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원규(65회)의 인천설화(5)--중심성 사적비
본문
수십 번 쓰러진 중심성 사적비
계양산 경명현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길게 이어진 성벽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이것이 중심성(衆心城)이다.
이 성은 부평부사 박희방(朴熙房)이 백성들을 부역으로 동원해 쌓았다. 조선조 말기, 이양선이 자주 출현하자 고종은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여 교시를 내렸고 박희방은 1883년(고종 20) 9월에 쌓기 시작하여 한 달 만에 완공했다.
경명현은 한반도 남북을 가로지르던 옛 중심 교통로의 한 요충이었고 이곳을 통과해 70리를 가면 한양에 이를 수 있었다. 서해안을 지키는 수비군이 무너지면 2~3km 떨어진 이곳에서 적을 막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고종은 이 고개에 성을 쌓게 하였다.
축성을 끝내고 박희방은 성문 옆에 축성의 경위를 기록한 ‘중심성 사적비’를 세웠다. 그는 고을의 원로들에게 말했다.
“이 사적비는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 오랑캐를 막아야 한다는 호국의 정신을 길이 알려주게 될 것입니다.”
그는 비석을 세우고는 중심성을 감회어린 눈으로 돌아보았다. 나라 경제가 어렵고 백성들도 사정이 어려운데 그는 악전고투해서 이 성을 쌓았던 것이다.
“신식 총을 가졌다는 서양 오랑캐들이 바다에서 상륙해 서울로 가려면 여기를 장악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여기서 목숨을 걸고 건곤일척의 전투를 할 것입니다.”
그는 다시 고을 원로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이 사적비는 엉뚱한 속설 때문에 수십 번을 쓰러지고 다시 세워졌다. 이곳에서 가까운 마을 사람들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것이 서 있으면 자기 집안 며느리가 바람이 나서 부정한 행실을 한다고 믿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산 아래 박첨지네 며느리가 옆 마을 홀아비와 정분이 나서 내쫓겼다지 않은가. 중심성 비석이 여자들로 하여금 외간남자의 품속을 그리워하게 만든다네.”
그의 벗이 말하였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들었네. 최근 수년간 우리 마을이나 이웃 마을에 젊은 여자가 탈선하는 일이 몇 차례나 생기기 않았나. 그게 모두 그 비석 때문이라네.”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우리들 모르게 마누라가 바람이 나면 어떡하나.”
그런 속설이 퍼져 나가고 마침내 누군가가 그 사적비를 쓰러뜨렸다.
부평부사 박희방은 비석을 다시 세우며 어이가 없어서 탄식을 했다.
“어리석은 백성들 같으니라구. 걸핏하면 이양선이 나타나 통상을 하라고 협박을 하고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져 있는 때가 아닌가. 그걸 막기 위해 성곽을 쌓고 몸을 던져 나라를 지키자고 한 비석에 웬 부정한 여자들을 거기 끌어다 붙이는가.”
그리고 그는 명령하였다.
“널리 알려라.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만든 자는 투옥하고, 그것을 퍼뜨리는 자는 장형(杖刑) 서른 대, 구경하고 들은 자도 열 대에 처하겠노라.”
그러나 이상하게 돌아가는 민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경험 많고 판별력이 높은 관장이었으나 귓속말로 퍼지는 유언비어를 차단할 수 없었다. 게다가 사적비를 누군가가 또 쓰러뜨렸다.
박부사는 명령하였다.
“어서 다시 일으켜 세우라. 그리고 거기 경비병을 세우라.”
그래도 막을 수가 없었다. 언제 경비병의 눈을 속였는지 사적비는 또 쓰러졌다. 그렇게 쓰러지고 세워지기를 반복하자 박부사는 다시 일으켜 세우기를 포기하였고 다음해 다른 관직으로 옮겨갔다.
