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못난 자식도 내 자식(!!!)
작성자 : 김연욱
작성일 : 2008.03.11 03:47
조회수 : 1,510
본문
어제 한 친구를 찻집에서 만났다.
그의 생일이라서 커피라도 한 잔
같이 하자고 불러낸 것이다.
그는 자리에 앉자 한동안
나를 멀거니 보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그의 눈물에 얽힌
사연을 알 수 있었다.
친구의 아들은 나이가
마흔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미국에서 학위를 따려고
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아들은 아내와 다섯 살,두 살 된
딸과 함께 생활하는데
아들의 생활비와 학비를 모두
친구가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십여 년 가까이
아들 가족을 뒷바라지 하느라
"커피 한 잔"마음 놓고 마실 수 없을 정도로
힘겹게 살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생일날을 맞아 그의 아들이 새벽에
"아버지, 나이 사십이 다 되도록
아버지께 조금의 도움도 못 드리고---"하고
한 없이 울면서 전화했단다.
지구 저 편에서 울면서 "아버지"하고
부르는 소리와 그 곁에서 어린 딸이
"아빠! 울지 마!"하고
따리 우는 손녀의 소리를 들으며
"걱정 마.괜찮아!"하고
아들을 달래고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사연을 털어놓으면서
"왜 이리 가슴이 아픈지" 하고
내 앞에서 그가 울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똑똑한 자식은 금방 학위를 따오는데
내 아들놈은 못나서---"하며
내 얼굴을 보았다.
나는 친구의 눈길을 받는 순간
가슴 한 가운데서
"못난 자식"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친구에게
"이 사람아,못난 자식이 어디 있나.
내 자식일 뿐이지"하고
손을 잡았다.
친구를 보내고
지하철 의자에 앉았을 때
창밖으로 지나가는
캄캄한 벽 속에서 갑자기
나의 "못난 자식"모습이 살아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천에 있는 어느 여고에
선생으로 있었던 때다.
박사학위 과정 입학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나는 혼자 하숙생활을 했다.
그런데 이 하숙생활은 엉뚱하게도
나를 나태하게 만들었다.
속박이 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
지겨운 공부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쩌다 인천 부두에서 보게 된 밴드의
현난한 공연이 눈앞에 보여
그런 연주자가 되는 것도 좋아 보였다.
나는 수업이 끝나면 부둣가
외국 선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클럽에 나가 맥주잔을 앞에 놓고
밴드 공연을 보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이 버릇으로 하여금
색소폰을 입에 물고
절규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저녁 아버지가
하숙방에 찾아왔다가
내가 없으니까
누구에게 물어서 클럽에 찾아오셨다.
아버지는 테이블에 앉아
넋이 빠진 사람처럼
무대를 쳐다보는 내 등 뒤로 와서
어깨에 손을 올리며
"아이고,이 못난 놈아"하셨다.
그리고 웃으셨다.
나는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콱 막혔다.
술집에 앉아 있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아직도 철이 없어서"하는
아버지의 마음과
"내 자식이기에" 하는 사랑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뒤
제자리로 돌아왔다.
"못난 자식"이라는 말에 담긴
부모의 마음에는
사랑의 의미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언제나 내 편에만 서 주고
언제나 내가 잘 되기만을 기원하는
외곬 사랑이 매달려 있는 것이다.
가끔 "못난 자식"을 둔
부모가 내뱉는 한숨 속에
"내 자식이기에"라는
사랑의 절규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모르는 자식이 있다면
너무 삭막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좋은 생각 중에서==
그의 생일이라서 커피라도 한 잔
같이 하자고 불러낸 것이다.
그는 자리에 앉자 한동안
나를 멀거니 보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그의 눈물에 얽힌
사연을 알 수 있었다.
친구의 아들은 나이가
마흔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미국에서 학위를 따려고
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아들은 아내와 다섯 살,두 살 된
딸과 함께 생활하는데
아들의 생활비와 학비를 모두
친구가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십여 년 가까이
아들 가족을 뒷바라지 하느라
"커피 한 잔"마음 놓고 마실 수 없을 정도로
힘겹게 살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생일날을 맞아 그의 아들이 새벽에
"아버지, 나이 사십이 다 되도록
아버지께 조금의 도움도 못 드리고---"하고
한 없이 울면서 전화했단다.
지구 저 편에서 울면서 "아버지"하고
부르는 소리와 그 곁에서 어린 딸이
"아빠! 울지 마!"하고
따리 우는 손녀의 소리를 들으며
"걱정 마.괜찮아!"하고
아들을 달래고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사연을 털어놓으면서
"왜 이리 가슴이 아픈지" 하고
내 앞에서 그가 울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똑똑한 자식은 금방 학위를 따오는데
내 아들놈은 못나서---"하며
내 얼굴을 보았다.
나는 친구의 눈길을 받는 순간
가슴 한 가운데서
"못난 자식"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친구에게
"이 사람아,못난 자식이 어디 있나.
내 자식일 뿐이지"하고
손을 잡았다.
친구를 보내고
지하철 의자에 앉았을 때
창밖으로 지나가는
캄캄한 벽 속에서 갑자기
나의 "못난 자식"모습이 살아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천에 있는 어느 여고에
선생으로 있었던 때다.
박사학위 과정 입학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나는 혼자 하숙생활을 했다.
그런데 이 하숙생활은 엉뚱하게도
나를 나태하게 만들었다.
속박이 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
지겨운 공부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쩌다 인천 부두에서 보게 된 밴드의
현난한 공연이 눈앞에 보여
그런 연주자가 되는 것도 좋아 보였다.
나는 수업이 끝나면 부둣가
외국 선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클럽에 나가 맥주잔을 앞에 놓고
밴드 공연을 보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이 버릇으로 하여금
색소폰을 입에 물고
절규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저녁 아버지가
하숙방에 찾아왔다가
내가 없으니까
누구에게 물어서 클럽에 찾아오셨다.
아버지는 테이블에 앉아
넋이 빠진 사람처럼
무대를 쳐다보는 내 등 뒤로 와서
어깨에 손을 올리며
"아이고,이 못난 놈아"하셨다.
그리고 웃으셨다.
나는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콱 막혔다.
술집에 앉아 있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아직도 철이 없어서"하는
아버지의 마음과
"내 자식이기에" 하는 사랑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뒤
제자리로 돌아왔다.
"못난 자식"이라는 말에 담긴
부모의 마음에는
사랑의 의미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언제나 내 편에만 서 주고
언제나 내가 잘 되기만을 기원하는
외곬 사랑이 매달려 있는 것이다.
가끔 "못난 자식"을 둔
부모가 내뱉는 한숨 속에
"내 자식이기에"라는
사랑의 절규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모르는 자식이 있다면
너무 삭막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좋은 생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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