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원규(65회) 수필 [운현궁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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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캄’지 기고
풍운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운현궁
글. 이원규 (소설가)
운현궁(雲峴宮)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집이며 그의 아들 고종이 태어나 열두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이 곳에 가면 풍운에 가득 찼던 한국 근대사와 파란만장했던 한 인간의 삶을 실감나게 더듬을 수 있다. 한국의 고유 건축미도 맛볼 수 있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5분쯤 걸으면 천도교 본부인 수운회관이 나온다. 건너편을 바라보면 덕성여대 정문과 인접해, 고풍스런 담장에 둘러싸여 위풍당당하게 앉은 기와집들이 보인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종로구 운니동 114-10 번지이다.
우선 격동의 근대사와 흥선대원군의 생애부터 더듬어 보자.
흥선은 왕실 종친으로 빼어난 용모에 성격은 호협과감했다고 전한다. 당시 왕실 종친들은 극성스런 안동 김씨의 세도 아래서 숨죽이고 살았다. 흥선은 김문의 관심을 벗어나기 위해 ‘상갓집 개’라는 욕까지 들어가며 파락호 행세를 했다. 깨어진 갓, 찢어져 꿰멘 도포가 그의 차림이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는 흥선의 차남 명복(命福)에게 왕위를 잇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은 섭정으로서 개혁의 바람을 일으켜 울분의 세월을 겪으며 가슴에 품었던 자신의 이상을 마음껏 펼쳤다. 안동 김씨의 세도를 뿌리채 뽑아버리고, 당파를 초월해 인재를 등용하며 부패관리를 파직시켰다.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를 개혁해 국고를 충실하게 만들었다. 그는 배타적인 쇄국정치를 고집했는데 흔히들 그로 인해 국제관계가 약해지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요즘은 그의 치적에 대한 해석이 새롭게 내려지고 있다.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자 그는 은퇴해 10년만에 운현궁으로 돌아왔다. 임오군란으로 다시 권좌에 올랐으나 청나라 군대에 끌려가 텐진(天津)에서 4년간이나 유폐당하기도했다. 다시 몇 차례 권력을 잡았으나 번번이 실각의 고배를 마셨다. 그는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질린 터라 권력과는 거리가 먼 민씨 가문의 딸을 간택했으나 그렇게 맞아들인 명성왕후와 알력이 계속되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그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집요했다. 청나라의 위안스카야(袁世凱)와 결탁해 고종을 폐위하고 장남을 옹립하려고 기도하기까지 했다.
1898년 흥선대원군은 77세로 숨을 거두면서 고종을 그리워했다.
“주상(고종)이 보고 싶다. 주상만 보았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
그러나 고종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럼 이제부터 운현궁에 들어가 보자.
정문에 들어서면 시원히 펼쳐진 넓은 마당에 마사토가 깔려 있어 동해안의 명사십리를 걸을 때처럼 발밑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그렇다고 콧노래를 부를 정도로 발이 가볍지는 않다. 네 채의 건물이 왕가의 품위와 위엄을 갖추고 앉아 있어서이다. 흥선군이 나와 서서 너는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호령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장 가까운 건물은 오른쪽에 길게 늘어선 수직사. 그 옛날 궁을 지키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대강 훑어보고 마당 왼쪽 깊은 곳의 역사기념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푸른 도포를 입은 흥선군의 영정과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었다는 그의 난(蘭) 그림, 그의 손때가 밴 유품들이 있다. 구한말의 역사를 한눈에 알게 하는 도표와, 운현궁과 대원군의 생애를 설명하는 멀티비전도 있다.
기념관을 나오자 웅장한 솟을대문과 아름다운 자태로 선 추자나무 한 그루가 멋들어지게 어우러져서 눈길을 끈다. 이른봄 새순이 돋아나는 나뭇가지가 솟을대문과 어울려 좋고 담장 밑에서 미소 짓듯 벙싯 봉오리를 터뜨리는 진달래도 제격이다.
흥선을 만나러 온 사대부처럼 팔뒷짐을 지고 양반걸음으로 솟을대문을 들어간다. 눈앞에 성큼 다가오는 건물이 노안당(老安堂). 주인의 숨결이 가장 많이 배어 있는 사랑채이다. 흥선은 여기서 개혁정책을 구상했고 청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머물며 은둔했다. 악몽을 꾸고 밀실로 피해 자객의 칼을 면한 적이 있고 아궁이에서 터진 폭탄에도 목숨을 건진 적도 있다. 아들 고종을 기다리며 일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대리석 섬돌을 디디고 올라가 대청에 걸터앉아 본다. 부패 관리를 파직해 하옥하라고 호통치던 흥선군의 음성이 등뒤에서 들리는 듯하다.
