탕을 시켰다. 막 수저를 들려고 하는데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 꽤나 눈에 띄는 미모였다. 그녀는 고개를 까딱하며 “내레 장미옥이야요.” 하고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곧장 박사장 곁으로 가서 붙어 앉았다.
박사장의 팔이 나무 둥치를 휘어 감은 뱀처럼 그녀의 허리에 스스럼없이 걸쳐졌다.
“네가 보고 싶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단다.”
“저도 그랬습네다, 사장님.”
여자는 일행의 눈치를 보며 부끄럽게 말했다.
현규는 그녀가 박사장이 출장 올 때마다 같이 지내는 여자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렸다.
박사장은 그녀를 룸살롱까지 데리고 갔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룸살롱은 서울의 지명을 따서 ‘신사동’이라는 간판을 달았는데 현란한 네온사인이 켜진 입구에서부터 돈 냄새가 물씬 풍겼다.
박사장이 현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서울보다는 촌스럽지만 술값이 오분의 일밖에 안 되구 천하절색들이 접대를 하는데 팁도 싸단 말이오.”
“보나마나 서울에 가서 돈 벌어 온 사람이 차린 거겠군요.“
현규의 말에 박사장의 동업자 송광호가 대답했다.
“맞습네다. 오 년 전만 해도 꿈도 꿀 수 없었던 술집이야요. 북경이나 상해도 이런 데는 드뭅네다. 그리구 조금 있으면 아시게 되겠지만 여긴 연변예술대학 교수들이 출연해요.”
“교수가 밤무대에 나온다구요?”
앞장서 안으로 들어간 송광호는 무대에서 첼로를 독주하고 있는 악사를 가리켰다.
“저 사람도 교수예요. 돈 돈, 그저 돈이 제일이니까요. 서울에서 백두산 구경 온 사람들이 이렇게 만든 겁네다.”
현규가 둘러보니 손님의 태반은 서울에서 온 관광객들이었다. 그들은 미녀들을 하나씩 끼고 앉아 맥주를 마시거나 플로어에 나가 블루스를 추고 있었다.
자리를 잡아 맥주를 한 잔 들이켜기가 바쁘게 박사장은 장미옥을 데리고 플로어로 나가 몸을 밀착해 춤을 추기 시작했고, 송광호도 어떤 여자와 눈을 맞추고 춤추러 갔다.
11시가 다 되어 호텔로 돌아온 현규는 혼자 방으로 올라갔다. 거기까지 장미옥을 데리고 온 박사장이 로비에서 눈을 찡끗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까트윈 룸으로 잡지 않는 건데. 그는 그런 생각을 하고는 씁쓸하게 혼자 웃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는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받았다. 아버지의 전처가 북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혼자 가슴앓이를 해 온 어머니. 그가 외국 여행을 떠난 것은 여러 번이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애비야, 딴 생각 말고 아버지 소원 꼭 풀어 드려라. 아버지 바꿔 주마.”
아버지는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미안하구나, 거기까지 가게 해서.”
“일은 잘 될 거예요.”
전화를 끊고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만주에 사는 사람들은 일찍 잠에 빠지는지 거리는 늪 속처럼 깊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하늘에는 초생달이 떠 있었다.
미안하구나, 거기까지 가게 해서. 아버지에게서 그런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아버지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이제는 늙고 병들어 아들에게 의지하여 살고 있지만 젊어서는 대단한 완력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현규는 문득 아버지에게 혹독하게 종아리를 맞아 피를 흘렸던 어린 시절의 일을 기억해 내고 침대에 걸터앉아 바지를 걷어올렸다. 벌써 33년이 지난 일인데도 그 때의 상처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1950년 겨울에 미군과 국군이 결행한 흥남 철수 때 피난선을 탄 10만여 월남민 중의 하나였다. 많은 월남민들이 억척스럽게 남쪽 사회에 적응해 뿌리 내리고 부를 쌓은 것과 달리 아버지는 방황으로 세월을 보낸 사람이었다. 하기야 국군이 북진한 뒤 앞일을 내다보지 못하고 우익 치안대원이 되어 맹렬한 활동을 한 터에 단신으로 빠져나와 배를 탔으니 남겨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자책감도 컸을 것이었다.
