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때려?/강 길웅 신부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 다르며, 어른의 생각은 아이들의
생각과 다르다. 이를테면 자주 아이스크림이나 핫도그만을 먹으려
하며 또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거나 오락실에 가서 하루 종일
지내려 고도한다. 그러나 부모는 그렇게 하도록 자녀에게 허락해
주지 않는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쉽고 편하며 재미있는 길만을 선택
하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원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고달프고
힘들며 눈물 흘리는 길을 원하신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속담에 ‘귀한 자식 매 한대 더 때리고, 미운 자식 떡 한 개 더
준다’는 말이 있다. 왜 때리십니까? 사랑하니까 때린다.
내 자식 좋은 사람 되라고 때린다. 따라서 부모가 때리는 회초리의
의미를 모른다면 그는 자식이 아니다. “왜 때려? 아버지가 뭔데
때려?” 하고 대든다면 그 자식은 사람도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올바르게 믿으면서도 애매하게 맞을 때가 있다.
맞을 이유가 없는데도 억울하게 눈물 흘리며 상처받을 때가 있다.
왜 맞는가?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니까 맞는다.
이걸 가지고, “왜 때려? 하느님이 뭔데 때려?” 하고 대든다면 그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다.
히브리서 12장 5-6절에 보면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라고 했다.
또 이런 말이 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
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 하신다” 그렇다.
우리 생애에서 만나는 어떤 아픔도 하느님이 사랑을 떠나서는 이해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일을 시킬 때는 그 일을 할 만한 자녀
를 골라서 시킨다. 다시 말해 능력이 있고 믿을 수 있는 자녀에게
일을 시킨다. 아무에게나 시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부여 받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고 그 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가지고 자식이 “아버지는 왜 나만 시켜?” 하고 대든다면 그
녀석은 정말 주제파악이 안 되는 녀석이다. 시킬 만하니까 시킨다.
내 자식이니까 시키며 “너‘를 위해서 라면 생명이라도 바칠 수 있는
애정이 있으니까 시킨다. 남의 자식이라면 시키지도 않는다.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믿고 사랑하시는 자녀로 하여금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기를 원하신다. 사랑하는 사람은 실제로 아픔
을 나누고 싶어 한다. 이걸 가지고 “하느님은 왜 나만 시켜?” 하고
대든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다. 왜 시킵니까? 그만한
애정과 신뢰가 있으니까 시킨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은 아무에게나 일을 시키지 않는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에게 시험지 채점이나 환경정리를 시키기도 한다.
이걸 모르고 학생이 “선생님은 왜 나만 시킵니까?” 하고 대든다면
그는 참으로 선생님의 사랑을 모르는 학생이다.
하느님께서도 시킬 만한 사람을 골라서 일을 시킨다. 아무에게나
시키지 않는다. 흔한 말로, ‘괜찮은 사람’, 그리고 당신이 예뻐 하는
사람을 시킨다. 이걸 가지고 “하느님은 왜 저만 시킵니까?” 하고
불평한다면 그는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래서 하느님의 깊으신 뜻을 알아야 한다. 큰 사람에겐
큰일을 시키고 작은 사람에겐 작은 일을 맡긴다. 능력이 큰 사람
에게는 큰 십자가를 주시고, 능력이 작은 사람에게는 작은 십자가를
주신다. 그걸 가지고 사람들은 가끔 착각을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왜 고통을 주시는가?” 하고 의심을 한다.
왜 고통이 주어지고, 왜 십자가가 주어집니까? 하느님께서 사랑하시
기 때문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그만큼 믿으시고 능력을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저도 처음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잘못 알았다.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도 오해를 했다. 사랑하시지 않고 오히려 미워
하신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선 저에게만 일을 시키셨다. 저만 주로 아기를
돌봤으며, 일만 있으면 조퇴하고 와서 동생을 보곤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설거지를 했으며 동생 기저귀를 빨았고
청소도 단골이었다.
