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특별기고 /지용택(56회) 새얼재단이사장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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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
특별기고 /지용택 새얼재단이사장
근래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독일·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는 지난 2006년 가을부터 독일과 프랑스 양국에서 교재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대단히 좋다고 한다. 이 책에는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많다.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유대인수에 대해 프랑스판은 유대인 500만, 집시 20만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오히려 독일판엔 유대인 600만, 집시 50만명으로 희생자수를 늘려 적고 있다. 양국 모두 나름대로 근거가 있겠지만 가해자인 독일이 희생자 숫자를 좀 더 늘리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점이다.
1970년 2월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빌리브란트 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어 과거를 사죄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사전에 예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브란트 총리를 수행한 비서들은 물론 폴란드 국민들까지 깜짝 놀랐다. 그는 과거를 반성하는 새로운 독일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국가정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을 피해당사국과 세계에 보여주었다. 이 한장의 사진에서 짙게 배어나는 진정성이 세계를 감동시켰다.
1945년 5월8일 종전 이후 프랑스는 세계적으로 '레지스탕스의 나라'라는 신화가 지배했다. 그 가운데 독일점령하의 프랑스와 프랑스인들이 저질렀던 잘못들은 '위대한 프랑스'에 묻혀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같은 프랑스인들의 영웅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사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를들어 전후 파리경찰청장 및 예산장관을 역임했던 모리스 파퐁은 유대인 1천690명의 강제이송을 감독했던 전력으로 인해 1998년 프랑스의 고위관료중 유일하게 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또 1942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도피했던 유럽의 수많은 유대인 1만3천152명을 프랑스경찰이 체포하여 강제수용소로 보내 결국 죽게 만든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1992년 7월6일 미테랑은 프랑스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이 문제에 대해 공식사과하고, 2000년 7월16일을 '프랑스의 인종차별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국가범죄'를 애도하는 날로 선포했다. 프랑스 스스로 자신들의 잘못을 철저하게 반성하고 스스로 단죄할 때에만 비로소 시민의 참다운 긍지를 느끼고, 독일은 이들 앞에서 다시한 번 고개숙여 반성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 역시 쉼없이 그들의 과오를 반성해왔다. 종전 60주년을 기념하며 지난 2005년 통일독일의 수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개선문에서 멀지 않은 금싸라기땅에 유대인학살추모공원을 조성했다. 이곳은 과거 전쟁중에 히틀러의 비밀지하벙커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희생자들을 상징하며 높낮이가 각기 다른 2천711개의 비석들로 이루어진 추모공원을 걷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내면을 성찰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독일과 프랑스의 공동교과서를 보면서 새삼 역사는 사라지거나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세월과 더불어 용서할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한 번 느끼게 된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 구한말 서구열강이 인천 강화도로 침입해 민간인을 살해하고 난리를 일으킨 사건으로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가 있다. 그러나 병인양요는 비밀리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프랑스 출신의 5대, 6대 주교를 처형하고, 서울과 충청도에서 천주교인 2천여명을 순교하도록 만든 병인박해가 원인이었다. 신미양요는 대동강에서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우고 승선했던 선원들을 살해한 것이 동기가 된다.
그러나 1875년 9월 운양호사건이라 불리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왜요(倭擾) 및 침략이라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앞서의 두 사건과 달리 아무 이유없이 침략한 것이기 때문에 성격이 전혀 다른 침략전쟁의 전초전이었다. 일본장교 이노우에 요시카 소령의 보고서에서 따르면 당시 일본의 침략행위로 인해 조선인은 시민 35명이 사망하고 납치는 16명, 부상 및 도망자는 4백~5백명으로 추산된다. 피해규모를 보았을 때 과연 이것을 '사건'이라 부를 수 있는 일일까! 인천의 뜻있는 사람들이 뒤늦게나마 당시 영종에서 순직한 35분의 영가를 위해 제향을 올렸고,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왔는데 올해로 4회를 맞이하고 있다. 찾아보면 일본의 잔혹과 만행의 역사는 한없이 길어질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수년간의 노력 끝에 간신히 진전되고 있는 북미간 평화적 접근노력의 일환으로 어렵사리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제외하였다는 사실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사건(17명)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수상과 정부각료들이 강력하게 불만을 토로했지만 한국의 모든 여론매체들과 정부는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북한이 국적이나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민간인을 납치한 것은 일본인과 함께 분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국민들은 해방 이후 60여년 동안 중단 없이 민주화를 위한 과정을 어렵게 달성한 경험이 부수(膚受)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시민은 질곡의 36년을 용서는 하되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도 일본인은 알아야 한다.
남북문제는 한민족 7천만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며, 핵문제는 더 나아가 아시아의 평화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일본의 일방적인 사고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일본은 지금까지 북한에 대해 전후배상을 한 바 없고, 금일에 이르기까지 동경 및 일본 어느 곳에도 희생된 한국인의 추모 공간 하나 세우지 않았다. 일본은 언제까지 사과만 할 것이냐고 묻지 말고 그 진정성을 한국 및 동아시아 피해국가에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엊그제 일본의 타모가미 토시오 항공막료장(공군대장)이 한국 및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부인하는 논문으로 상을 받았다. 이것이 일본지식사회의 현재 수준이라면 과거 그들에게 피해를 당했던 나라들은 현재의 일본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같은 결과는 전적으로 일본이 자초한 것이다.
/지용택 새얼재단이사장
종이신문 : 20081111일자 1판 9면 게재
인터넷출고 : 2008-11-10 오후 6: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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