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원규(65회) 수필 [알마아타의 추억]
본문
알마아타의 추억
이 원 규
10년 전 여름 한 철을 나는 카자흐스탄에서 보냈다. 러시아 동포들의 강제 이주사를 소설로 쓰려고 극동 연해주에서부터 시베리아를 횡단해 거기까지 간 것이었다.
알마아타의 남서쪽에는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천산산맥이 만년설을 이고 우뚝 솟아 있다. 카자흐말로 ‘알라또’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가 ‘신의 산’이니 중국말 ‘텐산(天山)’과 다를 바가 없다. 천산산맥은 하나의 축복이다. 낮에는 불타는 더위 속에 만년설을 바라보며 더위를 잊을 수 있고, 밤이면 편서풍이 만년설을 스치고 급강하해와 낮동안 쌓였던 열기를 씻어가기 때문이다. 일교차가 심하다 보니 과일이 풍성하고 그 맛이 일품이다. 알마아타라는 말은 카자흐어로 ‘사과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천성적으로 과일을 좋아하는 나는 실컷 사과와 배와 수박을 먹었다.
나는 카자흐 취재 기간 중 알마아타의 티미리야라세프가(街)에 있는 동포 지도자 이 선생 댁에 머물면서 소설 구상을 하고 때로는 삼사 일씩 우수또베, 크즐오르다, 까라간다 등 우리 동포들이 사는 지방의 오지를 답사했다.
어느 날, 이 선생의 손녀 스베틀라나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알마아타 관광에 나섰다. 이선생이, 노트북 컴퓨터에 매달려 밤을 새우는 내게 하루 머리를 식히라고 권한 때문이었다. 첫 목적지는 메디오산. 천산산맥의 한 봉우리로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게 길이 만들어져 있는 알마아타 최고의 관광지였다.
어머니가 백계 러시아인인 스베틀라나는 스무 살로 스위스 취리히대학에 유학하고 있었는데 방학이라 집에 온 것이었다. 혼혈이어선지 키가 키고 빼어난 미모를 갖고 있었지만 러시아어와 영어, 불어는 잘해도 한국어는 겨우 “안녕하세요.” 정도만 할 줄 알았다. 그래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스베틀라나는 운전대를 잡으면서 발랄한 표정으로 애교를 떨었다.
“젊은 작가라면 더 좋았겠지만 선생님도 좋아요. 저를 스베타(스베틀라나의 애칭)라고 불러도 좋아요.”
그녀는 볼룸을 크게 높여 미국 팝송을 틀어 놓고 따라 부르며 운전했다. 한참을 그러더니 갑자기 침울해졌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나라에 가고 싶지만 한국말을 몰라요. 쮜리히에서 처음 한국에서 유학 온 남학생을 만났어요. 그가 말하더군요. ‘너는 실종된 유민이다’라고요.”
나는 위로하듯이 말했다.
“스베타, 한국에 온다면 우리집에 묵으며 말을 배울 수 있을 거야.”
나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여인상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스베틀라나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우리 민요 <아리랑>을 함께 부르고 <고향의 봄>을 가르쳐 주었다. 스베틀라나는 언제 우울했냐는 듯 호호 웃으며 노래를 불렀다.
차는 키큰 백양나무들이 관병식하듯이 늘어선 거리를 달려 메디오산 입구를 지났다. 그러고는 굽이굽이 에워도는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래쪽은 아열대수목들이 무성했지만 절반쯤 오르자 소나무와 잣나무 등 온대와 한대의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은 산의 정상까지 삼분의 이쯤 올라간 곳이었다. 우리는 차를 세우고 국립 빙상 경기장 옆으로 난 숲길을 걸어 올라갔다. 빙상 경기장은 해발 고도가 높은 곳에 있어서 구소련시대부터 강화훈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기장 옆을 돌아 올라가니 이름 모를 잡초들이 가득한 풀밭에서 풀꽃이 바람에 가느다란 목을 흔들었다. 얼마 후 눈앞에 작은 분지가 펼쳐지고 카자흐 족의 전통가옥인 유르따 몇 채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산에서 내려와 황금인간 미라가 전시된 카자흐 고고민속박물관, 웅장함과 예술미가 곁들여진 러시아 정교회 건물을 둘러보고 고리키 공원에도 갔다. 저녁에 나는 외국인 전용 백화점에 들러, 서울의 ‘영안 제모사’가 만든 푸른색 모자를 발견하고 스베틀라나에게 선물로 사주었다.
“할아버지 나라의 모자, 저는 여름마다 이걸 쓸 거예요.”
스베틀라나는 멋지게 모자를 쓰고 활짝 웃었다.
그 때 취재한 것을 장편소설로 쓴 나는 지금도 가끔 아름다운 도시 알마아타와 스베틀라나의 모습을 떠올린다.
----------------------------------------------------------------------
이원규와 푸른 날개 Since 2003에 가면 이원규의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novelistleelove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