그 때 당시. 어머니께서 시장엘 가시면 보통 네 시간, 다섯 시간
이었다. 1950년대의 시장에는 구호물자로 나왔던 옷가지들이 많았
다. 어머니는 돈도 없으시면서 구경하시느라 늦으셨다.
그러면 그 때마다 동생 보는 일은 저에게만 맡기셨다. “왜 저만
시킵니까?” 하고 물으면 어머니는 오히려 시키는 대로 안 한다고
저만 나무라셨다.
또 아기만 보는 것도 아니였다. 어머니가 시장에 가신 뒤엔 방청소나
설거지를 깨끗하게 해 놔야 했다. 정리를 안 해 놓으면 난리가 낫다
저는 그래서 어머니가 싫었다. 정말로 싫었다. 가출도 몇 번 했다.
어렸을 때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하시더니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았다.
제가 사범학교를 나와 선생으로 발령받아 집을 떠날 때는 정말 기뻤
다.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본래는 신학교에 들어가 신부가 되고
자 했지만 그것도 어머니께서 브레이크를 거시어, 집에 빚이 많으니
빚을 갚고 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 운명이 계속 어긋나게 되었
다.
그 때 제 여동생이 심한 병을 앓고 있었는데 고치지도 못하면서 빚
만 몽땅 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청소년 시절에 제대로 먹지도 못 하
고 또 옷 한 벌 제대로 입어 본 적이 없다. 저는 둘째라 늘 형이
입던 옷을 입었으며 형이 쓰던 책을 그대로 물려받아 썼다.
선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저는 가난했다.
봉급을 타면 전부 집으로 보내야 했다. 돈을 안 쓰기 위해 일부러
섬을 지원하여 섬 마을 선생이 되었지만 아무리 벌어도 갚아도
표가 나지 않았다. 그 때는 한 달 이자가 보통 1할 5부였다.
아버지와 형 그리고 저까지 셋이서 버는 데도 버거웠다.
그러나 밤이 아무리 길어도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빚을 다 갚는 데는 제가 선생이 되고 십여 년이 걸렸다.
참으로 고달픈 세월이었다.
그 때 빚을 다 갚고 나니 제 나이가 이미 서른이 넘어 있었다.
그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며 다
부숴 지고 사라진 꿈이었다. 그러나 꿈이 완전히 깨졌다고 여겼을
때 다른 꿈이 저를 유혹했다.
저는 그 때, 하고 싶은 일이 몇 가지 있었다. 특히 머슴살이를
하고 싶었고 광부도 되고 싶었으며 또 원양어선도 타고 싶었다.
그 때 선생과 머슴은 비교가 안 될 수준이었다. 광부나 어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기어이 하고 싶었다.
빚을 다 갚고 났을 대 배를 타기위해 먼저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경험이 없기 때문에 태워 주지 않고 사무실에서 사무 보는
일을 시켰다. 저는 그래서 강원도 도계 읍에 있는 대한 석탄 공사
도계 영업소를 찾아가 광부가 되었다.
그 때 점리항 에서 일했는데 광부가 하는 일은 참으로 힘들었다.
3교대 근무도 처음이지만 삽질이 어려웠고 통나무를 짊어지고
굴속을 기어 다니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도 저는
광부 일을 좋아했다. 제가 원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갱 속에서 탄을 캐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면회를 오셔서는
어머니께서 급히 찾으신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여 집에 갔더
니 어머니께서 저를 붙들고 제발 광부 일만은 하지 말라고 사정을
하시면서 차라리 장사를 하라고 하셨다.