아버지는 국군에 입대하여 휴전 때까지 싸우고 제대하여 고향 선배가 차린 회사에서 일했다. 서른이 넘어 결혼했고 아내와 아들딸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북청 사람들은 ‘북청 물장수’의 전설처럼 절약이 대단하다는데 아버지는 월급의 절반도 집에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한복집의 삯바느질을 맡아 열심히 재봉틀을 돌렸다.
아버지는 퇴근 때면 어김없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왔다.
“통일만 되면 난 단숨에 달려 갈 거야. 오마니와 아들이 있는 북청 땅으로 달려갈 거란 말야. 네까짓 것들은 필요 없어.”
현규가 열 살 때였다. 그렇게 시작된 술주정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어느 날 한 마디 했다.
“그만좀 하세요. 그 말 때문에 귀가 헐겠어요. 통일이 되어 당신이 나를 버리고 가더라도 현규는 당신 아들 아닌가요?”
아버지는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다가 고개를 든 현규를 노려보았다.
“이노무 새끼, 나를 하나도 안 닮은 놈. 네 형은 어깨에 난 점까지도 날 닮았어.”
그러고는 선반에 소중하게 싸 둔 사진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중공군의 포성을 들으며 허둥지둥 집을 떠나면서 품속에 넣어 온 가족사진이었다.
현규는 공책을 탁 덮고 일어섰다.
“아부지 맘대로 통일 안 될 거예요.”
아버지는 커다란 손으로 뺨을 때렸다. 현규는 코피를 흘리며 울었다. 아버지는 왜 아이를 때리느냐고 소리소리 치는 어머니를 벽쪽으로 밀쳤다. 그 바람에 어머니 등에 업혀 있던 현숙이가 벽에 부딪혀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아버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휑하니 다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다음날, 현규는 재봉틀 의자를 놓고 올라가 그 사진을 꺼내 찢어서 두 동강을 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재봉틀 위에 있던 넓적한 대나무 자(尺)로 사정없이 종아리를 맞았다. 어김없이 술에 취한 아버지가 마구 휘두른 대나무 자의 날카로운 날이 몇 번 현규의 종아리를 찢었다. 상처는 덧나서 몇 달 동안 약을 바르고 헝겊을 감은 채 학교에 다녀야 했다. 그리고 한동안 가위눌리는 꿈을 꾸었다.
북쪽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집착이 약해진 것은 1970년대의 일련의 남북회담이 무위로 돌아간 뒤였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아버지는 회담이 희망 없는 결렬로 끝나 버리자 허탈한 얼굴을 하고 말을 잊고 지내더니 조금씩 남쪽의 가족들에게 정을 주기 시작했다. 고향 생각은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북청 군민회에 나가는 정도로 달래는 듯했다.
그러나 사진 때문에 서먹서먹해진 부자 사이는 끝내 가까워지지 않았다. 현규는 아버지를 이기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도저히 대학에 보낼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열심히 공부를 해서 공과대학에 가고 고학을 해서 학교를 다닌 것도 아버지를 이기기 위해서였다. 고학생 신분에 ROTC에 들어가 장교가 된 것도 육군 중사로 제대한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실패하면 오히려 악착같이 덤비는 성격을 갖게 됐는데 아버지 때문에 형성된 것이었다.
현규가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할 무렵 아버지는 회사에서 은퇴했다. 몇 안 되는 고향 사람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아파트 노인정에 나가 장기나 두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게다가 심근경색증 수술을 받고 나서 눈에 띄게 심신이 쇠약해졌다. 독립해 회사를 차린 뒤 늘 바빠서 아버지 얼굴을 대하는 시간은 훨씬 줄었지만 현규는 아버지의 집념이 무딜 대로 무뎌졌다고 느끼고 있었다.
