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의 미추홀 /교복(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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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09. 2. 9)
교복
조우성의 미추홀
전후(戰後)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미추홀 자 연배들에게는 교복이 따로 없었다. 평소 입었던 옷 왼쪽 가슴 언저리에 노란 비닐을 씌운 이름표와 흰 손수건을 접어 옷핀으로 달고 '앞으로 나란히'를 했던 입학식 때의 장면이 선하다.
간혹 부잣집 애들이 가죽으로 만든 고급 '란도셀'을 메고 등교해 까까머리들에게 은근한 부러움을 사기도 했지만 설날이 아니면 구경도 못했던 운동화를 저마다 얻어 신고 자랑스러워 했던 게 그 때 그 시절의 동심이었다.
교복을 입기 시작한 것은 4학년 무렵이었다. 까만 무명바지, 교복 '에리(옷깃)'의 학교와 학년 배지, 웃 옷에 달린 양철 단추가 근사해 보였다. 그것이 중학교 때는 '호크'를 채우는 군복풍 교복에 놋쇠 단추로 바뀌었다.
사춘기 낭만의 꽃이 만개하던 시절에는 '고교 팔난봉'들이 멋을 내느라 직접 다리미질을 하기도 하고 잠잘 때 이불 밑에 바지를 깔아 줄을 세웠다. 흰 '카라'에 풀을 먹여 빳빳하게 만드느라 여학생들도 노심초사였다.
교복이 식민지시대의 유산이라며 없앤 것은 군사독재 정권이었다. 권력 기반이 허약한 나머지 세상 눈치를 보며 프로야구 신설, 월급 통장 지급과 교복·두발 자율화 등을 강행했던 것인데 교복을 다시 입게 했던 것은 시대적 아이러니였다.
그런데 더 볼썽사나운 것은 업자들 농간에 교복 값이 웬만한 신사복보다 더 비싼 현실이다. '장사꾼은 제 애비도 속인다'는 말을 못 들어 환장한 저질 장돌뱅이들 같다. 이에 항의라도 하듯 졸업생들이 '교복 물려주기'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근검을 실천하는 미덕이나 기성 세대의 1인으로선 우세스럽기도 하다.
/객원논설위원
종이신문 : 20090209일자 1판 15면 게재
인터넷출고 : 2009-02-08 오후 9: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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