저는 평생 탄을 캘 생각은 아니었고 힘든 일을 나름대로 경험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제 뜻을 못 알아들으시기에 제가 다시
“장사도 돈이 있어야 하지, 빈손으로 무슨 장사를 합니까?” 하고
핑계를 댔다. 물론 장사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갑자기 얼굴빛이 환해지시며 돈은 당신이 마련해
줄 테니 한 번 해 보라는 것이었다. 아니, 여태껏 빚 갚느라고 고생
을 했는데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돈이 없는 줄은 제가 잘 압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물었다. “돈이 어디 있습니까?” 그 때 어머니께서,
지금 사는 집을 팔아서 저에게 주신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가 빚에 허덕이면서도 집은 팔지 않고 지키고 있었는데
그걸 파신다는 것이다. 제가 그랬다. 집을 정 파시겠으면 형이 이 집
의 장남이니까 형에게 주시라고 했다. 그러자 형은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러면 동생을 주라니까 동생도 안 되고 네가 필요하다면, 저에게만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저는 그 때 깜짝 놀랐다. “너 만 준다”는 그 말씀이 참으로 고마웠다.
어렸을 때는 꼭 저만 골라 일을 시키시더니, 웬일로 저에게만 집을
주신다는 것이었다. 저는 그 때 한 푼도 받지 않았지만 그 말씀 한
마디로 서운했던 보상을 다 받았다. 섭섭했던 오해를 다 풀었다.
제가 본래 아기를 잘 돌봤다. 지금도 아기들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저만 시키실 수 밖에 없었고, 형과 동생들은 아기를 저
만큼 보지 못했으며, 설거지를 해도 몇 년 동안 하면서도 그릇하나
깬 적이 없었다. 그러나 형이나 동생은 처음부터 깨 버렸다.
그러니까 안 시킨다.
엄마들이 어디 출타 할 때 제일 걱정되는 것이 집에 남겨 놓은 아기
다. 그 일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가 없고 제일 믿는 사람에게 맡겨야
안심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는 저를 믿으셨고 또 저를 가장
인정해 주셨던 것이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고달픈 것이다.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모르면서 매를 맞고 있는지
모른다. 왜 고통이 주어지고 왜 눈물이 주어집니까?
다른 이유가 없다. 하느님께서 누구보다 그를 믿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도저히 이해 가 되지 않는다.
욥기에 보면, 하느님이 보시기에 욥만큼 올곧으며 착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탄이 욥을 시기하여 하루
아침에 욥은 열 명의 자녀와 있는 재산을 다 잃고 큰 불행에 빠지
게 된다. 그리고 욥 자신도 병에 걸려서 비참한 신세가 된다.
욥이 당한 불행은 욥의 죄나 잘못이 아니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도 그만한 사람이 없다고 당신 스스로 사탄에게
자랑하셨던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는 순전히 사탄의 시기 때문에
너무 심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받는 고통도 사탄의 시기에서 오는 것이 많다.
애매 하게 얻어맞는 것은 다 하느님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왜 얻어맞고 왜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될까? 다른 이유가 없다.
사탄이 시기할 만큼 하느님께서 사랑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 기도에 보면 5처에서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진 것을 묵상한다. 그런데 시몬은 무슨 봉사정신이
투철해서 짊어진 것도 아니오, 사랑이 누구보다도 많아서 짊어 진
것도 아니다. 막말로 재수가 없어서 짊어 진 것이다.
그 날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구경 나와 있었다. 예수란 자를 십자가
에 매달아 처형을 시킨다고 하자 너도 나도 나와서 구경들을 했다.
그 때 예수님이 걸음을 잘 걷지 못하자 구경꾼인 시몬을 강제로 끌
고 와 십자가를 짊어지게 한 것이다.
그러나 시몬은 자기도 모르게 짊어진 십자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칭송을 듣는지 모른다. 시몬은 그럴 자격도 없는 인생이었다.
지고 싶어 진 것도 아니고 열심 해서 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재수 없게 걸려 든 것이 은혜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 짊어지는 십자가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또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가 억지로라도 짊어지면 무한히 큰 은혜가 된다.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축복이 된다.
십자가는 세상의 저주였다. 누가 십자가에 매달렸다 하면 그는 저주
받은 자이며 집안의 불명예요 불행이었다, 이보다 더 큰 비극도
없었다.그래서 지금도 안 믿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저주이다.
