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원규(65회)의 인천설화(7)--계양산 불여우
본문
나그네를 희롱한 계양산 불여우
‘안남산 불여우’라는, 계양산 근방 사람들에게 통하는 관용구가 있었다. 불여우란 불빛처럼 털 색깔이 붉은 여우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 산에 서식하는 여우들이 거의 그러했다. 안남산의 불여우들은 사람들을 해치는 일은 거의 없었으나 약을 대로 약아 빠져 사냥꾼에게 잡히지 않았다.
옛날에 전라도에서 배를 타고 올라온 선비가 서곶 해안에 내린 뒤 부평읍을 거쳐 한양으로 가려고 계양산 경명현을 넘고 있었다. 도둑이 많은 고개라 일행 50명이 같이 고개를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는 배탈이 나서 산속에서 일을 보았다. 커다란 떡갈나무 잎으로 밑을 닦고 고의춤을 올려 매며 바라보니 일행은 가버리고 없었다.
“경기 지방은 인심들도 나쁘군. 나 혼자만 남기고 먼저 가 버리다니. 어서 가야지. 도둑이 나올지도 몰라.”
그는 발에 불이 나도록 고갯길을 달려 올라갔다. 그러나 경사가 급해 이내 숨이 턱턱 막혔다.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가는데 갑자기 캐갱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몸집 작은 여우들이었다.
그놈들은 그가 일행에서 떨어졌으며 몹시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대여섯 마리가 깡충거리며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재주를 넘고 까불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우를 몇 번 보았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본 적이 없었고, 그리고 한꺼번에 많은 수를 본 적도 없었다.
“비켜라, 이놈들아!”
그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한 마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라 지팡이를 물어 가로채더니 캥캥거리며 풀숲으로 던져버렸다. 그것을 신호로 여우들은 한꺼번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물어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발뒤꿈치를 물어 짚신짝을 벗기고, 머리 위로 날아올라 갓을 벗겼다. 그리고 등 뒤로 뛰어올라 괴나리봇짐의 어깨 멜빵을 이빨로 끊으려 했다.
백 년 묵은 여우가 둔갑한다더니 그런 놈들이 몰려온 듯싶었다.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그는 단단히 다짐하였지만 여우들이 난리를 치는 통에 옆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마음이 불안하여 마구 달리다 보니 길이 좁아지고 바위들이 앞을 막았다. 아, 길을 잘못 들었구나 생각하고 거꾸로 달려 나왔으나 큰길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해가 꼬박 넘어갔다.
다행히도 여우들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그 때 그는 숲속에 있는 작은 오두막을 발견하였다. 거기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립문 앞에서 목을 뽑고 들여다보았다. 거기 묘령의 처녀가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이러면 안 돼. 내가 여우한테 홀려 있는 거야.”
그는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였으나 의지와는 달리, 여우가 나오는 흔한 옛날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사립문을 열고 들어갔다.
“고갯길을 오르다가 길을 잃었소이다. 처마 밑에서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주시오.”
처녀가 얌전하게 말했다.
“여기는 산도둑들이 있는데다가 불여우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 고개를 천 명이 모여서 넘으라고 천명고개라 하는데 왜 혼자 길을 떠났습니까?”
그는 배탈이 나서 뒤떨어졌다고 말할 수 없어 그냥 우물거렸다.
“혹시 여우를 보셨나요?”
선비는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은 여우 몇 마리가 나타나 어찌나 까부는지 경황 중에 길을 잃었소이다.”
처녀는 놀라는 얼굴을 했다.
“큰일 날 뻔했군요.”
처녀는 조용조용 움직여 밥상을 차려서는 툇마루 위에 올려주었다. 몸매와 행동이 매우 부드럽고 고왔다.
선비가 물었다.
“왜 처녀는 혼자 산 속에 살지요?”
처녀는 머뭇머뭇하다가 길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소녀는 경명현의 산 도둑 부두목의 딸입니다. 두목과 아버지와 부하들은 먼 고장으로 부잣집을 털러 갔지요.”
선비는 처녀의 솔직하고 소박한 말에 호감이 갔다.
처녀가 다시 말했다.
“부끄럽지만 선비님께 부탁이 있사옵니다.”
“무엇이오?”
그는 숟갈을 든 채 처녀를 바라보았다.
“제 아버지는 비록 도둑이지만 저를 몹시 사랑하십니다. 양반 댁을 털 때는 책도 갖고 오십니다. 덕분에 소녀는 글을 깨쳤사옵니다. 지금은 소학을 읽는데 어렵습니다.”
선비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산중에서 혼자 책을 읽다니요?”
“겨우 시늉만 할 뿐이옵니다. 아버지나 아버지 동료들은 모두 까막눈이고 아무에게도 물어 볼 수가 없습니다. 소녀가 이해할 수 없는 문구를 풀어 주실 수 있는지요?”
선비는 선선히 승낙했다. 공부하기 싫어서 부모에게 그렇게 야단을 맞고, 끝내 과거시험도 포기하였지만 그래도 사서와 삼경은 읽은 터였다. 소학 따위는 식은 죽 먹기처럼 자신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 선비는 처녀에게 소학의 어려운 부분을 가르쳐 주었다.
밤이 깊어지자 처녀는 방안에 눕고 선비는 툇마루에 누웠다. 밤 뻐꾸기가 울고 부엉이도 울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던 그는 처녀가 손을 잡는 바람에 눈을 떴다.
“산중이라 밤공기가 차갑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가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가자 처녀가 그의 품에 안겼다.
“평생에 선비님 같은 분을 모시는 게 소원이었사옵니다.”
선비는 처녀와 하룻밤 사랑을 나누었다. 그는 감회가 컸다. 그리고 산 속에서 보내는 밤이 행복했다. 전라도에서 보름동안 머나먼 길을 걸어왔는데 이게 웬 행운이냐 싶기도 했다.
그러나 아침에 그는 자신이 붉은여우 꼬리를 잡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다가 잠에서 깨었다. 모든 것이 꿈이었다. 그는 마른 나무 삭정이를 안고 숲속에 발가벗고 누워 있었다.
허무하고 아쉽고 얼떨떨한 느낌으로 일어나 옷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거 큰일 났구나 생각하면서도 그는 어젯밤 일이 아쉬워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처녀가 있던 초막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벌거벗은 채로 큰길을 찾아 걸어가는데 여우들이 캑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저놈들한테 홀렸었군.”
그는 중얼거리며 걸었다.
한참만에 그는 고갯길을 오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 살려요!”
그는 한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리고 소리쳤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말 잔등에 얹는 낡은 누비헝겊으로 그의 몸을 덮어주었다.
“쯧쯧 도둑을 만나 옷을 빼앗겼구려.”
“아니오. 여우에게 홀렸었지요.”
그는 울상을 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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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호님의 댓글
게양산에 관한 여러가지 설화 모두 읽어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