작년엔가 함께 저녁을 먹을 때 용감하게 배를 몰고 탈출한 일가족에 대한 텔레비전 뉴스가 나왔으나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북쪽의 가족을 찾는 열망을 품어 왔고 식구들 모르게 만주의 비밀조직에 사진과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현규는 샤워를 하고 나왔다. 술은 깼으나 쉽사리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담배를 한 대 피우려고 다탁(茶卓) 앞 소파에 앉았다. 건너편 소파에 놓아둔 손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라이터를 켜려다가 말고 팔을 길게 뻗어 그것을 집어 다탁 위에 놓았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 종아리를 맞던 날 반동강을 냈던 사진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퍼를 열고 그것을 꺼냈다. 어머니가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감쪽같이 이어 붙였지만 찢은 자리는 종아리의 오래된 상처처럼 실금이 나 있었다. 그는 눈을 가까이 대고 들여다보았다. 쉰 살이 조금 넘은 듯한 노부모를 가운데 모시고 스물다섯 살 청년의 아버지와 쪽진 머리를 한 아버지 또래의 여인이 옹위하듯이 서 있었다. 여인은 세 살쯤 된 아기를 안고 있었다. 사진은 퇴색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은 뚜렷했다. 최근에는 아버지 앨범 맨 앞장에 끼워져 있었던 사진, 그로서는 자신이 큰어머니라고 불러야 할 여인이나 이복형보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눈이 갔다. 남들은 많은 돈을 써서 일가족 전체를 탈출시키지 않는가. 이제 나도 불혹의 나이를 넘어섰으니 모든 것을 떠 안을 때가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특별한 감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차피 이북의 가족을 찾으러 여기까지 온 터이니 뭉클하게 감동이 일어났으면 좋으련만 정말 아무 감흥도 없었다. 그는 물 속을 들여다보듯 자신의 의식 내부를 들여다보려 애썼다. 아, 아버지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어. 나를 어떤 위기에서도 당황하지 않은 냉철한 성격으로 키운 것은 아버지였어.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사진을 다시 가방에 넣고 침대에 들었다.
점심에 조강식은 약속대로 그를 집에 초대했다. 중국에서는 중류 생활자임을 짐작하게 하는 5층 짜리 아파트였다. 수더분하게 생긴 여인이 아이들과 함께 꾸벅 인사를 하고 묵묵히 시골 장터를 생각하게 하는 국수를 끓여 내놓았다. 구수하고 맛이 좋아서 그는 두 그릇을 먹었다.
차를 마시며 그는 조강식에게 6,200달러를 내놓았다.
“부탁합니다.”
“내레 신명을 바쳐 완수하고 올 거이니까니 걱정 놓으오다. 닷새 동안에 백두산이나 여유(旅遊)하고 돌아오시오다.”
“알았습니다.”
현규는 조강식의 손을 굳게 잡았다.
오후에 박사장을 다시 만났으나 현규는 할 일이 없었다. 갑자기 만주여행에 올랐고 이제 발 앞에 백지와도 같은 닷새 동안의 공백이 던져진 것이었다.
“김사장, 정말 백두산에나 다녀 오슈. 정상에 서서 천지(天池)를 내려다보면 단군님의 정기를 받는 듯하고 힘이 쭉 솟는단 말이오.”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송광호가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지프차와 안내원을 예약해 주었다.
“지프차 1박 2일 대절에 인민폐 2천원, 안내원 3백원이고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二道白河)에 있는 장백호텔을 예약해 준답네다.”
중국 돈 백원은 한국 돈 만원과 같으나 가치는 엄청나게 컸다.
다음날 아침, 현규는 박사장이 대절한 지프차에 올랐다. 이도백하(二道白河)의 자작나무 무성한 길을 달리고 수백 리 원시림의 수해를 헤쳐 찾아간 백두산 천지는 오랫동안 상상해 온 것보다 더 푸르고 장엄했다. 두 사람은 천지 아래에 있는 노천 온천장에서 이틀을 머물고 연길로 돌아왔다. 돈은 3백 달러나 썼지만 천지를 보았다는 기쁨에 심신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박사장은 업무가 끝난지라 귀국했고, 현규는 나머지 이틀을 국제 전화와 팩시밀리로 회사 일을 보는 것으로 보냈다. 그는 대기업에 몇 가지 전자 소재를 납품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불량 통고를 해 온 데다가 전반적인 불황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그의 악착같은 집착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었다.
조강식이 떠나고 닷새째 되는 날, 그는 호텔 방에 앉아 초조하게 전화통을 바라보았다. 해질 무렵까지 연락이 없어 조강식의 집에 전화를 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송광호를 만났다. 송광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망할 자식, 기름을 바른 거가티 매끈해서 이상하더라니. 날래(빨리) 그 사람 집에 가 보자우요.”
함께 달려갔으나 조강식의 집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문득 속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조강식이 너무 매끄럽고 자신만만해 하던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속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조강식이 북한에서 일이 잘못되어 억류당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복잡하게 얽혔다.
“공안국에 가 보자우요. 무스그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니.”
송광호가 말했다.
공안국 외사처의 동포 수사관은 그의 설명을 듣고 최근에 북한으로 들어간 출국자 명단을 내놓았다.
