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원규(65회)의 인천설화(1)--계양산 이야기
본문
계양산 이야기
계양산(桂陽山)은 해발 표고가 395m로 인천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그리고 부평 사람들의 정신적 귀의처이다. 부평 문화권 사람들은 타국이나 타향에 머물 때도 고향이 그리워지면 이 산을 떠올린다.
계양산은 수주악(樹州岳), 안남산(安南山), 아남산(阿南山), 노적봉(露積峰), 환여금(環如金), 용장자산(鏞獐子山) 등의 별칭을 갖고 있었다.
이 산은 멀리서 떠돌아왔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바다에서 떠올랐다는 전설도 있다. 옛날에 부평평야는 바닷물과 강물이 혼합되어 드나드는 간석지였다. 계양산의 한 줄기는 북으로 뻗어가 거의 한강에 이르는데, 한강은 그 주위를 둥글게 휘어감아 흐르면서 서해로 흐르니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전설이 생긴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강화 마니산(摩尼山)의 반 조각이 갈라져서 떠돌아왔다는 전설도 있다. 그래서 마니산을 형 산(兄山), 계양산을 아우 산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계양산의 이름은 계수나무와 회양목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계수나무는 열대수목이니 설득력이 약하다. 회양목은 계양산에 매우 많았다.
고려 시대에 부평 일대를 관장하는 행정관청의 명칭을 계양도호부로 붙이고 그것이 일제 때 부천군 계양면으로까지 이어오면서 대표성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부평에서 태어나 50년 이상을 산 원주민들에게는 유년시절 기억에 안남산 명칭이 선연하게 남아 있다. 사람들은 “안남산 불여우 같은 녀석”이라든지, “포수들이 안남산에서 노루를 세 마리나 잡았다”라든지, “안남산으로 도롱뇽 알 찾아 먹으러 가세”하는 식으로 이름을 사용했다.
계양산에는 세 개의 큰 봉우리가 있는데 표고 395m에 달하는 주봉을 군자봉 또는 명장군봉이라 부르고, 그 봉우리와 나란히 선 것을 옥녀봉이라 부른다. 두 봉오리와 조금 떨어져 있는 봉우리를 꽃뫼봉[花山峰]이라 부른다. 그런 봉우리들 이름 때문인지 옛 사람들은 이곳을 비범하고 용감한 장군이 아름다운 미녀(옥녀)와 더불어 꽃밭에서 노니는 명승지라고 여겨 왔다.
계양산은 삼국시대에 중국으로 통하는 큰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삼국시대에 이미 민가 5백여 호가 살았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계양산 북쪽 산록이 삼남지방과 왕도 개성을 잇는 중요한 통로였다.
조선왕조의 건국과 한양 천도 이후에는 계양산의 또 다른 산록을 거쳐 곧장 부평으로 넘어오는 큰 고갯길인 경명현(景明峴)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 고갯길이 물론 이 때 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삼국시대부터 존속했던 것이지만 관아가 있는 부평을 거쳐 서울로 가기에는 최단거리 교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고개에는 도둑떼가 끊이지 않았다.
계양산은 옛날에 도둑떼가 활동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인천과 부평 일대에서 가장 높고 깊은 산이며, 아름드리 수목이 우거져 은신하기가 좋고, 산의 동서남북 아래에는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부자들한테서 빼앗을 것이 많았다. 게다가 산의 허리에 걸쳐진 경명현은 서울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 고개는 삼국시대 이래로 개성과 인천, 안산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길이가 8km에 달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誌) 「부평조(富平條)」에는 ‘경명원서십리석곶로(景明院西十里石串路)’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한국 소설의 최고봉이라고 부르는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에도 나온다.
경명현은 ‘징매고개’, 또는 ‘징맹이 고개’라고도 불렀는데 그 명칭은 고려 때 이 곳에 매사냥을 하기 위한 국영 매방[鷹房]이 있었기 때문에 ‘매를 징발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붙여졌다. ‘천명고개’라는 이름도 있었는데 그것은 도둑이 많아 천 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계양산에는 이 경명현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도둑이 끓었다.
옛날에 충청과 호남에서 범선을 타고 와서 서울로 가는 사람들이나 짐은 이 고개를 지나야 했다. 원창동 환자곶 해안에 있는 정부 세곡창고에서 세곡을 서울로 싣고 가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도둑 떼가 자리잡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계양산에는 사찰이 열두 개가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산에 올라가 보면 여러 곳에서 그 자취들을 찾을 수 있다. 남록인 부평 쪽에 두 곳, 동쪽인 계양 방향에 한 곳, 북쪽인 서곶 방향에 세 개가 뚜렷이 남아 있다. 그것들 중 지금까지 이름이 전하는 사찰들은 서록의 만일사(萬日寺), 북록의 명월사(明月寺), 동록의 봉일사(奉日寺)이다.
계양산이 강서지역의 가장 저명한 지형지물이라는 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비행기 조종사들은 김포공항이나 인천공항에 접근하면서 우뚝 솟은 이 산을 보며 방위를 찾는다고 한다. 그리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서곶의 해안은 남파간첩의 상륙루트로 자주 이용되었는데, 그들의 회고담에 의하면 해안 상륙 즉시 나침반으로 계양산의 방위를 재고 그것으로 서울이나 인천으로 가는 침투로를 잡았다고 했다.
계양산에는 3~4부 능선에 회양목이 지천으로 많았다. 그것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마구잡이 채취가 이루어졌다. 1960년대만 해도 어디서 왔는지 모를 인부들이 수십 명씩 트럭에서 내려 산록으로 올라가 마구 캐서 가마니에 담아 트럭에 가득 쌓아 올리고 떠나는 것을 무수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천으로 많던 회양목도 거의 멸종되어 갔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남아 있던 회양목 군락은 그 뒤 주택 건축경기가 일어나면서 마구 캐서 멸종되어 버렸다.
도롱뇽도 그러했다. 이른 봄이면 수십 명씩 몰려가 맑은 시냇물에서 그것을 잡아다가 몸보신을 했다. 그러나 외지 사람들이 찾아와 마구 채취하여 지금은 거의 멸종 단계에 있다.
이원규와 푸른 날개 Since 2003에 가면 이원규의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novelistleelove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