박부사가 전출되어 갔지만 중심성 사적비는 쓰러지고 일어서는 일을 반복했다. 박부사 대신에 누군가가 열심히 다시 세웠는데 그것은 마을의 여인들이 정절을 잃기를 바라는 짓궂은 한량들이었다.
그들은 밤에 키득거리며 성으로 갔다.
“허무맹랑한 말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실제로 그리되지 않았는가. 지난 삼 년 간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정분이 났는가 말일세.”
“그러게 말일세. 비석이 다시 세워졌다는 소식이 들리면 여자들은 외간남자의 거시기가 세워진 것으로 여겨 스스로 눕혀지고 싶은가 보이.”
“우리 같은 한량들에게 여자들이 눕혀지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말이야.”
그들은 사적비를 세우고 산을 내려왔다.
그러면 누군가가 또 쓰러뜨렸다. 그들은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쓰러지고 세워짐을 끝없이 반복한 중심성 사적비는 광복 후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성문인 공해루(控海樓)도 무너져 자취가 사라지고 중심성도 거의 다 무너진 채 그 비석만 덩그러니 누워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인천상륙작전 때 폭격으로 박물관이 파괴되면서 사적비는 없어졌다.
어떤 사람은 미군의 함포를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하고, 어떤 사람은 무너진 박물관에서 누군가가 꺼내서 계단이나 담장을 쌓는 재료로 썼을 것이라고 말한다.
중심성은 부평의 한 애국심 많은 부자가 헌금한 돈과 백성들의 울력으로 쌓았다고 전해진다. 1990년대에 인천지방향토문화연구소(소장 李薰益)가 실측한 기록에 의하면 성문을 중심으로 동쪽이 171m, 서쪽이 297m, 총연장이 471m였다. 성곽의 아래 너비는 3.3m 맨 위 너비는 2m였다.
그러나 성을 쌓을 때 한 달 만에 완공한 것이라 별로 단단하지 못했다. 자갈과 흙을 섞어 쌓아 올리고 외부를 돌로 감쌌으나 엉성하였다. 재정도 부족했지만 현장에 축성 전문 토목기술자가 없었고 지휘자인 박희방도 문관 출신이었다. 부사 박희방은 백성들의 마음을 모아 축성했다 하여 ‘중심성’이란 이름을 붙였다. 성문은 공해루(控海樓)라고 이름 짓고 현판을 걸었다. 한 번도 군사작전이 일어나지 않았고 일제에 강제 합병된 뒤 방치되다가 10년쯤 된 뒤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성문은 1914년에 일제가 헐어버렸다.
말썽 많았던 중심성 사적비에 기록된 내용(한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계양산 서쪽에 고개가 있으니 그 이름이 경명이고 연해관문이라 이를 수 있다. 내가 이 고을에 관장으로 와서 방어를 결심하였으나 바로 이루지 못하였는데 그 이듬해 9월 말에 폐하의 조칙이 있어 성을 쌓게 되었다. 아전과 백성들에게 여기 관문을 지켜야 나라와 고 을이 안전한 점을 말하였더니 백성들이 즐겁게 울력에 응하여 서쪽에 장대를 쌓고 군사훈 련을 하는 곳으로 삼았다. 문은 고개 이름을 따서 경명문이라 하고 바다를 바라보며 지키 게 하는 뜻으로 누각을 공해루라 하고 성 이름을 중심이라 한 것은 읍민이 마음으로써 성 을 만들었다 함이라. 그런 연유로 중심성이라 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아울러 무 기를 고치고 포사들에게 굳게 지키게 했다. 성을 다 쌓은 날에 고을의 여러 사람들이 이 업적을 기리는 글을 문장을 잘 쓰지 못하는 나에게 쓰게 청하므로 특별히 읍의 상․하동에 서 금 60냥을 출연하여 축성자금을 마련한 것을 갸륵하게 여기며 이 글을 쓰노라.
광서 9년 계미 10월 행부사 박희방이 기록하고 쓰다.
이원규와 푸른 날개 Since 2003에 가면 이원규의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novelistlee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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