전 생에 죄가 많아서 짊어지는 아픔이요, 팔자가 사나워서 얻어맞는
불행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러면 세상은 요지경이다. 용서하고 참으며
사랑했던 모든 일들이 다 허무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결코 지금 힘들다 해서 불행이 아니오, 시련이 주어졌다 해서 비극
도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는 저주라는 판단 때문에 세상을 지옥
처럼 사는지 모른다. 절대로 저주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스스
로 우리가 받을 저주를 몽땅 가져가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에는 더
이상 저주가 남아있지 않는다.
예수님이 스치시었다 하면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된다.
그분이 밟으신 땅은 성지요, 담그신 물은 성수가 된다. 입으신 옷은
성의요, 또 낳으신 어머니는 성모가 된다. 그러니까 십자가도 보통
십자가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지셨기 때문에 성 십자가가 된다.
고통과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본래 고통은 불행이요, 죽음은 가장
큰 저주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고통을 받으셨기 때문에 고통
도 은혜며, 예수님 친히 죽음의 세계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죽음도
은혜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은 달라졌다. 우리가 복이라고 믿었던 것은 결코
참된 복이 아니었으며 세월이 지나면 오히려 허무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불행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놀라운 은혜를
건져 주셨다. 이제 십자가는 벌이나 수치가 아니다.
옛날에 어떤 왕이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법을 만들어
공포에 떨었다. 누구든지 간음하는 자는 두 눈을 뽑아 버린다는 법
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왕의 외아들이 이 법을 어겼다. 왕자만을
용서하자니 백성들 앞에 체통이 서질 않고, 그렇다고 두 눈을 뽑아
버리자니 왕이 될 사람인데, 그렇게도 할 수 없었다.
왕은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못해서 여러 날 고민 했으나 법은
어디까지나 법이었다. 왕도 법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내린 결단이
왕자에게서는 눈 하나만 뽑고 나머지 눈 하나는 왕 자신의 것을
뽑았다. 그렇게 해서 밖으론, 나라의 법을 지켰고 안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의 정을 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애꾸눈이 된 왕이 너무
도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다. 그러나 그 내력을 모르는 다른 백성들
에겐 왕의 애꾸눈이 웃음거리였다. 그들에게는 눈 하나가 없는 것이
그저 병신으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바로 그런 의미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친히 저주의 고통
을 짊어지신 하느님 사랑의 최고 표현이다. 십자가를 모르는 이들에
겐 십자가가 한낱 웃음거리요 놀림감이 될지 모르나, 신앙인들에겐
빛나는 은혜요 축복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십자가의 사랑과 승리를 기념한다.
마태오 복음16장21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당신이 받으실 수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가 펄쩍 뜁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립
니다. 메시아가 저주의 십자가에 진다는 것은 웃음거리요 스캔들
입니다. 절대로 그런 망측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
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하고 엄하게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걱정해 드리려다
오히려 된통 얻어맞았다. 메시아가 십자가를 지신다는 사실이 도대체
이해 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저주하는 자도 사탄이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판단 만을 고집하는 바보
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거부하면 그리스도의 걸림돌이 된다.
그분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우리가 십자가를 버리면 어떻게 그
분을 만날 수가 있겠는가? 억울해도 짊어져야 한다.
병든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 내는 아가씨가 있었다. 그 아가씨가
생각할 때 어머니는 무거운 짐 이었다. 어머니가 자기에게 잘해 준
것이 없었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오빠가 있고 또 언니들이 있었다.
그런데 대소변을 받아 내야 할 병든 몸이 되자 자기를 찾아온 것이
딸은 싫고 미웠다.
한 번은 ‘십자가의 은혜’라는 강론을 듣고 더 괴로워했다. ‘어머니가
은혜’라는 말씀이 괜히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울었다.