“그 사람이레 북조선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네다. 왜 남가본에 의뢰하지 않았습네까?”
“그건 합법적인 단체라 일을 제대로 못하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와서 동포에게 사기를 당할 줄 몰랐어요.”
그가 탄식하자 수사관은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미안한 말이지만 선생을 동정할 동포레 없습네다. 남한에 친척 만나러, 노동하러 갔다가 야속한 마음 안고 돌아온 사람이레 수만 명, 서울 사람들이 연변에 와서 초청한다, 합작한다 하는 말에 속은 사람이레 수천 명이나 된단 말입네다.”
현규는 공안국을 나오면서 기가 막혔다. 사실 5백만원은 그가 타격을 입을 정도로 큰 돈은 아니었다. 그 정도는 그의 집 한 달 생활비도 안되는 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인 큰애 미술대학 입학을 위해 개인지도비로 지출하는 돈이 월 3백만원 정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기를 당한 것이 억울했다. 그것도 이 먼 곳까지 와서 동포에게 속은 것이 분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현규는 호텔로 돌아왔다. 송광호가 방까지 따라 왔다. 그는 서울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내가 받았다.
“일은 잘 됐어요?”
“제기랄, 사기당했어. 알선책이란 놈이 돈을 받고는 북한으로 가지 않구 사라져 버렸단 졌단 말야.”
“회사 사정이 안 좋은가 봐요. 당신이 빨리 돌아와야 해요.”
“알았어. 빨리 아버님 바꿔.”
아내가 재빨리 말씀드렸는지 아버지는 낙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속은 걸 어떡허냐. 모두 내가 욕심부린 탓이다. 어서 돌아와서 회사 일이나 수습하거라.”
순간, 그는 자신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벌떡 일어나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결코 실패를 용납할 수 없다는 오기였다.
“전 이대로는 못돌아갑니다.”
그는 큰 소리로 외치고 나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전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늘은 간신히 넘겼지만 닷새 뒤에 막아야 할 게 8천만원이에요. 그 때까지 사장님이 오셨으면 좋겠는데요.”
“제기랄, 난 사기당했어. 이전무는 못참는 내 성질 알지. 열 번을 실패해도 또 보낼 거야. 내 집을 저당 잡히든지 해.”
송광호가 돌아가려는지 모자를 들고 일어섰다.
“송선생, 날 도와주쇼.”
송광호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섰더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북조선에 밀무역을 하는 친구가 하나 있어요. 북조선에서 생선을 사 갖구 나오구 들어갈 때는 강냉이를 싣구 들어갑네다. 마침 어제부터 집에 와 있수다.”
현규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내일 만나게 해 주시오.”
“알았습니다
이 날 저녁 그는 전화기가 우는 소리에 잠을 깼다. 실패한 일 때문인지 가위눌려 답답한 순간에 눈을 떴고 방 안은 캄캄했다. 그는 불을 켜고 전화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내의 음성이 귓속으로 뛰어들었다.
“여보, 아버님이 쓰러지셨어요. 저녁도 안 드시고 누우셨는데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고 하셨어요. 병원으로 모셨더니 심근경색증이 재발했대요. 윤박사님 말씀은 삼 년 전에 수술한 곳 말고 다른 관상동맥 두 개가 거의 막혔대요. 또 수술을 해야지요. 하지만 가능성이 삼할도 안 된대요.”
“수술은 언제야?”
“내일 오전이에요. 조금 전 면회시간에 아버님이 잠깐 의식을 차리고 당신에게 전하라며 유언처럼 말씀하셨어요. 그냥 돌아오라구요.”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난 이대로 갈 수 없어.”
다음날 오전, 아버지가 서울에서 수술을 시작한 시간에 현규는 제2의 알선책을 만나고 있었다. 송광호가 소개한 강남철이라는 이름을 가진 쉰 살 된 무뚝뚝한 남자였다.
그는 신용카드로 찾은 6천 달러를 그에게 주었다.
“부탁합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풀게 해 주십시오.”
강남철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레 가 보기는 하갔지만 아무것도 장담하지 못합네다. 성공해도 사례는 안 받갔수다. 아우가 형을 찾는다는데 어캐 돈을 받습메까.”
다시 나흘을 현규는 호텔 방에 앉아 남쪽과 북쪽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보냈다. 아버지는 수술을 끝냈으나 의식을 차리지 못한 상태로 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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