섬돌을 내려와 몇 걸음 물러서서 지붕을 본다. 날아갈 듯이 하늘을 향해 뻗은 추녀의 선이 매우 아름답다. 날렵하면서도 웅장함을 함께 갖춘 이 건물의 처마와 추녀는 한국 고유 건축미의 극치라 이를 만하다. 그리고 오른쪽에 돌출한 부분이 눈에 띄는데 영화루라고 부르는 누마루이다. 흥선은 여기 앉아 난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왕족이 아니었다면 화가로서 후세에 이름을 떨쳤을 것이다. 그의 그림과 글씨는 보물급에 속해 지금은 한 점에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현판 글씨를 가만히 올려다보니 추사 김정희의 낙관이 있다. 흥선대원군이 스승이자 당대의 명필인 추사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것이다.
옆마당을 돌아나가면 노락당(老樂堂)이 있다. 운현궁의 본채로서 웅장하고 화려한 위용은 궁궐에도 뒤지지 않는다. 흥선대원군은 여기서 자신의 회갑이나 가족들의 잔치를 벌였다. 뒷날 숙명적인 정적이 되고 만 며느리 명성왕후를 맞아 고종의 가례를 올린 장소도 이 곳이었다.
이 건물에서 주목할 것은 처마 공포(拱包)의 조각과 대청의 불발기 창호이다. 공포란 건물의 지붕을 떠받치는 부분에 나무를 짜 올려 지붕 무게를 받게 한 구조를 말한다. 나선형의 태극 문양을 기초로 하여 조각했는데, 정책에 과감하면서도 섬세하게 글씨와 그림에 능했던 흥선대원군의 풍모가 연상되는 것은 필자의 소설적 상상력일까.
불발기란 방과 대청 사이에 넣은 일종의 분합문을 말한다. 노락당 불발기의 창호는 팔각형으로 테를 두르고 빗살형으로 창살을 만들었는데 우아한 멋이 넘쳐난다. 필자는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참지 못해 신발을 벗고 대청에 올라가 창살을 어루만졌다. 관리인이 어서 내려오라고 손짓하다가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운현궁의 다른 창호들도 귀중하기 짝이 없다고, 일제 치하에 서울의 4대 궁궐은 창호가 모두 뜯겨졌지만 운현궁은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고.
노락당 옆에는 운현궁의 안채인 이로당(二老堂)이 자리잡고 있다. 남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입구(口)자형으로 되어 있는데 사방 모두 띠살문이 굳게 닫혀 들어가기가 결코 쉽지 않다. 중앙에는 중정(中庭)이 있고 우물이 보인다. 이 건물은 사각형의 특이한 구조가 흥미롭지만 규모가 작은 방들이 고만고만하게 만들어져 있어 여인네들의 생활을 상상하게 한다. 금남(禁男)의 집에 사는 것도 영화(榮華)였을까. 남녀란 같이 부대끼며 살아야하는 게 아닐까. 어느 틈에 인습이 되고 만 유교 전통에 격세지감을 느끼며 다시 마당으로 나온다. 지금 운현궁은 옛날 면적의 1/5에 불과하다는 안내서의 설명 때문이다.
운현궁은 흥선의 사가로서 원래 작은 규모였으나 고종이 등극한 해에 증축되었다. 오늘 남아 있는 건물들은 그 때 지어진 것들이다. 고종이 태어나 왕이 되기까지 살았던 건물은 헐리고 없다. 뒤쪽에 선 중앙문화센터 자리가 그곳이다. 대부분 덕성여대에 들어가 있다. 네 채의 건물도 왕조가 패망한 뒤 제대로 돌보지 않아 퇴락한 것을 1993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1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돌아온 터라 기념관 옆의 기념품 판매소 겸 휴게소로 들어가 작설차를 한 잔 마시며 창으로 운현궁을 바라본다.
수모와 좌절의 세월을 보내고 국가의 운명을 손에 쥐었던 풍운아 흥선대원군. 그가 지키려던 사직은 끝내 패망했고, 지금 그가 없는 궁에는 다시 봄이 와 새 움이 돋아나고 새들이 지저귄다. 그의 숨결이 서린 건물들은 침묵으로 말한다. 역사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후세 사람들의 해석을 기다린다고. 올해는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뜬지 백 년. 국가가 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 새삼 그의 놀라운 개혁을 생각하게 된다.
이원규와 푸른 날개 Since 2003에서 이원규의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novelistlee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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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제(69회)님의 댓글
운현궁 속속들이 잘 둘러 보고 갑니다. 아침엔 고산의 저택을 보고 궁을 대하니 해남의 저택은 초라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