원통해서 울었다. 그런데 한참 울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은혜가 들어갔던 것이다. 이상했다. 결코 뉘우쳐서 운 것이 아니라
그냥 속상해서 울었던 것인데 하느님의 은혜가 들어간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가 갑자기 불쌍하게 보였다. 오갈 데 없이 외로운
신세가 된 어머니가 가엾게 여겨졌다. 오빠가 있고 언니들이 있지만,
그러나 며느리가 두렵고 사위가 무서워 가실 수가 없다. 어머니가
가실 곳이 없었다. 세상에 가실 곳이라곤 자기 집밖에 없었다.
피정이 끝난 뒤 딸은 집으로 달려가서 어머니를 껴안고 울었다.
잘못 했다고 빌었다. 그러자 어머니도 우셨다. 어머니도 모르실 리가
없었다. 당신이 죄가 많다 고 하셨다. 그리고 두 사람은 울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어머니를 잘 모심으로 정말 존경받는 인생이
되었다.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고통에는 다 그 의미가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우리에게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으신다.
고통을 모르는 조개 안에서 아름다운 진주는 생성되지 않는다.
십자가의 아픔을 통해서 내면을 감싸는 노력과 애정에서 아름다운
진주는 만들어 진다.
아시다시피,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렇다. 바닷가에 사는 조개
안에 단단한 어떤 이물질이 들어가게 되면 조개는 그것을 몸 밖으로
내보내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내보내지 못할 때 조개는 그 이물질을
내면의 액으로 감싼다. 움직일 때마다 거추장스럽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의 액으로 그 이물질을 감싼다. 그러다 보면 조개가 자라면서
그 혹도 커지게 된다.
이 혹은 사람의 암과 같다. 보통 성가신 게 아니다. 서서히 굉장한
고통을 주며 평생을 괴롭힌다. 그러나 힘들 때마다 사랑으로 감싸고
인내로써 참고 견딜 때 조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름다운 진주
를 만들어 사람에게 선사하게 된다.
조개는 자기가 그 찬란한 진주를 만드는 줄을 평생 모른다.
그저 팔자 사나운 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외롭게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와 같은 길에서 조개는 자기보다 수천 배의
가치가 있는 진주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고통을 참고 견디
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아름다운 보물을 하느님 대전에 바치게
된다. 억울하게 흘렸던 눈물은 보석이요, 참았던 아픈 가슴은 장미
나 백합이 된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분명히 다르다. 남보다 더
빨리 늙는 설움은 있을지 모르나 착하게 살았던 삶의 아름다운 세상
의 어떤 치장 보다도 훨씬 아름답고 빛나게 된다. 깊이 패인 주름
살과 굵은 손 마디 까지도 비할 수 없이 아름다운 보석이 된다.
언젠가 한 할머니가 찾아와서 당신의 인생을 고백했다. 이분이 본래
재산도 좀 있는 분이라 그저 괜찮은 집의 할머닌 줄만 알았는데 알
고 보니 고생을 많이 한 분이며, 세속 말로 팔자 사나운 길을 외롭
게 걸어온 분이었다. 사연은 이렇다.
이분이 구교 집안에서 태어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한 남자에게 당한 것이 임신이 되어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아기를
낳게 된다. 물론 병원에 가서 아기를 뗄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하느님이 두려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후로 평생 시집도 안 간다.
그런데 그 아들이 커 가면서 계속 말썽을 피운다. 사기도 치고
교도소에도 들어가서 엄마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래도 이 자매는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의 십자가로 알고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한다. 그런데 이 아들이 또 교도소에 들어갔다.
아들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도 그 모양이다.
이 할머니가 자기 삶의 서러웠던 사연들을 말하면서 슬프게 우시는
데 저는 그런 분인 줄은 몰랐다. 이때 할머니가, 하느님이 아니라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당신은 남편복도 없고 자식복도 없
으며, 있다면 천주대전에 받을 복 밖에 없다고 하셨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그리고 그분이
흘리는 눈물 속에서 진주보다 아름다운 보석을 보았다.
하느님이 두렵기 때문에 낙태수술을 할 수가 없었고 못난 아들일
망정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이라는 주님의 목소리가 그 눈물 속에서 들려 왔다.
요한 묵시록 7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9-14절)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어린양 앞에 흰 두루
마기를 입고 손에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 자랑스럽게 서 있는 광경
을 목격한다. 너무나 자랑스럽고 너무도 부럽게 보였다.
그 때 한 원로가 묻는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
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그리고 그 원로가 스스로 대답한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그렇다. 누구도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걷지 못했던 자들은 어린양
앞에 나설 수 없었다. 오라고 해도 나갈 수 없었다. 오직 그분 뜻
대로 살려고 노력하면서 눈물 흘렸던 사람과 고생했던 자들
이야말로 자신 있게 나서게 된다.
마태오 복음 11장 28절에 보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그분 대전에 떳떳하고 자신 있게
나갈 수 있겠는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열심히 살았던 자들이다.
이런걸 보면,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았던
일들은 허무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은 절대로 불행이 아니다.
벌이 아니다. 축복이다.
요한복음 8장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의 진정한 가치가 십자가위에 있었듯이 우리의 가치도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 위에서 발견하게 된다. 마치 조개의
놀라운 가치가 진주에 숨겨져 있듯이 사람의 참된 가치도 십자가에
감춰져 있는 것이다.
저에게 인숙 이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너무도 큰 환자였다. 돌도
되기 전에 병을 얻은 것이 평생 환자가 되어서는 가정에 많은 아픔
을 줬다. 그 때도 제가 동생을 업고 있었는데 등에서 기계가 돌아
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느낌이 아주 불길하여 얼른 아이를
내려놓고 보니 동생이 경기를 하는 것이었다.
저는 그 때까지 경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동생의 발작
하는 모습이 굉장히 무서웠고. 나중엔 어머니도 보시고 얼마나 놀라
셨는지 혼이 다 나간 듯이 보였다. 그 날부터 저의 집은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부모님은 딸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고. 병원마다 찾아
다니셨으며, 용하다는 약방마다 찾아다니셨다. 그러나 조금도 차도가
없었다. 오히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동생은 발작을 했다.
말이 발작이지, 한 번 발작하는 것을 보면 차마 눈 뜨고는 못 본다.
눈과 입이 옆으로 돌아가고 손발이 뒤틀려서 심하게 떨면서 괴성을
지르는데 그 발작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대개 5분이나10분 정도
하는데 굉장히 힘들게 보인다. 발작을 한 번하고 나면 아이가 한숨
을 쉰 뒤 깊은 잠에 떨어진다.
그런데 그런 발작을 매일 하는 것이다.
부모님은, 한약방에서 몸이 허하다 해서 보약을 많이 지어 먹이
셨는데 보약 탓인지, 그 무서운 발작을 하루에도 서너 번씩 할 때가
있었다. 힘이 좋으니까 오히려 발작을 많이 한다.
그리고 발작을 많이 한 다음날에는 하루를 쇤다.
힘이 빠졌기 때문이다.
참으로 무서운 세월이었다. 그 때는 이자가 1할5부였는데 빚도 많이
졌다. 치료의 효과는 전혀 없고 돈만 몽땅 들어갔다. 그 때 아버지께
서는 선생을 하셨는데 아홉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도 어려웠다.
매일 빚쟁이에 시달려야 했고, 먹고 학교 다니는 일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기도도 많이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54일 기도를 식구마다 돌아
가며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성모님은 응답이 없으셨다.
그 때 저희는 십자가가 뭔지도 모르면서 외롭고 서러운 길을 오랫
동안 걸어갔다. 그리고 그것이 은총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엔 낫게 해 달라고 하다가 나중엔 희망이 없게 되자, 그러면
얼른 천당으로 데려가 달라고도 기도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어느 것도 들어주지 않으셨다.
희망이 절벽이었으며 붙잡고 매달릴 것이 없었다.
제가 열 살 때부터 신학교에 간다고 했는데 그것도 다 포기하고
빚 갚기 위해 사범학교에 들어가서 선생이 되었다.
빚 갚는데도 오래 걸렸다. 아버지와 형과 저와 셋이서 버는데도
십여 년이 걸렸다. 참으로 어려운 세월이었다. 가난과 우환 속에서
우리는 삶의 아름다운 부분들을 몽땅 뺏기고 있었다.
동생은 실로 큰 십자가였으며 또 십자가를 분노와 불평으로만 받아
들이니 모든 불행이 그 십자가에서 나오고 있었다.
못 먹고 못 사는 것도 동생 때문이었으며, 부모님이 자주 싸우고 또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는 일도 동생에게서 나왔다. 동생은 참으로
무거운 짐이었으며 하느님의 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하느님께서는 공연히 우리를 찌르거나 때리
시지 않는다는 믿음이 들었다. 그래서 동생을 은혜로 받아들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동생의 병에는 분명히 하느님의 크신 뜻이
계시 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은혜로 받아들이자 그 날부터 동생은 하느님이 우리 집에
보내신 천사였으며, 동생의 무서운 아픔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죄에
대한 보석이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이젠 모든 은혜가 동생의 병
에서 나왔다. 심지어는 제가 나이 마흔에 신부가 된 것도 사람들은
동생의 병에서 온 은총이라고 믿었다.
제가 제 나이에 신학교에 갔다면 신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쫓겨
났어도 아마 수십 번은 더 쫓겨났을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선 동생을 통해 제가 인생의 여러 길을 걸어서 당신
께로 오도록 안배하셨다. 여러 경험을 통해서 더 다듬어지고 사람
꼴이 채워진 뒤에 저를 부르셨다.
동생은 우리의 추측보다는 오래 살았다. 스무 살부터는 완전히 식물
인간이 되어 말도 못하고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했으며 평생 누워서
지냈다. 동생이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먹여 주면 먹고 배설하고 또
발작하는 이 세 가지뿐이었다.
동생은 1993년 시월에 세상을 떠났다. 서른 아홉이었다.
뼈만 앙상했고 너무도 외로운 세상을 살다가 갔다. 그러나 아름다운
생애였다. 우리에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값진 생애였다.
이제 우리는 동생이 남겨 준 교훈을 간직하며 산다. 삶에서 무엇이
소중하고 또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깨우쳐 주었다.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우리에게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시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밤이 아무리 길어도 새벽은 꼭 찾아온다.
따라서 괴롭다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며 힘들다 해서 실망해서도
안 된다. 모든 고통에는 다 소중한 뜻이 있다. 공연히 하느님이
때리시는 것이 아니다.
묘한 것은, 십자가가 아무리 무거워도 일단 짊어지면 가볍다는 것
이다. 그것이 전봇대처럼 보여도 짊어지면 나무젓가락처럼 가볍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십자가를 지면 이상하게 십자가가 우리를
짊어져 준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이다.
하느님께선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매를 드시고 또 당신이 사랑
하시는 지를 시험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선 당신이 믿으시고
특별하게 사랑하시는 자에게 당신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가기를
원하신다. 십자가는 절대로 수치가 아니오 또 벌이나 저주도 아니다.
여러 분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무엇인가? 무엇이 여러 분의 인생을
병들게 합니까?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고 짊어지십시오. 무거운 짐
을 벗을 것이다. 그리고 부활의 놀라운 은총이 바로 거기에서 오며
새로운 광명의 세계가 바로 거기에서 열릴 것이다.
십자가의 저주를 은혜로 바꿔 주신 하느님, 저희들이 십자가의 의미
를 깨달아 용기 있게 짊어지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를 바라
보며 늘 감사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왜 때려』
사랑하는 만큼 기다리는 만큼 中에서
강길웅 신부(소록도 본당 주임)
|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